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춘문예
[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고은경 '숨비들다' ②
→ 11면서 계속([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고은경 '숨비들다' ①)
바다는 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쪽에서 어떤 일들이 너울대는지, 휘이이 소리가 언제 터져 나오는지, 이명 같은 소리는 어느 물줄기서부터 들려오는지도. 요 바당으로 튀었다 저 바당으로 튀는 내 생각들을 한 방울로 수렴한다면 무엇이 남을지, 얼마나 짤지, 그것마저 알지도 몰랐다.
비자림 앞에 도착했을 땐 구름이 한결 짙어져 있었다. 은수 선배가 입구 안내판 앞에서 서성이다 손을 번쩍 들었다.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가 입은 체크무늬 셔츠에도 구김살이라곤 없었다.
"방학하니까 좋지? 얼굴이 폈네."
"그런가? 선배 얼굴이 더 좋아 보여."
여름의 숲은 깊고 어두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들이 우짖었다.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들이 머리 위를 가로지르면 꼭 나무들이 비명 치는 것 같아 서늘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휘이. 미지근한 바람이 목덜미를 감았다. 선배가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이렇게 하면 향기가 난다던데.
껍질을 벗기려 했으나 그의 손은 빗나가기만 했다. 휴대폰에 달아놓은 펜던트로 내가 대신 긁어주었다. 한 꺼풀 벗긴 나뭇가지를 코 밑에 갖다 대자 귤 냄새가 올라왔다. 진짜네. 선배가 야단스럽게 킁킁댔다. 앞서 걷던 사람들이 흐린 날 숲길이 좋다고 한마디씩 했다.
정수리에 차가운 뭔가가 떨어졌다. 빗방울인가. 머리를 젖혔더니 나무와 나무, 또 다른 나무가 닿아 만들어진 초록의 타래가 보였다. 물속에서 너풀대는 수초들도 저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비자나무 잎들이 밀리고 쓸리며 파도 소리를 냈다.
"나 장터 갔다 왔어. 세화오일장터."
"정말? 나도 세화 들렀다 왔는데."
우리는 둘 다 눈을 크게 떴다.
"아침 일찍 일어났거든. 학회 때 했던 얘기가 생각나서 가봤는데 장 안 서는 날이더라. 간판 아래 해녀 조형물만 보고 왔어."
"상상이 안 가지? 거기에 그 많은 해녀들이 모였다는 게."
"한 번 발도장 찍은 걸로 얼마나 선명하게 복원할 수 있겠어. 그래도 의미심장하더라. 뜻이 뭉쳤던 곳엔 그 기운이 계속 남는 것 같아. 사람은 떠나지만 뜻은 머물러 있는 거지. 어떻게 행진하고 구호를 외쳤는지 고스란히 느끼진 못해도 그분들과 같은 자리에 서봤다는 사실 자체가 난 좋았어."
선배의 얼굴에 뿌듯한 표정이 어렸다. 그 얼굴을 받친 반듯한 셔츠 칼라가 눈에 들어왔다. 빨아서 탁탁 터는 것만으로는 저런 각이 안 나올 텐데. 너무 단정한 나머지 못 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옷 다려서 입어?"
기어이 선배를 장터 밖 현실로 불러내고 말았다. 그가 자신의 셔츠를 한번 내려다보곤 씩 웃었다. 펄에서 게를 잡아 기분 좋은 아이 같았다.
"여동생이 다려줘. 주말에 일주일 치를 다려놔.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다."
비 몇 방울이 더 떨어졌다. 선배가 갖고 있던 우산을 폈다. 그의 동생이 왜 옷을 다려주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힘들까 봐 그럴 수 있었다. 오빠를 끔찍이 생각해서 그러는지도 몰랐다. 선배의 흰 운동화 앞코에 흙탕물이 튀었다. 얼룩이 졌어도 비 내리는 숲길을 걷기엔 여전히 말쑥해 보였다.
