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19)] 싸리재 언덕길 뛰놀던 ‘송림초 스타’ 윤중강 입니다

입력 2024-01-31 17:02 수정 2024-02-01 18:54

“경아대 장구소리 흥겹던 추억… 이제 인천 평론가로 거듭나고 싶다”

윤중강 평론가

윤중강 국악평론가

인천 출신 우리나라 1호 국악평론가 윤중강은 ‘평론(評論)’의 의미를 글자에서 찾는다.

우선 평(評)자는 말씀 언(言)과 평평할 평(平)자가 결합한 형성문자다. 즉 말(글)을 통해 울퉁불퉁한 것을 평평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론(論)이라는 글자는 말씀 언과 생각할(둥글) 륜(侖)이 합쳐져 있다. 둥글고 합리적인 생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즉 비평의 대상을 평등하고 조화롭게 만들어 그것이 자연스럽게 순환할 수 있게 만들어내는 것이 평론의 의미다.

“‘평’과 ‘론’ 글자에 평론의 의미가 있어요. 어디든 쏠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평평하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순환할 수 있게끔 만들어내는 것이 평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윤중강은 1959년 12월27일 인천시 중구 경동 29번지에서 삼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 인근 배다리에서 경동사거리로 통하는 언덕길인 싸리재가 있다. 윤중강은 자신을 ‘싸리재 키즈’라고 소개한다.

초교시절 음악·무용·연극 다방면 재능

율목공원 국악원 들락거리며 친숙

대학 1학년때 황병기 듣고 창작곡 ‘충격’

뒤늦게 가야금으로 진로 바꿔 재입시

이론·작곡 집중, 국악과 첫 우등장학생

황병기 분석 ‘객석예술평론상’ 당선

배다리부터 경동사거리, 화장터라 불리던 율목공원 등이 그가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답동성당에서 들려오던 종소리와 항도백화점 풍경도 또렷하다.

윤중강은 전남 곡성 출신 초등학교 무용 교사인 윤병하(1924~2008)와 인천사람 이종임(1930~)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둘은 인천신흥초에서 근무하며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학교장이 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윤병하는 신흥초를 비롯해 인천에서 ‘교육무용’ 확산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고, 서울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훗날 ‘한국무악고’라는 책을 펴내기도 한다. 윤중강에게 아버지와의 애틋한 기억은 없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서삼순(1904~1982)이 가정을 돌봤다.

윤중강은 1966년 인천송림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어머니도 함께 인천송림초 교사로 부임했다. 모자가 교사와 학생으로 등교를 함께한 5년 동안이 윤중강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된다.

윤중강이  송림초등학교 윤중강

인천송림초 4학년 시절 윤중강

송림초 재학 시절 ‘윤중강을 모르면 간첩’이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그는 끼가 넘치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의 재능은 음악·무용·연극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응원단장’을 도맡았다. 위로 4·5·6학년 선배들이 있었음에도 어깨춤 율동을 곁들인 귀여운 안무로 누나·형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린 윤중강이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맹호들은 간다’라는 제목의 군가에 으쓱으쓱 어깨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울 때 가장 환호성이 컸다고 한다. 웅변에도 재능이 있어서 교내외 웅변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알았던 윤중강은 4학년 때 담임 선생님 대신 음악 시간에 풍금을 쳤다. 윤중강은 ‘피아노집’에서 피아노 연주를 배웠는데, 인천시립교향악단 초대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김중석으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1970년 인천송림초 강당 승공학예발표회  연극 ‘화랑 관창’에서 연기 중인 윤중강

1970년 인천송림초 강당 승공학예발표회 연극 ‘화랑 관창’에서 연기 중인 윤중강

5학년 때에는 연극 ‘화랑 관창’의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윤중강은 “관창이 어머니에게 ‘나라를 위해 저는 떠나겠습니다’라고 대사를 읊으며 칼을 뽑으면 박수 소리가 터지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윤중강은 집 가까이 인천중앙초등학교가 문을 열며 6학년이 되던 1961년에 전학을 가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관창 역할은 다른 친구에게 넘겨줘야 했는데, 그해 송림초 연극 화랑 관창은 흥행에 실패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윤중강의 역할이 컸다.

