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업적 호기심으로 재판과정을 그려보면서 영화를 관람하였다. 피고인은 교수재임용 탈락 소송의 재판장에게 석궁을 쏜 혐의로 법정에 섰고, 그 변호인으로는 이른바 노동사건 변호사로서 좌절을 겪고 술에 빠져 사는 털털한 변호사가 등장하며, 권위적이고 냉소적 표정의 재판장, 그리고 젊고 얼굴 잘생기고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표정의 공판검사가 주역으로 나온다. 배우 안성기가 피고인 역을 맡고, 문성근이 항소심 재판장 역을 맡고 있다. 안성기가 누구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커피광고에 등장하여 커피 향기를 풍기며 여심을 사로잡고 수많은 영화를 통해 이른바 국민배우라는 호칭을 들은 배우이다. 문성근은 냉소적인 태도로 재판장 역할을 얄밉게도 잘 소화하였다. 배역의 성격과 배우가 잘 어우러지면서 영화는 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이미 관객을 피고인의 편으로 만들어 버리고 사법부는 진실에 눈감는 독선적 고집쟁이로 오도되었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상태이지만, 석궁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대중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영화가 꼭 실체적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나는 사법부의 판결을 신뢰하지만, 석궁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논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혹자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감독이나 영화 속의 인물들이 주장하다시피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성격상 지켜야 할 내재적 한계가 있다고 본다. 예술적 재창조의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실체를 오도하거나 오도할 위험이 있는지에 대하여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관객과 사회에 대한 예의 또는 책임이라고 본다. 이는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는 별개의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 영화는 말미에서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자막으로 짤막하게 처리한다. 그러나 영상과 글은 그 의미 전달의 강도에 비추어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주의를 소홀히 하였고, 그 이유가 영화라는 상품 마케팅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의도된 오도라는 오해를 사게 생겼다.
주인공인 피고인은 재판과정을 가리켜 '재판이 아닌 개판'이라고 소리친다. 영화는 이 한마디로 우리 국민과 사법부를 이간질시켰다. 예술적 표현의 자유라는 것도 더 자유로운 내일을 꿈꾸는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에 기초가 있는 것이다. 대중에게 재판이 개판인 사회에 살고 있다고 오도하고, 재판을 비하하는 것은 영화라고 해도 다소 경망스럽고 무책임하다. 물론 이만큼 재판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재판에 대한 비판은 그 중요성에 비추어 가능한 한 절차에 따라야 하며 특히 상품화되어서는 곤란하다. 판결 결과가 마음에 들면 그 판사를 칭찬하고 추켜세우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석궁으로 위협하거나 재판정에서 계란을 투척하거나 집 앞으로 몰려가서 시위를 벌인다면 판사들이 양심에 따라 올바른 판결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약속인 헌법을 부정하는 행동이다. 한자리 술안주처럼 가벼운 태도로 재판을 비하해서는 곤란하다. 그러기에는 우리 공동체에서 사법부가 수행하고 있는 역할이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