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인천 부평의 일제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한 젊은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23일 부평역사박물관이 주최한 '삼릉, 멈춰버린 시간' 특별기획전 개관식을 찾은 독립유공자 고(故)이연형 씨의 아들 이중성(60)씨는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미쓰비시로 넘어가기 이전 히로나카상공 부평공장에서 일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건넸다"며 "그러나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별일 아니다'고 할 정도로 말씀을 아끼셨다"고 말했다.

1921년생인 이연형 씨는 1939~1941년까지 히로나카상공 부평공장에서 일하면서 정재철 씨와 함께 조선독립당에 가입했다. 당시 이들은 적은 월급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책에 전달하는 활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씨는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달리 차별대우를 받으며 적은 월급을 받았다"며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다른 조선인들을 설득해 한 푼 한 푼 함께 모았다"고 전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성냥갑에 돈을 넣어둔 후 공장 밖에서 대기 중인 구두닦이나 엿장수가 '담뱃불 좀 주소'라는 말을 하면 돈이 든 성냥갑을 건넸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의 생활은 궁핍했다. 조선인들은 일본 관리인들의 지시를 받아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10시간씩 일했다.

도시락을 싸오기도 했지만, 김치와 젓갈 정도밖에 먹지 못할 정도로 열악했고 배급하던 시기에는 먹을 것이 없어 산이나 밭에서 먹을 것을 따 먹기도 했다. 그나마도 공출 때문에 쌀이 없어 '야매 쌀'이라고 불리는 쌀을 먹으며 연명했다.

당시 미쓰비시제강 부평공장에서 근무했던 송백진(94) 옹은 "배급이 너무 적어 역 인근에서 공출하는 쌀을 빼돌려 암매장에 나돌면 몰래 사서 먹었다"며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 심해 심지어 목욕탕도 구분했었는데 처우는 오죽했겠느냐"고 말했다.

송 할아버지는 "당시 공장 내에선 독립운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돌았지만 서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며 "알려지면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당시를 증언했다. 그는 "우리는 그런 전범기업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는 물론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한편 부평역사박물관은 올해 1~10월까지 미쓰비시제강 부평공장에서 근무했던 사람에 대한 구술 인터뷰 등 삼릉지역 학술연구를 진행해 '미쓰비시를 품은 여백, 사택마을 부평삼릉'이라는 학술조서를 냈으며, 내년 2월까지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부평역사박물관 김정아 학예사는 "우리나라에 유관순·안중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하나둘씩 힘을 모았던 당시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꼭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