윤중강의 인기는 전교 회장·부회장 선거 결과를 통해 실제 확인됐다. 당시 송림초는 자신이 원하는 한 사람의 이름만 써서 내는 방식의 선거를 치렀는데, 6학년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득표수가 많아도 5학년에게는 부회장을 맡겼다.

초등학교 시절 윤중강 집 근처 율목공원에 ‘경아대(景雅臺)’라는 이름의 국악원이 있었다. 1963년 인천시 지원과 국악인 성금으로 세워진 예쁜 한옥 양식 건물이었다. 윤중강은 학교가 파하면 이곳을 들락거리며 일찍이 국악을 접했다. 송림초 교사이던 어머니는 저녁이나 되어야 퇴근해 윤중강은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인천 국악인은 이곳에 모여 무용과 시조, 가야금 등을 연습하고 가르쳤다. 특히 여학생들은 오고무, 장구 등을 배웠다.

학교가 끝나고 경아대에 가면 신발장에 예쁜 소녀들의 신발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고 윤중강은 기억했다. 많은 소녀가 무용을 배우러 이곳 경아대를 찾았다. 지금은 무속인이 된 김금식 선생이 무용을 가르쳤다. 오후 3시쯤 되면 장구 소리와 북소리가 났다. 개구쟁이 남자 아이들은 모두 경아대로 달려갔고 윤중강도 그 무리에 있었다. 가끔은 경아대 안에 들어가 공연을 감상할 기회도 생겼다.

윤중강은 “경아대에서 무용을 배우던 친구들은 자유공원 근처 시민관과 같은 공연장에서 공연할 기회가 많았는데 돌이켜보면 관객 앞에서 공연하기에 앞서 미리 경험할 기회를 준 것 같다”며 “그때 관객 역할을 하며 들었던 장구 소리, 북소리 등이 훗날 국악을 하는 데 바탕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국악평론가 윤중강

국악평론가 윤중강

싸리재 길을 따라 경동사거리에 이르면 지금은 비어있는 경동파출소 건물이 있다. 윤중강은 이 경동파출소에 얽힌 중학교 시절 이야기도 들려줬다.

윤중강의 중학교 재학 시절 단짝이면서도 ‘라이벌’ 관계인 한 친구가 있었다. 3학년 때 그 친구와 함께 모처럼 율목풀장을 찾아갔다. 윤중강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율목공원 화장터 자리에 풀장이 문을 열었다. 물놀이를 마치고 몸을 씻고 나오려던 두 친구의 눈에 아무도 지키지 않고 비워둔 매표소가 보였다. 그리고 매표소 작은 구멍 안으로 풀장 입장권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친구는 손이 작은 윤중강에게 티켓을 훔칠 수 있겠느냐고 제안했고, 지기 싫었던 윤중강은 티켓을 한 장 훔쳤다. 그걸로 끝난 줄 알았지만 다음 날 친구가 허겁지겁 찾아왔다. 수영장에 입장권을 다시 돌려줘야 하니 입장권을 달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윤중강이 무사히 입장권을 훔치는 모습을 본 그 친구도 용기를 내 입장권 한 뭉치를 훔쳤고, 훔친 입장권을 다른 친구들에게 나눠주다 경찰에 덜미가 잡혔다. 둘은 경동파출소에서 사건 조서를 꾸미고, 부모님이 찾아온 이후 손바닥 10대를 맞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윤중강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둑질을 했다”면서 “그날 이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법을 지키며 살겠다고 다짐하고는 평생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았다”고 했다.