어느새 연리목 앞이었다. 사랑 나무, 부부 나무라고도 불리는 그 나무와 맞닥뜨리자 선배가 낮은 탄성을 질렀다. 두 나무가 한 나무가 되느라 맞닿은 부분이 갈라지고 비틀려 있었다. 그렇긴 해도 숲에 있는 나무들의 수령이 대부분 500년을 넘어 어떤 나무든 연리목처럼 보이는데 선배에겐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무끼리 붙은 흔적을 찾듯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입을 뗐다.
"큰 줄기가 맞닿으면 연리목이고 나뭇가지가 붙으면 연리지라더라. 뿌리가 만난 경우는 연리근이고. 저렇게 두 나무가 연결되려면 최소한 10년은 걸린대. 그냥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강하게 압박하느라 무지 고통스럽다는 거야. 껍질은 깨지지, 맨살은 맞부딪혀 갈라지지. 그런 다음에야 둘이 섞여서 함께 살아갈 공간이 생긴다는데. 인간관계도 그렇잖아. 시간을 들이고 아픔도 주고받고 해야…."
공부를 해온 것 같았다. 교사는 이분이 됐어야 해. 그렇게 생각하는데 선배가 나를 흘끔 봤다. 한 우산 아래여서 숨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슨 말인가 더 하려는 듯했다.
"그런 건 낭(나무)이니까 허주 사람이 어떵허젠(어떻게 해)?"
선배가 멈칫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굵어진 빗발이 우산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너… 화났어?"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화는 무슨. 나무는 나무고, 사람은 사람이니까. 그냥 그렇다고요."
숲을 돌고 나오니 옷이 꽤 젖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우산이 뒤집혀 푹 젖었다. 택시로 왔다는 선배를 엄마 차에 태웠다. 어쩐지 기운 빠진 모습이었다. 내가 교직원 생활은 어떠냐고 묻자 할 만하다고 했다. 대기업 다니는 동기들도 부러워한다고 덧붙일 때야 비로소 홍조가 비꼈다. 그가 다금바리를 먹으러 가자고, 아니면 갈치라도 먹자고 거듭 권해왔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힘들다고 답했다. 그저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다. 이명처럼 들리는 휘이 소리 때문에 옆 사람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중문관광단지의 호텔 앞에 그를 내려주었다. 또 보자며 웃는 얼굴이 만날 때보다 그늘져 있었다.
해안도로로 들어서자 비를 품는 바다가 펼쳐졌다. 엄마는 뭘 하고 있을까.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잘 리는 없고, 해녀의 집에 가서 해산물을 손질하거나 음식 조리를 거들 것 같았다. 라디오 뉴스를 틀었다.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는 사이로 잿빛 바다가 일렁였다.
이제 물질 그만두고 서울 가서 살자는 말에 엄마는 꿈쩍하지 않았었다. 아직도 느 어멍을 경(그렇게) 모르커냐. 물에 안 들어가면 어멍이 잘 살 것 같으냐. 엄마가 물질한 시간만큼 나도 애들을 가르칠 거라고,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엄마랑 쭉 살 거라고 하자 코웃음을 쳤다. 바당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육지 사람들이 못 보는 곱닥헌 것들을 보지만 전복 욕심에 죽을 수도 있고 상어에 물릴 수도 있어. 는(너는) 이제 시작이잖아. 몸 가볍게 허영 걸어야지.
동부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데 성산일출봉이 자태를 드러냈다. 마치 테왁을 붙잡고 떠 있는 해녀의 등허리 같았다. 물살에 몸을 맡기는 모든 것은 머리를 낮추기 마련이었다. 물때와 바람에 순응하고 힘을 빼야만 했다. 더 좋은 물건들이 있다 해서 타고난 숨길을 거슬러선 안 됐다. 휘이 소리가 긴 꼬챙이처럼 양쪽 귀를 뚫고 지나갔다. 바다 위에 엎드린 일출봉이 쉼 없이 몰아치는 파도를 받아내고 있었다.
가라앉은 언니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내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달았다
두 나무가 연결되려면 최소한 10년은 걸린대… 무지 고통스럽다는 거야
나를 괴롭혀온 것은 그 소리가 아니란 생각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언니는 엄마처럼 상군이 되고 싶어했다. 노력하면 될 거라고, 엄마와 같은 바당밭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욕심내다 뒈진다는 삼촌들의 엄포보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본다는 언니의 포부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오늘 어멍 바당으로 가. 언니가 그렇게 말할 때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다운 계획이었다. 언니의 숨이 길어지는 만큼 언니의 망사리와 이야기보따리는 한결 풍성해지리라.
