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

돌봄이 드리운 일상, 멈춘 나의 시계 [밀려난 삶의 반: 가족간병과 나·(上)]

입력 2024-05-21 20:38 수정 2024-07-23 17:33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5-22 14면
경인일보 디지털콘텐츠센터가 이미지 생성 AI 미드저니에 '직장을 다니면서 1형 당뇨에 앓는 어린 자녀를 돌보는 40대 여성'과 '가족간병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청년 간병인, '영케어러''를 입력해 일러스트를 만들었다. 이를 다시 재가공했다.

보통의 삶을 유지하는 조건


아들의 '1형 당뇨' 진단… 혈당관리 분투
가까이 사는 친정엄마·경제력 뒷받침에
감사하며 살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 생겨

'엄마 보호자' 된 8살… 병실서 수발 들어
공부시간 빼고 둘이 하나처럼 시간 공유
"노래하고 싶어" 내뱉고 밀려오던 원망

정보·대체 인력·비용적 여유 '핵심 요소'
인식조사 1천명 중 "준비 안돼" 응답 73%
하나라도 없다면 '가족 삶' 송두리째 흔들



가족돌봄청년 주당 평균 21.6시간 돌봄
'영케어러 삶' 일반 청년보다 2배 불만족
사회진출 등 '미래 포기' 정서적 불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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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서(가명·12)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인슐린 펌프. 인슐린 펌프를 찬 뒤로 준서는 ‘주사 바늘의 공포’에서 해방됐다. /김은희씨 제공

다음은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 이정민(가명·20대초반)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 '시간 빈곤'

"엄마, 나 몸이 이상한 거 같아."

2021년, 초등학교 3학년인 준서(가명)의 몸무게가 불과 일주일 사이 10kg이나 빠졌다.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아이가 쓰러졌다. 의사는 준서에게 '1형 당뇨'를 진단했다.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는 희귀 난치성 질환, 평생 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병. 내가 흔들리면 준서의 삶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불행이 내 아들의, 우리 가족의 일상을 무너뜨리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들과 나, 그리고 친정엄마의 시선이 나란히 한 곳에 꽂혔다. 노트북에 펼쳐진 혈당 차트 속 그래프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5분 마다 업데이트되는 차트를 보며 머릿속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엄마, 여기 잘 봐. 이럴 때는 오렌지 주스야. 내가 카톡으로 '주입' 이렇게 보내면 여기까지 한 칸만 먹이는 거야. 준서도 똑바로 잘 들어. 할머니도 없고 엄마랑 아빠 회사에 가 있을 때 학교에서는 준서가 혼자서 해내야 해."

회사 연구실에서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5분에 한 번씩 차트를 보며 준서의 혈당을 체크한다. 외출할 때면 풀충전된 배터리, aa 건전지 여유분, 트레시바, 글루카곤, 알코올 스왑 등을 챙긴다.

24시간 머릿속에서는 계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그래도 남들처럼 직장을 그만두고 준서 옆에서 밀착 케어할 필요가 없다는 데 감사했다. 15분 거리에 살면서 손자를 돌보러 기꺼이 달려와 주는 친정엄마에게. 그리고 무수한 지식과 경제력 따위의 내게 주어진 조건들에 감사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흘러가야 하는 삶에 안심이 되다가도 왠지 모를 서글픔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난다. 간병을 하다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 고군분투해도 간병과 일상 사이에서 무게 추가 간병으로 쏠리는 사람들이 있음을 분명 알고 있다. 가족을 간병하는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거라며, 나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며 긍정해보지만 정체 모를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김은희씨 사례를 통해 '가족 간병 vs 일상'이 아닌, '가족 간병―일상'이라는 명제를 성립하게 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확인했다. 영어로 된 해외 의료사이트를 해석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정보 우위력', 언제든 준서에게 달려가 줄 친정어머니가 있는 '돌봄 인력', 가감 없이 의료비를 지출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 김씨 가족이 가족 간병을 하면서도 보통 가정처럼 외형적인 완벽함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특히 경제적인 여유와 돌봄 인력은 가족 간병을 위한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지난해 7월 한국리서치가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간병이 필요한 시대에 사는 우리 - 간병에 대한 인식 조사'를 보면 응답자 중 95%가 경제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긍정하면서도 현재 준비가 돼있냐는 물음엔 73%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돌봄인력 역시 63%가 본인 혹은 가족이 간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정보도 없고, 돌봄인력도 마땅치 않은데, 경제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가족 중 누군가 아프다면 아마도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비교적 환경이 좋은 편에 속하는 김씨의 일상에 적용해봐도 동일한 결과다. 만약 친정어머니라는 '돌봄 인력'이 없다면 남편과 김씨 중 한 명은 직장을 그만두고 준서를 옆에서 돌봐야 한다. 둘 중 하나가 일을 그만둔다면 '경제적 여유'가 사라지고 의료비에 쏟을 비용도 자연스레 줄어든다.

