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2)전쟁의 중심에 선 격전지들]역사를 바꾼 전투, 주무대는 '경기·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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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은 25일 오후 오산시 죽미령평화공원에 유엔군초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4일 북한군이 수원을 점령하자,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에 배치되어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죽미령 전투는 미군을 필두로 한 유엔군이 북한군을 가장 처음 마주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 했지만, 이를 계기로 세계 우방국들의 유엔군 참전이 줄을 잇게 되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북한군 남진 10여일 늦춘 '죽미령'
'원통이 고개전투' 서울 수복 초석
군포 '용문산 대첩'등 전세 큰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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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시작된 전쟁 초기부터 경기·인천 지역은 주요 접전지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서울과 수원이 연이어 함락된 이후에도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중공군 개입에 따른 1·4 후퇴(1951년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철수한 사건) 당시와 재반격, 고지전, 휴전 협정까지 경인 지역은 한국 전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50년 7월 4일 북한군이 수원을 점령할 당시,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경부 국도 죽미령(현재의 오산)에 배치됐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속전속결로 부산까지 진격하려는 북한군과 5일 죽미령에서 만났다.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스미스 부대는 박격포와 기관포로 맞섰고 결국 개전한 지 6시간 15분 만에 퇴각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죽미령 전투는 미군을 필두로 한 유엔군이 처음으로 북한군의 전력을 가늠해 볼 수 있었던 전투로, 북한군의 남진을 10여 일간 늦출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는다. 서울 탈환을 위한 진격에 나선 미 해병 제1사단은 서울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었던 부평 공략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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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은 25일 오후 오산시 유엔군초전기념관에서 관계자가 죽미령전투와 관련된 전시시설을 점검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4일 북한군이 수원을 점령하자,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에 배치되어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죽미령 전투는 미군을 필두로 한 유엔군이 가장 처음 북한군을 마주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 했지만, 이를 계기로 세계 우방국들의 유엔군 참전이 줄을 잇게 되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17일 북한군 전차 6대와 250명 규모의 보병 부대가 원통이 고개(인천 지하철 동수역과 부평삼거리역 일대)로 진입하자 반격에 나선 미 해병대와 국군은 전차 6대를 모두 파괴하고 보병 2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원통이 고개 전투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수복 작전의 디딤돌이 됐다.

서울 수복 뒤 북진을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위기를 맞는다.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뺏기고 7일에는 수원도 점령당했다. 이때 경기도 각 주요 지역에서의 승전보는 중공군을 북으로 몰아내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대표적인 전투가 군포 모락산과 용문산 전투다.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군포 모락산에서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국군의 모락산 점령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1번 국도와 47번 국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서울 재수복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1951년 5월 18일 중부 전선의 요충지인 용문산에서 방어하고 있던 국군 6사단을 공격했다.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은 5일 동안 공세를 펼쳤지만 용문산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 전투는 '용문산 대첩'으로도 불리는데 당시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으로 보고된 반면 중공군은 1만7천177명이 전사하고 2천318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중공군은 대공세를 멈추고 휴전 협상에 나서게 하는 계기를 만든다.

/이현준·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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