언니가 내 귀에 대고 비밀이라 못박았다. 엄마는 물론 어떤 삼촌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며 힘주었다. 어른들이 알면 물질을 아예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아버지 이야기와 달리 진짜 비밀이었다. 고무옷을 챙겨 입는 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내가 언니를 밀어줄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가라앉은 언니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내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달았다.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은 지키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모한 잠수부에겐 입 무거운 동생보다 서슴없이 고자질하는 동생이 있었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후회가 사무쳤다. 비밀이란 말이 소름 끼치게 싫어졌다. 그딴 건 깨라고, 누설하라고, 동네방네 떠들라고 있는 건데 왜 입을 다물었을까. 바다를 따라 깊숙이 내려가면 총천연색으로 어룽지던 빛깔들이 사라져 검고 칙칙한 색들만 남는다고 상군 삼촌들이 말했었다. 그러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나는데 그 절벽 아래엔 바다 괴물의 뱃속 같은 심연이 도사린다고 무서운 옛이야기 들려주듯 으름장을 놓았었다. 보지도 못한 그 세계를 확인시켜준 사람은 바로 언니였다.
다시 이명이 일었다. 머리 꼭대기가 찡 울리더니 반으로 짜개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세화의 파도가 높았다. 풍랑이 거센 잿빛 바다에 자비라곤 없어 보였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물결을 추어올렸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바다에 뭔가 떠 있었다. 검고 둥근 형체가 사람 머리 같았다. 단지 머리인지 고무옷을 뒤집어 쓴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도로 밑으로 내려갔다. 젖은 돌길이 가팔랐다. 울퉁불퉁하다 못해 모지락스러웠다.
검은 물체는 물살에 실려 잠겼다 뜨길 반복하고 있었다. 거기 누구 이수광? 소리를 질렀지만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해경과 어촌계장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주머니를 뒤지다 발이 미끄러졌다. 검은 돌들이 팔뚝과 무릎을 강타했다. 넘어진 쪽은 나인데 가격을 당한 듯 아팠다. 왼쪽 새끼발톱이 뒤집혀 피가 배어나왔다. 붉은색을 보자 정신이 났다. 재차 본 바다 위엔 바람과 파도뿐이었다. 이런 날씨에 누가 저길 들어간단 말인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랄 맞은 두통도 가신 뒤였다. 차로 돌아가니 실종된 아이 엄마를 찾지 못했다는 뉴스가 반복되고 있었다. 와이퍼의 동작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다른 쪽에서 빠졌으나 조류를 타고 여기까지 흘러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헛것을 본 거라면. 휴대폰을 든 채 잠시 망설였다. 냉정하게 생각할 때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릇된 판단으로 애먼 사람들을 고생시킬 수 없었다. 빗물이 머리칼을 타고 줄지어 떨어졌다. 덥고 습한 와중에도 알알한 한기가 어깨를 스쳤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거리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야트막한 지붕을 줄로 묶고 그 지붕까지 돌담으로 에워싼 우리집을. 흔한 모양새여도 쉽게 지나쳐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고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산 집이었다. 내겐 언니와 복작이다 언니를 먼저 보낸 나루터였다. 엄마에겐 옹이가 박힌 채 흠집을 늘려온 통나무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몬딱(다) 잠수병 때문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물질도 하지 않는 내가 이명에 두통에 흐린 시야까지 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돌담길 옆에 차를 세웠다.
엄마 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마당의 물웅덩이를 비췄다. 문을 열자 텔레비전 앞에서 죽을 떠먹는 엄마가 보였다. 아침에 남은 뭉게죽이었다. 오랜 기간 수압에 노출돼온 엄마는 귀가 많이 어두웠다. 내가 바로 옆에 앉아 어깨에 손을 얹을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듣지 못했다.
"나 와수당."
엄마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앉았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막 헤어나온 듯했다.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나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죽그릇 속에 조각난 문어 다리들이 떠다녔다. 방 안 가득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엄마가 입을 앙다물며 내 등짝을 힘껏 쳤다.
