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춘문예

[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고은경 '숨비들다' ①

입력 2023-01-01 19:23 수정 2023-01-01 19:25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1-02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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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소라들이 알을 낳는 동안에도 엄마는 쉬지 않았다. 6월에서 8월은 소라 산란기이자 해녀들의 금채기였다. 한쪽의 숨이 트이기 위해 다른 한쪽은 숨을 돌려야 했다. 숨 돌릴 시간이 주어지면 엄마는 밭일에 매달렸다. 다시 물질하러 다닐 때 먹기 좋을 소라젓과 마늘지도 담갔다. 때로는 서해 쪽으로 해삼 채취에 나섰다. 어떻게든 물질을 이어가야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기에 부득부득 자리를 얻고자 했지만 실력 좋은 상군 삼촌들에게 밀릴 때가 많았다.

소싯적엔 상군 중의 상군이었다는 엄마가 수심 10미터의 중군 영역으로 밀려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눈썰미 좋고 손이 빨라 상군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리곤 했으나 깊은 바다에 부려온 기억들을 떨쳐내진 못하는 듯했다.

엄마는 방학을 맞아 내려온 나보다 바다를 더 무시로 건너다 보았다. 돌담 너머로 눈길을 던지며 바람이 자다는 둥 물때가 됐다는 둥 불쑥 말을 꺼내곤 했다. 엄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움직이는 바다가 보였다. 들뜨는 듯 부푸는 듯 잔물결이 굼실거렸다. 어서 올라가 네 할 일 하라고 채근하는 누구처럼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들통의 물이 끓어올라 문어를 집어넣었다. 넘칠 듯 부르르 거품이 일었다. 뚜껑이 들썩거리는 통에 꼭지를 잡고 있어야 했다. 엄마의 기운을 북돋울 뭉게죽은 방학 때마다 내가 한 번씩 준비하는 보양식이었다. 불그레해진 문어를 찔러보는데 문기척이 났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두고 간 모양이었다. 이 큰 게 뭐냐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털며 부엌 밖으로 나가자 엄마 허리까지 오는 상자가 보였다.



"이게 무싱거냐? 느가 산 거가?"

"내가 주문했어. 제습기라고, 습기 빨아들여서 건조하게 해주는 기계야. 서울에선 많이들 써. 여기도 너무 습하니까 한 대쯤 둬야 해."

"느 모르커냐? 어멍은 물에 들어강 이실 적이 반이여. 쓸데어신 짓을 해신게. 축축한 거는 무신 축축한 거. 사방이 물이고 습긴데 이걸 어떵허코. 물렁(무르면) 안 되는 거?"

용돈을 건네면 바닥에 패대기치는 엄마라서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고른 건데 역시나 순순히 받으려 하지 않았다. 무르긴 왜 무르냐고, 보송보송해져서 좋다고, 물통 차는 거 보면 깜짝 놀랄 거라고 되받아쳤다. 엄마는 엄마대로 이런 덩치 없이 잘 살아왔건만 좁은 집에 꼭 들여야 하냐며 성화였다. 학교 선생 봉급 가졍(가지고) 쓸데어신 걸. 부엌으로 돌아서는데 엄마의 눅진한 말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오늘 오후 …경 제주시에 여행 온 …살 …씨 모녀가 실종됐습니다. 텔레비전 뉴스 한 도막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달군 냄비에 문어를 넣자 촤아아 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뜨거운 기름이 튀었다. 수도꼭지 찬물에 팔뚝을 들이밀었다. 휘이, 휘이이. 물소리 사이로 숨비소리가 섞여들었다. 물 밖으로 올라온 언니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맴돈 지 오래였다. 고향 집에 머물 때면 더 자주 들렸다. 이젠 언니가 말 걸어오는 것 같아 아무 때고 들려도 거리낌 없을 정도였다.

냄비 속이 복작복작했다. 다시 주걱을 잡고 문어를 뒤적거렸다. 언니도 먹고 싶은가 보네 하고 되뇌었다. 어렸을 때 내가 빨판을 흘기며 질색하면 이 맛있는 걸 못 먹는다고 핀잔주던 언니였다. 물속에서 흡착력 강한 뭉게 다리에 콧구멍이 막힐 뻔했으면서도 케이크 같다고, 아니 훨씬 맛나다고 칭송을 했다.