중학교를 마친 윤중강은 부평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윤중강의 고교 시절은 남들보다 짧다.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경동에서 부평까지 오가야 하는 긴 통학 거리는 윤중강에게 부담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부평고등학교 1학년  윤중강

부평고등학교 1학년 윤중강

부평고 1학년 시절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 수업에 재미를 붙이며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윤중강의 1학년 국어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타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리여석 단장이다. 리여석 선생님의 수업은 언제나 즐거웠다. 어려운 문학 작품도 쉽고 재미있게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2학년 담임으로 만난 교련 선생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담임 교사는 늘 군복 차림에 박정희 대통령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긴 지휘봉을 손에 들고 다녔는데, 윤중강에겐 그 모습이 불편했다. 학생들이 청소한 깨끗한 교실 바닥을 군화를 신은 채 밟고 다니던 습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윤중강의 검정고시 수험표

윤중강의 검정고시 수험표

결국 그는 1개월여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학원을 다니며 그해 8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며 힘겨운 고3 시기를 보낼 때 윤중강은 서울의 한 대학에 합격해 일찌감치 대학 1학년 생활을 즐겼다. 그때 그가 자주 드나들던 아지트 중 한 곳이 중구 인현동에 있는 ‘짐다방’이다. DJ가 있고 듣고 싶은 음악을 신청할 수 있는 클래식 전문 음악 다방이었다. 당시 클래식을 좋아하는 인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 퍽 유명했다고 한다.

윤중강은 어느 날 황병기의 가야금 창작곡을 듣게 된다. ‘침향무’라는 앨범의 첫 번째 트랙 ‘숲’이라는 창작곡이다.

“기존 국악과는 다른 진행이 단순하면서도 끌리는 겁니다. 듣는 순간 바로 ‘아! 이게 바로 가야금 소리구나’ 하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 나도 가야금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중강은 그 순간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해서 가야금 연주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아버지가 운영하는 무용연구소에 걸려있던 가야금이 떠올랐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 케이스도 없는 가야금을 둘러 메고 인천에 내려왔다. 아버지 소개로 가야금 선생을 만나 배우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배워보는 가야금이었는데, 너무 쉬웠어요. 조율을 하자마자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너무 건방졌죠. 어렵지 않구나 생각했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가야금이라는 악기가 처음에는 쉬운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어렵고 다양한 표현법을 익히기 힘든 악기더군요. 어찌 되었든 그 덕에 국악을 시작하게 됐다는 점은 고마운 일이지요.”

가야금을 배운 지 1년이 채 안 되다 보니 첫 도전에서 당연히 낙방했다. 군대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대학에 적을 두어야 했다. 한 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해 제대로 연습을 한 끝에 1980년 서울대 음대 국악과 가야금 전공으로 입학했다.

윤중강은 입시를 경험하며 자신이 연주자로 성장하긴 힘들 것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대 음대 실기시험을 치르며 입시 대기실에 앉아 다른 지원자의 연주를 듣는 순간 자신의 가야금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10년 가까이 준비한 친구들과 비교하면 뜯는 소리가 달랐다.

서울대 재학시절 가야금 산조를 연습하고 있는 윤중강

서울대 재학시절 가야금 산조를 연습하고 있는 윤중강

입학과 동시에 군 복무를 해야 했다. 육군본부 군악대를 거쳐 군수사령부 군악대에서 제대했다. 제대 후 비로소 그토록 바라던 대학 생활이 시작된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다른 과목은 다 A를 받았는데, 가야금 실기는 B+ 이상 성적을 받기 힘들었다. 당시 이성천 교수를 찾아가 가야금 전공이 아닌 이론·작곡으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했다.

교수 대답은 너무나 명쾌했다. 이론이나 작곡 공부는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으니, 졸업할 때까지 가야금 연주를 충분히 배워두라는 조언이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가야금은 그냥 졸업할 정도만 해두자. 그리고 다른 나의 길을 찾자. 그래서 작곡, 이론, 평론으로 눈을 돌리게 된 거죠.”

당시 평론계에 ‘국악평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악평론 분야 등용문 자체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84년 ‘객석’이라는 공연예술 전문 잡지가 창간했고, 1985년 창간 1주년을 기념해 ‘객석예술평론상’이 생겼다. 응모 분야는 국악·서양음악·연극·무용 4개 부문이었다. 윤중강은 기회가 반가웠고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국악계는 정악과 민속악 등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만 있을 뿐 창작음악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윤중강은 자신을 국악계로 이끈 황병기의 음악을 글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창작음악에 관심이 적은 시대에 그것을 분석하는 일은 더욱 생경한 일이었지요. 객석예술평론상은 악보를 제시하는 듯한 음악적 분석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죠. 인문학적 시각으로 작품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관건이었죠.”