"지지빠이(계집애)야, 어딜 쏘다니다 지금 기어 들어왐시니. 꼬라지는 또 이게 무싱거고. 세상에, 피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데다 팔뚝과 다리에 긁힌 자국들이 선명했다. 한차례 넘어진 탓에 흙모래 알갱이가 몸 여기저기 들러붙어 있었다. 뒤집힌 발톱에서 흐른 피로 장판 위엔 붉은 무늬가 생겼다. 엄마가 내 팔을 잡고 흔들어댔다.
"느 무신 일 이서시냐?"
"일? 비 좀 맞고, 넘어지고 그랬지."
"그 소나이랑 무신 일 치른 건 아니고?"
"치르긴 뭘 치러? 비자림 간다고 말했잖아."
"숲엘 무사(왜) 간, 영헌(이런) 날. 사람도 얼마 어서실 텐디. 일부러 느 불러낸 거 아녀?"
"무슨 소리야. 거기만 한 바퀴 돌고 헤어졌다니까. 저녁까지 먹자는데 됐다 그랬다고."
"근데 무사 영(이렇게) 늦엄신고? 뉴스에서 사람 실종됐다고 떠드는디 걱정을 안 햄시니. 여기도 마냥 안전한 데가 아니잖여. 정신 똑바로 차려야 허여."
"그거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잖아. 그리고 내 나이가 몇인데, 서른도 넘은 자식을 이런 식으로 걱정해?"
"안 하면. 꼴은 영 되영(돼서) 뭘 잘했다고. 오늘 본 그 소나인 못쓰컨게. 지지빠이를 이 꼴로 돌려보내는 놈은 더 볼 거 어신게."
"노망났어? 별일 없었다니까. 차 타고 오다가…."
"그만 고라(그만 얘기해)! 애들 가르치는 게 몸 파는 지지빠이 같이…."
엄마가 말을 멈췄다. 일그러진 얼굴이 떠난 아방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아방과 붙어 살 누군가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한마디 언질 없이 바다보다 깊은 곳으로 가버린 딸을 좇는 듯도 했다. 그렇지만 얼마나 후회하려고 저런 말을 하나. 잠자코 문어 다리를 쏘아봤다. 온통 젖은 딸에게 수건은커녕 막말이나 퍼붓는 엄마였다. 무엇을 돌려줘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명이 울렸다. 모든 것이 지겹게 느껴졌다. 나를 괴롭혀온 것은 그 소리가 아니란 생각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나 감수다. 강(가서) 안 오쿠다. 엄마 혼자 삽서. 나보다 죽은 언니가 중요하지? 그래서 독하게 물질허는 거꽈? 잘 알아지쿠다(알겠어). 그렇게 언니 끌어안고 삽서. 난 못 말려. 이제 안 말리쿠다."
붉은 자국을 밟으며 방을 나왔다. 엄마 얼굴은 보지 않았다. 작은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덜렁거리는 발톱을 잡아뗐다. 대충 소독한 뒤 연고를 발랐다. 빠진 자리에 한 번은 새 발톱이 날 것이다. 문을 닫고 제습기를 틀었다. 습도를 알려주는 표시부에 형광빛 숫자가 떴다. 엄마가 언니를 보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다시 물에 들어간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요를 펴고 드러누웠다. 휴대폰이 웅웅거렸으나 내버려두었다. 엄마 방의 텔레비전 소리가 배에 실린 듯 건너왔다. 이대로 자도 될까 싶은데 혼곤히 잠이 왔다. 사람 머리처럼 검은 물체가 파도를 따라 넘실댔다. 끝도 없이 짠물을 먹으며, 그러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나는 그것을 뒤따랐다.
눈을 떴을 때 집 안엔 나 혼자였다. 아침을 지나 거의 점심 무렵이었다. 선배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괜한 소릴 한 것 같다는 메시지도 함께였다.