찬은 엄마가 담근 마늘지였다. 죽 한 숟갈을 뜨자 바닷물을 뜬 듯 비린내가 끼쳤다. 아무래도 문어를 잘못 삶은 탓이었다. 엄마는 별말 없이 후루룩 소리를 내며 숟갈질을 계속했다. 언니의 숨비소리와 엄마의 죽 먹는 소리가 번갈아 여울졌다.

"먹고 나갔다 올게. 대학 선배가 일이 있어서 왔는데 비자림 가보고 싶다네. 구경 좀 시켜주려고."

"소나이(남자)야?"

엄마가 마늘을 써걱 씹었다.

"응, 남자 선배. 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어. 제주도는 세 번짼데 아직도 비자림을 못 가봤대."

"고향이 어디랜햄시니?"

"서울인가, 수원인가."

"도시 사람달믄게(도시 사람인가 보네). 경허믄(그럼) 됐져."

엄마는 섬사람은 안 된다고 누누이 말하곤 했다. 딸이 지난한 섬 생활에서 벗어나길 바란 까닭도 있지만 외항선을 탄 남편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엄마 못잖게 물을 밝혔던 아버지는 엄마가 잡은 해산물을 운반하거나 중국 어선이 못 들어오게 감시하는 일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 번 나가면 두어 달 있어야 집에 들르더니 내가 태어난 뒤에는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언니의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던 사람이었다.

아버지한테서 풍기던 짠내, 아버지가 손에 쥐여 주던 일제 카라멜, 아버지가 들려주던 바람의 고마움과 매서움을 언니는 지나가듯 풀어놓았다. 엄마의 억센 욕보다 그런 이야기가 와닿던 시절이었다. 아방은 무능하고 쩨쩨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비밀 아닌 비밀을 바닷바람 사이로 날려 보냈다.

혼자 아이들을 키운 엄마 곁을 지킨 건 무엇이었을까. 언니마저 잃고 나서야 오롯이 깨우쳐졌다. 아버지 없이 일궈온 엄마의 바당밭에 대해서. 엄마는 살기 위해 숨을 참았다. 죽자고 하는 일인지 살자고 하는 일인지 헷갈릴 때 더 힘껏 자맥질을 했다. 누구는 서방과 싸우고 물속에서 운다는데, 서방 머리 같은 전복에 빗창을 찔러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질을 마친 뒤 천 근 같은 해산물 망사리를 끌고 돌길을 걸을 때에야 죽어 나자빠질 것 같았다. 망사리 들어주는 서방을 둔 동료들이 부러워서, 그 부러움이 기막히고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딸들만은 못 하게 하리라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물질을 배우겠다고 나선 언니를 막을 순 없었다. 내가 갯바위에 걸터앉아 엄마를 기다릴 때 언니는 고무옷도 없이 엄마 뒤를 따랐다. 공부보다 그 일이 좋다고 했다. 기특하게 여긴 해녀 삼촌들이 고무옷과 테왁을 선물하자 언니는 웃었고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면 움직이는 바다가 보였다… 들뜨는 듯 부푸는 듯 잔물결이 굼실
휘이, 휘이이, 물소리 사이로 숨비소리가 섞여들었다
무엇이 언니를 욕심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영영 모를 일


엄마와 언니가 물에 들어가면 나도 숨을 멈추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볼 작정이었다. 내 얼굴이 벌게지는 동안 바다는 별의별 빛깔의 자태로 갯가를 보아 넘겼다. 검다가도 푸른, 잿빛이다 은빛이 되는, 누렇다가도 금실처럼 너울거리는 바다가 이물스러웠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숨을 토하면 둘은 아직도 물속이었다. 붉은 깃발이 꽂힌 엄마의 테왁과 큼직한 꽃이 수놓인 언니의 테왁이 물결에 넘놀았다.

엄마가 올라온 지 한참이 지나도록 언니가 감감하던 날이었다. 바다는 잔잔하고 바람은 온화하기만 했다. 숨 참기도 하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대는데 오늘 참 맨도롱하다(따스하다) 싶었다. 네 언니 못 봤냐고 엄마가 고함칠 때까지 그러고 앉아 있었다. 무엇이 언니를 욕심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영영 모를 일이었다. 엄마가 중군으로 밀려난 까닭만이 확연했다. 더 이상 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에도 엄마는 기어이 물질에 나섰다. 단단해지고 또 단단해지는 엄마를 지켜보는 게 꺼림칙했다. 껌으로 귀를 막고 허리엔 납덩이를 찬 어멍을 바다가 끝 모를 곳으로 데려갈 것 같았다.

