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6)]선교와 음악(上)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진 않았지만… 그들의 서양식 노래는 이제 모두가 부른다

김영준 기자

발행일 2018-11-09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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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⑥ 근대 문물 유입 (下)
1901년께 초창기 내리교회 모습. 1892년부터 1903년까지 내리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존스(G.H.Jones) 목사는 영화보통학교와 영화여자학교를 세우는 등 인천에 근대식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오른쪽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 /내리교회 제공

1885년 아펜젤러, 인천에 내리교회 세워
"초기 양악 개신교 선교와 때를 같이 해"
오늘날 찬송가 통한 전파 통설로 굳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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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영화초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가 지난 1일 저녁 인천 남동소래아트홀 대공연장에서 창단 연주회를 했다.

명칭(윈드)에서 알 수 있듯이 관악 주자 30여명으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는 2017년 11월 설립 이후 올해 학교 졸업식과 입학식을 시작으로 5월 동구청 주최 어린이날 기념행사 축하 공연을 비롯해 내리교회 행사 등에서 연주회를 했다.

지난 8월에 열린 제16회 춘천관악경연대회에선 은상을 획득했다.

지난 1일 연주회는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내걸고 연 첫 번째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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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윈드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에서 영화 엘피스 합창단과 합동 공연 모습. /영화초교 제공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창단 연주회에는 역시 영화초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엘피스(헬라어로 소망을 의미) 합창단이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영화 엘피스 합창단은 지난해 열린 제2회 인천시 어린이 합창대회에서 우수상을, 올해 인천 소방동요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꾸미는 제임스 스웨어린젠의 '아이거(Eiger)'와 골드먼의 '치리오 행진곡'으로 시작한 연주회는 금관5중주 무대와 영화 엘피스 합창단의 공연, 졸업생 임재인의 가야금 독주로 이어졌다.

후반부는 쇼스타코비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와 영화 '미션' OST 중 '가브리엘의 오보에', 김광진의 '마법의 성', 최완규 편곡의 '코리안 사운드 셀렉션'까지 연주를 마무리하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앙코르곡으로 '마징가 Z 주제곡'을 연주하며 더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영화초교는 1892년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이다.

126년 전통의 영화초교 학생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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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윈드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에서 영화 엘피스 합창단과 합동 공연 모습. /영화초교 제공

100년 앞서 천주교 박해때 '순교자들 성가'
"군악대 창설후 양악 퍼져" 능동적 시각도
일제의 국악 탄압… 감수성 변화 앞당겨


"서양음악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까"의 물음에는 3가지 정도의 답변이 존재한다.

그중 개신교의 찬송가 전파로부터 한국의 양악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설은 비교적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유선은 1985년에 쓴 '한국 양악 100년사'에서 "우리나라 초기 형태의 서양음악(찬송가 등)은 개신교의 선교와 거의 때를 같이 했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 서양음악의 시작은 개신교의 선교를 기점으로 보는 1880년대 초부터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제물포) 해변에 배 한 척이 닿는다.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우리나라 선교를 위해 파견된 것이다.

인천학연구소에서 발간한 '간추린 인천사'(1999년)에는 당시 인천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뱃머리에서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 부활하시던 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시어/ 이 백성을 속박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사/ 빛과 자유를 주옵소서"라며 기도했다고 적었다.

당시 국내는 갑신정변으로 인한 어수선한 시국이어서 외국인 부녀자의 입경(入京)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언더우드만 서울로 향하고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해 6월 21일 다시 인천에 온 아펜젤러는 한 달 정도 머무르며 예배를 보았는데, 이때 국내 첫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세워진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선교사의 입국을 시작점으로 본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 만주에서 세례 받은 교인들이 있기는 했으나, 시기적으로 크게 앞선 것도 아니었고 수적으로도 약소했다고 우리 교회사와 근대음악사 연구서들은 전한다.

1911년 평양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이유선은 미국 유학 후 귀국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2005년 타계 때까지 '한국 양악 100년사'를 비롯해 서양(기독교)음악 관련 연구와 저서를 다수 남겼다.

이유선은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등이 인천에 온 1885년을 기점으로써 100년 후인 1985년에 '한국 양악 100년사'를 출간했다. 개신교의 시작을 기점으로 한 '한국 양악 100년설'이 통설로 굳혀지는 순간이다.


천주교의 전례를 시점으로 보게 되면 그보다 100년이 늘어난다. 천주교에 관심을 가진 조선 사람들은 베이징에서 유입된 서적을 통해 복음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후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면서 최초의 교회와 함께 조선교구가 설립됐다. 자생적인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가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 앵베르 주교와 샤스탱 신부의 입국 등 프랑스 성직자에 의해 탄압 속에서도 교세를 키워나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외국인 신부였던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압송될 때 성가와 성영(聖詠)을 부른 기록도 있다.

이때의 성가는 당시 프랑스 신부였던 이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교육받았기 때문에 찬송가와 시편(Psalm)의 낭독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서양 선교사에 의한 수동적 전래가 아닌 한국인 스스로 행한 능동적 측면을 부각해 바라본 견해는 국악학자 장사훈(1916~1991)에 의해 제기됐다.

그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찬송가와 창가를 가르쳤으나 당시의 사회실정은 지금과 달리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인식을 얻지 못했다"면서 "1900년대 우리 군악대 창설로 말미암아 비로소 한국에 양악이 들어와 퍼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한국음악학 1세대 중 한 명인 송방송(76)도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의 도착 이후 우리 땅에 양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더한다.

1910년 8월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했다. 여기에 더해 서구의 찬송가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악적 감수성을 크게 바꿔놓는다.

우리 음악을 듣고 즐기던 감수성이 서양식 노래를 듣고 즐기는 감수성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해방 이후 미군 주둔과 우리나라의 선진화 추구도 결국 서양에서 관습화된 음악이 이 땅에서 위세를 떨치는 데 이바지했다.

인천문화재단 CI
서양음악이 본래 음악이며, 우리 고유의 전통 음악은 국악이라는 통념으로 자리하게 된다.

오늘의 음악 상황에 대한 주체(반성)적 인식은 '우리 음악의 비전'이다.

'서양 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서양음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은 큰 울림을 준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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