한치라도 어긋났을 때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김씨도 늘 대비하며 오차 없이 살고 있지만, 그 역시 피할 수 없는 게 '시간빈곤' 문제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김씨 역시 커리어를 유지하는 정도의 일상을 지키는 것 외엔 모든 일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경기도 가족 돌봄 문제를 연구한 김정훈 경기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개인이 좋은 삶과 자기 행복권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데 자기 행복권을 추구한다는 건 시공간이 같이 주어져야 한다. 시간 빈곤은 결국 '시간 결핍'을 뜻하는데, 가족 간병을 하는 동안 그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며 "가족 간병 즉, 돌봄 이외의 시간에 대해 자기가 계획을 할 수 있고 오히려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고 설명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묻는다. 1형 당뇨를 앓는 아들 준서를 돌보고 있는 김은희씨의 일상은 정말 무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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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경기도 내 한 카페에서 이정민(가명·20대초반)씨를 만났다. 아픈 엄마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정민씨는 8살 때부터 엄마의 간병인이 되었다.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 '간병 약자'

엄마가 쓰러졌다.

초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내가 8살 때 갑자기 들이닥친 일이다. 엄마는 몸속에 염증이 쌓이는 유전병이 있었다. 심장 판막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엄마와 나, 단둘인데…. 고작 8살인 나는 그날 이후 엄마의 '보호자'가 됐다. 병실에서 엄마의 대소변을 받고, 땡땡 부은 팔다리를 주무르고, 밥을 챙겼다. 엄마를 휠체어에 앉히는 것 같이 힘쓰는 일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일을 했다.

친척들은 병문안 올 때마다 엄마를 간병하는 나를 대견하게 여겼다. "고생한다. 너무 착하다. 요즘 세상에 너 같은 딸 없다…." 그러면서도 항상 마지막엔 "너가 엄마 옆에 있어야 한다"고 당연한 듯 당부했다. 간병하는 고통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혹시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간간이 찾아오는 병문안도 오지 않을까 겁났다. 친구들에겐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정민'이길 바랐다. 엄마를 간병하는 불쌍한 아이가 돼버릴까, 그 시선이 무서웠다.

나는 공부가 좋았다. 공부하는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그 시간을 제외하면 엄마와 나는 하나였다. 투병 중인 엄마는 부정적인 말과 마음을 나에게 쏟아냈다. 몸이 아픈 엄마의 힘든 마음은 나의 일상을 지배했다.

나는 '간이식 수술'을 선택했다. 다행히 엄마에게 나의 간 일부를 떼 줄 수 있었다. 만 16세부터 가능한 이 수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가장 치료효과가 큰 방법이기도 했지만 끝이 없는 간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 간이식 수술 후 엄마는 일상생활이 가능할 만큼 호전됐다. "엄마, 나 노래하고 싶어." 이 한마디를 꺼내는 동시에 그간 간신히 막아왔던 마음의 둑도 와르르 무너졌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한 마음이 밀려왔는데, 병원에 가니 '우울'이라고 했다. 엄마의 인생을 살아온 시간이 원망되면서도 내 인생을 선택하려는 이 순간, 또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정민씨와 같이 최근 사회적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가족돌봄청소년·청년 이른바 '영 케어러'의 상당수가 '간병 약자'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4월 조사한 '2022년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를 보면 영 케어러의 주당 평균 돌봄 시간은 21.6시간으로, 이씨처럼 홀로 환자를 돌봐야 하는 주돌봄자 영 케어러의 경우엔 '32.8시간'으로 집계됐다. 대부분의 영 케어러들은 일주일 중 하루 가까이를 가족 간병에 소모하는 셈이다.

과중한 간병으로 삶의 질 역시 매우 낮은 수준이다. 영 케어러들에게 삶의 만족도를 물어보자 22.2%가 본인의 삶에 불만족한다고 응답했는데 일반 청년(10.0%)의 2배 이상 수준이다. 이씨처럼 주돌봄자인 경우 일반 청년의 3배 이상(32.9%) 불만족한다고 나타났다.

특히 영 케어러의 우울감 유병률(61.5%)은 일반 청년(8.5%)의 7배 이상, 주돌봄자(70.9%)는 일반 청년의 8배 이상을 기록했다. 미래계획을 세우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응답한 영 케어러는 36.7%, 주돌봄자는 46.8%였다.

가족 간병은 영 케어러의 정서적인 불안을 고조시키기도 한다. 언제 간병이 끝날 지 기약이 없고, 간병을 한다고 가족의 건강이 나아진다는 확신도 없기 때문에 영 케어러들은 무력감과 죄책감에 빠지기 십상이다.

김정훈 경제연구실장은 "청소년·청년기에 사회 진출이라는 큰 허들이 있고 자기 자신을 다 갈아넣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 자신한테 온전하게 다 갈아넣어도 모자랄 판에 내 시간을 할애할 다른 대상이 있다는 것은 미래의 공백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간병을 선택할 자유조차 없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며 이런 구조 자체가 "사실상 굉장히 폭력적"이라고 꼬집었다.
가족간병
기사 전문 온라인

가족간병 현실에 놓인 청년이 '미래'를 포기하고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사회가 과연 건강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인터뷰 끝에 이씨에게 물었다. 만약에 '간병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잠시 머뭇대다 말했다. "선택할 수 있었다면, 저는 선택했을 것 같아요."

/공지영·유혜연·한규준기자 jyg@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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