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흐릿해진 '인천 발자취' 찾는다

옥살이·축항 공사 노역등 '깊은 인연'

유정복 인천시장 '의미 되살릴 방안 검토' 주문

동상 위치·탈출로등 스토리텔링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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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에 나온 인천의 옛 지명 등을 토대로 추정한 김구의 인천감리서 탈출 경로. 구체화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백범 김구는 인천에서 옥살이하고 축항 공사현장에서 노역하는 등 인천과의 인연이 유난히 깊다. 김구가 해방 이후 38선 이남 지방을 순회할 때 가장 먼저 찾은 곳도 인천이었다.

그 정도로 인천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지만, 정작 인천은 김구의 발자취를 찾는 데 관심이 없었다. 인천시가 뒤늦게나마 김구의 의미를 찾겠다고 밝혔다. 김구를 '인천인물'로 기리는 사업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16일 "백범 김구선생 동상이나 기념물·상징물 등 인천감리서와 함께 의미를 되살릴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말했다.



유 시장은 이날 간부회의에서 "인천 가치 재창조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훌륭한 역사를 잘 발굴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며 이같이 지시했다. 시정 운영의 핵심 기조인 인천 가치 재창조 차원에서 '김구선생 의미 찾기'를 추진하라는 것이다.

김구는 일본인을 살해한 '치하포 사건'으로 1896년 인천감리서 감옥에 갇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신학문을 접하고 수감자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탈옥에 성공한 그는 1914년 또다시 인천 감옥에 이감돼 축항 공사현장에서 노역까지 했다.

현재 인천감리서 터에는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아파트 앞에 '감리서 터 안내판'만 설치돼 있을 뿐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다.

김구 동상의 위치도 문제다. 김구 동상은 인천대공원에 있다. 1997년 10월 건립돼 이곳에 세워졌는데, 그 위치가 김구의 발자취와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김구가 옥살이한 곳이나 축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김구는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고 기록했고, 1946년 38선 이남 지방순회 당시 인천을 가장 먼저 방문했다. 그해 11월 강화도를 방문했을 땐 합일초등학교에 '弘益人間(홍익인간)'이란 휘호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로 묻혀 있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는 탈옥 후 '용동 마루터기' '천주교당의 뾰죽집이 보이는 언덕' '화개동 마루터기' 등을 거쳐 서울로 탈출했다. 하지만 몇몇 연구자만 관심을 가질 뿐 인천시는 김구의 탈출 경로에 무관심하다. 김구의 탈출로는 그의 흔적을 찾아 재구성하는 스토리텔링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다. ┃그래픽 참조

양윤모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시민들의 관심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라며 "인천대공원에 있는 동상을 개항장 등 김구선생과 관련된 장소로 이전해야 한다"고 했다. 또 "김구선생이 탈옥에 성공해 애국 청년이 된 출발점이 바로 인천이라는 점에서 탈출경로 찾기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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