연리목 앞에서 청산유수로 말하던 그가 떠올랐다. 숲 해설가 해도 되겠다고, 다음엔 오일장에 가보자고 답을 보냈다. 제습기에서 꽉 찬 물통을 뺀 뒤 방문을 열었다. 비 갠 하늘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돌담 너머의 바다가 말갛고 눈부셔서 어제 일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샌들에 묻은 피는 빗물에 씻겨 있었다. 축축한 신발을 꿰어 신고 바닷가로 향했다. 오늘 바당은 어제 바당이 아니지. 지금 저 바당은 그때 그 바당과 다르지. 이것은 언니에게 건넨 말이었다. 내가 나한테 당부하는 말이기도 했다. 봐, 이젠 섬 한쪽에서 큰 군함이 왔다 갔다 해. 바다 건너 온 사람들이 뱃일이며 양식장 일에 뛰어들기도 하고. 어디까지 품을까, 바다는. 품는 것 같다가도 사정없이 뱉어내거나 삼키는 게 일인데.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떼선 안 될 것 같아. 변화무쌍하게 요동치는 저곳을 지켜보고 또 지켜보는 게 한몫이야.
바닷물에 발을 담근 아이와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발 장난만으로도 즐거운지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 꼭 파도와 이야기하는 사람들 같았다. 잡히지 않는 사연들이 포말을 이루며 퍼져 나갔다. 모두 아는 일이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건 흔쾌히 거뒀다 미련 없이 밀어 보내는 파도였다. 그 대화를 알아들은 사람처럼 한동안 붙박인 채 서 있었다. 수평선 근처에서 물결이 설렌 듯했다. 지금은 고요하지만 언제 태풍이 몰려와도 이상할 것 없었다.
집 앞에 다다르자 뭔가를 터는 소리가 들렸다. 담 안쪽으로 깔린 평상에 상이 놓여 있었다. 보리밥 한 그릇에 엄마가 키운 푸성귀와 된장, 미역국과 계란찜으로 단출히 차린 밥상이었다. 미역을 널듯 빨래를 널어 나가는 엄마도 보였다. 뭐라고 말 붙여야 하나. 젖은 옷이 걸릴 때마다 출렁이는 줄을 곁눈질하며 잠시 고민했다. 엄마의 걸걸한 말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난 아까 먹었져. 혼져(빨리) 먹어라."
어제 벗어놓은 옷이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엄마의 속옷과 내 속옷, 엄마의 고쟁이와 내 추리닝이 두서없이 나부꼈다.
"어멍 태안 가기로 했져. 느 현오 삼촌 알아지커냐(알지)? 그 양반네 누구 초상이 나서 재기재기(급히) 내려와야 한단다. 대신 가게 됐져."
엄마의 검정 티셔츠와 검정 고쟁이를 붙여놓으면 위아래가 이어진 고무옷과 구별이 안 될 터였다. 다른 때 같으면 내 방학 어떡하냐고 한소릴 했겠지만 지금은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머물당 가든지, 올라가고 싶으면 재기재기 올라가고."
거침없이 다부진 뒷모습이었다. 촘촘히 걸려 있는 빨래들에 눈길을 주자니 어제 나를 닦아세우던 엄마가 얼마나 엉성했는지 믿기 어려웠다. 국 한 수저를 뜨는데 부엌 찬장 어딘가에 있을 차롱이 아른거렸다. 그걸 찾아 도시락을 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보리밥을 담아야지. 밭에서 상추, 고추도 따고. 된장과 젓갈은 새지 않게 꽁꽁 싸야지. 엄마는 뭘 이런 걸 쌌냐고 하면서도 한 끼 값을 아끼기 위해 챙겨 갈 것이다.
먼바다의 어디쯤 내 시선이 가닿는 데서 뭔가 올록볼록 솟아오르려 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엄마가 물질하러 간 사이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수업 틈새에라도 배치할 섬의 자취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귀에 익은 숨비소리가 들리면 언니도 궁금한가 보네 하고 이야기해줄 작정이었다.
실종된 여성이 바닷가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어느 바다인지 듣지 못한 것은 진행자가 그 부분을 너무 높거나 낮게 말한 까닭이었다. 엄마가 딸아이를 안고 바다로 향했으리란 추정이 이어질 때 우리 둘 다 손을 멈췄다. 오늘의 바다는 청초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얻거나 잃어놓고도 파르라니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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