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표가 돼가고 있는 병든사회는
점점 다른 문의 상상을 잃어가고
아이들은 학원·해병대 캠프로
내몰려 결국 놀이와 흥의 자리는
노동과 극기훈련이 차지한다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왔다. 고백하자면 나는 '지리멸렬'(1994) 시절부터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다. 당시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내게 우리 사회의 위선을 폭로하는 젊은 감독의 단편영화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침 운동 길에 번번이 남의 집 우유를 훔쳐 먹던 모 신문사 논설위원과 만취해서 온갖 추태를 벌이는 검사, 연구실에서 도색잡지를 즐겨보며 강의실에서는 근엄함을 가장하는 위선적인 교수는 마지막 장면에서 텔레비전에 출연해 사회 윤리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이들의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아파트 경비원의 모습을 통해 재주 많은 젊은 감독은 위선의 세상을 향해 한 방을 먹인다. '플란다스의 개'를 보고 나서는 봉 감독의 독특한 유머 코드와 배두나, 이성재, 변희봉, 김호정으로 이어지는 배우들의 면면이 좋아서 단박에 봉 감독의 팬이 되어 버렸다. 비록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그리고 말이 필요 없는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봉준호 감독은 날개를 활짝 편다. 앞서 두 편의 영화에서도 쫓고 쫓기는 장면에서 긴박감을 자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줬던 그는 '살인의 추억'에서는 긴박한 추격 장면에 미제로 끝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스토리를 입히고 그 미제 사건을 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적절히 해석해 냄으로써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 이후 '괴물'과 '마더' 역시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믿고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설국열차'의 개봉을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하지 않으려 애쓴 것은 아마도 나만은 아닐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라서 기대하면서도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 부은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점에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영화는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하고자 한 이야기와 그가 바라보는 세계에 기본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에 '설국열차'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기다리는 팬으로 남아 있게 될 것 같다.

영화 이야기를 자세히 하는 것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므로 자제하고, 인상 깊었던 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알려진 대로 '설국열차'는 지구가 꽁꽁 얼어붙은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간신히 살아남아 설국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열차 안 세계 역시 평등하지는 않다. 열차의 꼬리 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 없다. 꼬리 칸의 사람들이 엔진이 있는 맨 앞 칸으로 전진해 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는 각종 상징과 알레고리가 가득하다.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보고 나서도 결국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지구 멸망에 직면한 미래 시간과 설국열차라는 특정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사회를 영화는 끊임없이 환기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매번 문을 부수며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하는 꼬리 칸의 지도자 커티스에게 열차 설계자 남궁민수가 다른 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봉 감독은 설국열차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열차 밖으로 나가는 것임을 남궁민수의 입을 빌려 역설한다. 자,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우리 앞에도 두 개의 문이 있다. 눈앞에 보이는 목표를 향해 열려 있거나 완강히 닫혀 있지만 문이 거기 있음을 모두가 아는 문과 문이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된, 그래서 이미 벽이 되어 버린 문. 둘 중 어떤 문을 여는 선택을 감행하겠는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다. 다만 이미 나 있는 길로 나아갈 것이냐, 아무도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길로 나아갈 것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일찍이 강연호 시인은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혜안을 보여준 바 있다. "나를 빛나게"할 "잘못 든 길"('비단길 2')을 우리는 영영 놓쳐 버린 것일까?
'피로사회'로 진단받은 우리 사회는 점점 다른 문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가고 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목표가 되어 가고 있는 병든 사회는 우리 아이들을 학원으로, 해병대 캠프로, "이력서 한 줄처럼/각자의 땅만 내려다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국토대장정"(박강, '너와 나의 국토대장정')으로 내몰고 있다. 놀이와 흥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노동과 극기 훈련이다. 그야말로 '너와 나의 국토대장정', 온 국민의 국토대장정이 아닐 수 없다. 자양강장제의 힘을 빌려 죽음의 길로 우리 스스로를 내모는 이 사회의 미친 속도를 멈출 다른 문을 상상해 본다.
/이경수 중앙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