황병기 작품을 인류학·민속학·문학·미술적 입장에서 분석했다. 국악 평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니 참신한 시도일 것이 분명했다. 결과는 당연히 당선. 우리나라 1호 국악평론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윤중강은 지금도 그때 썼던 그 평론이 자신이 이제껏 쓴 평론 가운데 최고라고 생각한다.

1987년 서울대 국악과 졸업사진

1987년 서울대 국악과 졸업사진

국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역대 국악과 졸업생 가운데 최초로 ‘우등장학생’이라는 타이틀도 갖게 된다.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본교 국사학과로 편입해 잠시 역사학도의 길을 걷지만 졸업은 하지 않았다.

1988년 한국방송작가교육원 1기 수강생으로 입학한다. 국악 평론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시장 수요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택한 차선책이었다. 윤중강은 국악과 대중음악, 다양한 예능프로그램 메인 작가로 활약한다.

인천아트플랫폼 개관후 상주작가 활동

‘거문고 앙상블 다비’ ‘만요컴퍼니’ 작업

“지역 콘텐츠 한단계 성장시키고파”

윤중강이 고향 인천을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그의 나이 50이 되던 해였다.

“만 나이로 50이 되던 2009년 12월27일 제 생일인 어느 날 갑자기 인천에 가고 싶더군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인천 원도심의 풍경이 새롭게 다가왔다.”

저녁 늦게 도착했고 혼자 개항장 일대를 비롯해, 자유공원 등을 천천히 산책했다. 이곳저곳을 거니는 동안 그곳에 깃든 어린 시절 추억들도 함께 떠올랐다. 2009년은 개항장 일대에 남아있던 창고 건물을 고쳐 만든 인천아트플랫폼이 막 개관한 때였다. 옛 창고 앞에서 어릴 적 친구들과 공을 차며 뛰어놀던 기억이 되살아났고, 우연히 ‘팔도사나이’ ‘강재구 소령’ 등의 영화 촬영 순간을 숨죽여 지켜보던 경험도 떠올랐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던 이곳과 관련된 옛날 이야기도 생각났다.

“저와 외할머니, 어머니 등 거의 100년 가까운 시간의 기억이 갑자기 소중하게 여겨지더군요. 나의 이런 기억이 허무하게 사라지도록 그냥 내버려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굉장히 갖게 됐죠.”

그 이후부터 ‘인천’과 관련된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 2010년 인천아트플랫폼 상주작가이던 ‘거문고 앙상블 다비’라는 그룹과 매칭된 평론가로 기획 공연을 함께했고, 2011년에는 본인이 인천아트플랫폼 상주작가로 활동하며 인천을 탐색했다. 2012년에는 예술감독 역할을 맡은 윤중강을 주축으로 국악, 뮤지컬, 연극을 전공한 예술가들이 프로젝트 그룹 ‘만요컴퍼니’를 결성했다. 만요컴퍼니는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로 인천에 머물며 개항기 유입된 근대 음악 만요를 테마로 작품 활동을 했다. 윤중강은 “약 3년 동안 인천아트플랫폼과 인연을 맺으면서 인천과 관련된 콘텐츠를 만들어낸 일은 무척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윤중강은 자신의 활동 영역을 ‘국악 평론’에서 ‘제1호 인천평론가’로 확장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인천에 관한 향토사학자와 연구자가 많이 있어요. 저는 그들에 대해서 평론을 하고 싶습니다. 인천이라는 곳의 지역성, 역사성, 사람에 대해 나만의 시각으로 평론의 잣대를 적용하고 싶습니다. 인천평론가로서 인천 콘텐츠의 강점과 약점을 적나라하게 얘기하면서 인천을 한 단계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입니다.”

국악평론가 윤중강

국악평론가 윤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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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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