죽 좀 더 자시란 말에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문어가 바다의 인삼 격인 전복을 먹는 놈이니 오죽 맛이 좋냐 하면서도 물질 전후 소식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많이 넘기지 않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양쪽 어깨를 번갈아 두들겼다. 물에 못 들어가서 안 아픈 데가 없다고 했다. 안마해 주려 손을 올리자 이내 간지럽다고 뿌리쳤다.

"나신디는(나한테는) 바당이 최고여."

입에 배어 굳은 말을 하며 엄마가 일어섰다.

"아멩(암만) 잘 아는 사람이라도 조심허여. 경헌(그런)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허는 법이여."

엄마에겐 부모도, 서방도 해주지 못한 걸 내주는 바다보다 간이나 보고 내빼기나 하는 사람들이 훨씬 께름칙한 존재였다.

엄마의 낡은 아반떼를 몰고 나섰다. 세화에 들를 생각이었다. 제주 바다는 넓고 사람마다 꼽는 해수욕장도 제각각이지만 내겐 세화리 바다가 각별했다. 울적하면 그려보는 곳, 실은 울고 앉아 있기 싫을 때 더 찾게 되는 곳이었다. 비자림과 멀지 않아 들렀다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조금 늦더라도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 실종 사건 이후 어수선해진 탓에 인사가 늦고 말았다. 라디오를 틀자 어김없이 그 뉴스가 흘러나왔다. 종적을 감췄던 여자아이가 해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귀를 곤두세우는데 은수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분위기 뒤숭숭하지? 인터넷에 아이 찾았다는 기사 떴더라."

"엄마는 아직 못 찾았나 봐. 아이랑 같이 바닷가로 갔다던데…."

어디냐고 물어보니 선배는 우리가 이미 아는 곳이라며 곧 비자림으로 건너갈 거라고 했다.

"저녁에 다금바리 먹으러 갈까? 진짜 제주산 쓰는 집으로."

특산물이긴 하지만 워낙 고가여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취직 턱을 내겠다는데 말문이 막혔다. 모교 교직원 채용에 합격한 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구는 모습이 순진하면서도 속없어 보였다. 학술 심포지엄 때문에 왔다면서 관광할 시간이 나는지도 의문이었다. 갈치 맛있는 집을 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차창을 조금 열었다. 휘이이, 휘이. 숨비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창틈을 넘나들었다. 밖으로 보이는 해면의 한 지점이 칼치 등처럼 번뜩였다. 소라 잡지 맙서예, 바당에 저축허게마씸. 어촌계에서 내건 플래카드가 방호벽 위에 나부꼈다. 꼭 화난 사람들처럼 '육짓것'이라고 내뱉는 삼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선배와 나는 역사교육과에서도 같은 학회였다. 술 마시며 난상토론할 일이 잦았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상생 같은 거시적인 화두부터 국사교과서의 표지 같은 지엽적인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티 없는 얼굴에 부드러운 말씨를 갖춘 선배는 보통 남자들이 지닌 괄괄한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 여성항일운동에 대해 말할 때도 누구보다 섬세한 입장이었다. 최초이고, 최대였어. 1차 시위 때 삼백 명, 2차 시위 때 천여 명이 호미 들고 빗창 세워 막아서니까 일본인 제주도사가 줄행랑을 쳤대. 그러고 나서 잡혀간 사람들은 몸이 비틀리는 고문을 당해야 했지만. 시위 전에 모여 섰던 해녀들의 뒷모습 사진을 봤었어. 등에 아이가 업혀 있고 양식 보따리가 걸려 있는데, 그건 어떤 투사의 앞모습보다 결기가 넘쳤어. 섬에서 초중고를 나온 내가 제주 해녀들의 투쟁을 알게 된 건 은수 선배 덕분이었다.

