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피고 새 우는 춘삼월이라 하나 시절이 이토록 어수선하니 올해는 꽃놀이 한번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더구나 멀리 길게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처지라 며칠 전에 과천 입구 우면산 자락에 자리잡은 선바위 미술관을 찾았다. 민속화가로 불리는 이서지 화백이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사립미술관이다.
미술관에 들어서니 '아스라이 멀어진 망각의 세월, 정겨웠던 그 시절은 우리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이라고 해설을 붙인 그림이 내방객을 맞는다. 이 그림은 가로 235㎝, 세로 65㎝의 긴 화폭에 여름내 땀 흘려 일한 농민들이 추수 뒤에 벌인 한바탕 놀이판을 묘사하였다. 또한 '장날'이라고 제목 붙인 가로 700, 세로 68㎝의 작품은 시끌벅적한 어느 시골 장터를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어물전에서부터 옹기전, 포목전 등 없는 것이 없는 장터에 호리병을 들고 접객하는 쇠전머리 선술집까지 그려져 있다.
이 그림들을 그린 올해 일흔일곱의 이 화백과 차 한잔 나누면서 요즘 그리는 풍속화를 좀 보고 싶어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백발의 동안이 홍조를 띠며 요새 누가 세시풍속화를 찾느냐면서 추상적인 수묵의 선형 작업을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오늘의 민속박물관을 있게 한 장본인이신 예용해 선생이 머리글을 쓰고 작품 134점이 실린 1993년판 화집을 건네며 '농가월령가'를 읽으면서 화집 속의 그림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세시풍속화 이야기는 그렇게 끝낼 수밖에 없었다.
수원의 이영미술관에 돌아와 '농가월령가'를 찾아 읽어보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둘째아들인 정학유가 농사일과 세시풍속을 12달로 나누어 쓴 월령체(달거리)의 가사 문학인데 운율을 넣어 읽으니 파릇파릇 돋아나는 들꽃들의 자태도 더 어여쁘고 새소리도 더 정겹게 들린다.
침울한 시절도 잊을 겸 봄철과 초여름을 노래한 '농가월령가'의 '3월령'과 '4월령'의 머리 부분을 포함한 한 부분을 함께 읽으며 잠깐 쉬어보자.
삼월은 늦봄이니 청명곡우 절기로다.
봄날이 따뜻해져 만물이 생동하니 온갖 꽃 피어나고 새소리 갖가지라
대청 앞 쌍 제비는 옛집을 찾아오고
꽃밭의 범나비는 분주히 날고 기니 벌레도 때를 만나 즐거워함이 사랑홉다
농부의 힘드는 일 가래질 첫째로다
점심밥 잘 차려 때 맞추어 배불리소 일꾼의 처자권속 따라와 같이 먹세
농촌의 두터운 인심 곡식을 아낄소냐
물꼬를 깊이 치고 도랑 밟아 물을 막아 모판하고 백곡중 논농사가 제일이라
들 농사하는 틈에 채소농사 아니할까
울밑에 호박이요 처마가에 박심고 돌담 근처 동과심어 막대 세워 올려보세
무배추 아욱 상치 고추 가지 파 마늘을 하나 하나 나누어서 빈땅 없이 심어놓고
오이밭은 따로하여 거름을 많이 하소
사월이라 초여름이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온 끝에 볕이나니 날씨도 좋구나
떡갈잎 퍼질때에 뻐꾹새 자주울고
보리이삭 패어나니 꾀꼬리 소리한다화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 바쁘구나
남녀노소 일이 바빠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 사립에 녹음에 닫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