그가 일러준 자료들이 있었지만 바로 찾아보지 않았다. 과제 때문이든 학회 때문이든 향토사를 접할 때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여성운동이어서만이 아니었다. 섬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이곳 사람들은 허가 없이 육지로 드나들 수 없었고 육지 사람과 혼인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엄마가 육지 사람, 도시 사람을 만나라고 성화를 부릴 정도가 됐으나 그렇게 되기까지의 세월은 현무암 몰골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꺼멓게 굳어버린 난항의 궤적. 공부가 곧 그것을 헤집고 흉터마저 들추는 행위 같았다. 항파두리의 삼별초부터 이재수의 난을 거쳐 48년 4월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되짚고 있으면 직접 겪어오지 않았음에도 돌아가고 돌아가 검은 돌에 꼬라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2005년 제주는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나는 유의미하면서도 손쉬운 선포라고 느꼈다. '평화의 섬'은 너무 점잖은 말이었다. 바다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이국적인 풍경인 양 바라보기나 하는 사람들의 시선과도 닮아 있었다. 평화는 무슨 무슨 연구를 하고 센터를 세우고 포럼을 연다고 해서 사람들의 내면에 차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다친 곳이 돌에 눌리다시피 하며 장아찌처럼 절여지고 곰삭혀진 기억들이 있는데 바다가 가로막는 것인지, 바람이 발목 잡는 것인지 짱돌들은 걷히지 않고 있었다. 내가 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돌 치우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상식적인 사회를 위해, 균형 잡힌 안목을 길러내기 위해 적당히 알맞춤하게 안내하는 일로 여겨질 뿐이었다.

잘해야 하는데. 언니 만날 때 나 이만큼 살았어 할 정도로는 해봐야 하는데. 엄마는 내가 완전히 떠나길 바랐다. 담임이 권유한 대로 서울 소재 대학에 가라고, 서울에서 직장 잡고 나긋나긋한 서울 사람과 결혼해 살라고 했다. 여긴 들락날락 안 해도 되컨게. 명절이고 자시고 비행기 탕(타고) 오멍(오느라) 돈지랄 할 거 없다. 나 역시 기왕 가는 거 촌사람 태를 벗어던지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올 필요 없다는 말은 좀 서운했다. 여기 안 오면 어딜 가. 요즘 저가 항공도 많은데 뭘. 엄마는 테왁 천에 난 구멍을 기우느라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하루아침에 서울 사람 되커냐. 허기사 이 어멍 똘(딸)인디 무신건들 못 하겠냐만 여기서 놀멍 지낸 세월만큼 거기서 사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안으커냐. 이제 느 수발들기도 힘들고. 남은 인생 물질이나 허멍 살고 싶어.

세화 바다는 엄마의 태도만큼이나 무심하게 움직였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비구름과 맞닿은 수평선조차 스산했다. 가까운 세화오일장터의 휑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1931년 그곳에 해녀들이 운집했던 걸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해 장이 서던 날 해녀들은 사력을 다했었다. 근수 속이지 말라고, 조합비 매기지 말라고, 일본인 도사가 조합장까지 해먹지 말라고, 일본인 상인은 빠지라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 대응한다면 죽고 말 거라고 외쳤었다. 어릴 적 언니와 내가 엄마를 쫓아 구경 다니던 그 장터에서였다.

뭘 모르던 우리였다. 매일이 아니라 5일에 한 번이어서, 그나마도 엄마가 나서야 따라갈 수 있어서 설레기만 한 나들이였다. 장터에 이르자마자 몽생이(망아지)들처럼 뛰어다녔다. 청과전 앞에서 제일 빨간 사과 고르기 시합을 했다. 리어카에 쌓인 가요 테이프를 살피며 아는 가수 이름을 찾아내기도 했다. 의류전에 걸린 옷들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났지만 어쩌다 원피스 한 장이라도 건질 때면 냄새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건 돌아가기 전에 하는 외식이었다. 메뉴는 항상 멸치국수와 오징어튀김이었다. 이름 있는 날만 고기국수와 돔베고기를 시켰다. 식당의 어느 자리에 앉아도 옥빛 바다가 마주 보였다.

엄마는 먹을 때 말이 없었다. 언니와 나도 비슷했다. 오직 국수 빨아올리는 소리와 튀김 씹는 소리만이 우리의 탁자를 들두드렸다. 너무 곱닥헌(예쁜) 바당을 보면 뛰어들고 싶어. 언니가 먹는 와중에 했던 몇 마디 중 한 구절이었다. 그 말 사이사이로 국수 가락이 떨어져 내렸다. 오징어튀김이 한 개 남으면 뒤늦게 시끄러워졌다. 나는 작고 어린 내가 더 먹어야 한다고 고집부렸다. 언니는 언니대로 물질 배우느라 지친 자신이 임자라고 우겼다. 그제야 엄마가 혀를 차면서 반 갈라 먹어 치우라고 목청을 높였다. 느네 둘 다 안 먹젠 허믄 어멍이 먹으켜!

→ 12면에 계속([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고은경 '숨비들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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