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동 백구번지 출신’ 악다구니 뜻해
기계 작동법에 관심 많았던 어린 시절
국방과학연구소서 무기 체계 설립 참여
K200 개발 마치고 MIT 美 유학길 올라
박사 마치고 돌아와 전차 개발에 매진
방위산업체 힘모아 K2 흑표전차 탄생
“실질적 사용하는 軍 소통절차 있어야”
K2 전차는 국내 지상 전투분야의 독립… 우리 손으로 만들고 수출도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일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다툼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어쩌면 평화가 더 비정상적인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은 인류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지만, 역설적이게도 인류 발전에도 공헌했다. 과학 발전에 박차를 가한 것이 바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아임프롬인천 이번 호 초대 손님은 인천 숭의동 109번지에서 태어나 과학자를 꿈꾸다 지상전(地上戰) 최고의 무기로 불리는 전차 개발에 평생을 바친 김의환 현대로템 고문이다. K-방산이 글로벌 시장에서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데에는 김 고문의 역할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김 고문은 우리 손으로 만든 K2 흑표 전차의 아버지로 불린다.
“인천 사신 분들이면 ‘숭의동 백구번지’를 다들 아실 겁니다. 요즘은 그곳이 완전히 재개발 돼 이제 새로 태어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말이 인천이지, 초가집도 있었고요. 뭐 그런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김 고문 말처럼 숭의동 백구번지는 정확한 위치를 설명하는 지번 그 의상의 의미가 있다. 인천의 가난한 시절을 설명하는 단어로도,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야 했던 드센 사람을 수식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내가 숭의동 백구번지 출신이야”라는 말은 “험한 동네에서 성장했으니 얕잡아 볼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된다. 숭의동 백구번지는 맥아더 동상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인천의 랜드마크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곳 달동네 꼭대기에는 ‘전도관’ 혹은 ‘예루살렘교회’ 등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대형 종교 시설이 있었는데, 인천 구도심 어지간한 곳에서는 그 모습이 다 보였다.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이곳에는 교회 건물 대신 미국인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1858~1932)이 지은, 그림 같은 서양식 별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알렌은 주한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로 한국 최초 서양식 병원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했고, 고종의 신임을 받아 전담 의사이자 정치 고문으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향토사학자 최성연의 저서 ‘개항과 양관역정’은 알렌 별장이 ‘공사 집’ ‘선교사 집’ ‘의사 집’ ‘이명구 별장’ ‘서병의 별장’ 등으로 불렸다고 설명한다.

숭의동 백구번지는 김 고문 이름에도 녹아 있다. 김의환의 가운데 ‘의(義)’자는 숭의동에 태어나 ‘의’에서 따왔다는 것이 김 고문의 설명이다.
김 고문은 결혼 전까지 숭의동에서 살았다. 초·중·고교를 모두 도보로 통학했는데 그 덕에 연구원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체력이 그때 자연스럽게 길러졌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김 고문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생각해 보면 호기심이 좀 많았던 것 같아요. 무엇을 만들기를 좋아했고, 이것저것 관심이 많았어요. 좋은 말로 하면은 ‘탐구’라고 할까요. 탐구생활을 많이 하는 그런 꼬마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시절 새총을 나무로 소총처럼 만들어서 사용했던 기억도 납니다. 새총에 방아쇠도 만들고 해서 이렇게 지우개를 쌓아놓고 맞춰보는 장난도 해보고요. 썰매도 만들어 타 봤고요. 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동네에서 재봉틀이 고장나면 모두 저한테 와서 고쳐달라고 그랬다고 하시더군요. 제 기억에 재봉틀을 많이 고쳐드렸던 것 같아요.”

김 고문은 어릴 적 재능을 기술이 아닌 ‘관심’으로 표현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그런 것들이 눈에 잘 보였던 것 같아요. (기계가 작동하는) 원리 같은 것들이요. 그게 관심인 것 같아요. ‘만약 여기서 뭘 바꾸면 어떻게 작동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나 싶어요. 스포츠를 잘하는 사람들은 딱 보면 ‘이건 어떻게 하면 되겠다’ ‘어떻게 하면 공이 빨리 날아가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저는 기계를 보면 ‘저건 어떻게 작동할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좀 빨리 감을 잡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관심사가 그랬던 것 같아요. 이과적 취향, 그랬던 것 같습니다.”

김 고문은 4남 2녀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열악한 가정 형편이었지만 4형제 모두 제물포고를 졸업했을 정도로 모두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 교육열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스스로 공부해야 자기 인생을 자신이 올바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많이 주신 것 같습니다. 스스로 자기 발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교육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공부하라’는 얘기보다는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올바르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교육이 뒷받침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린 시절 김 고문은 과학뿐 아니라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창영초 시절 밴드부 활동을 했다. 재능이 있었는지 1965년 지역신문 주최 전국학생음악콩쿨에서 1등 트로피를 거머쥐기도 했다. 인중·제고에 진학한 이후에도 계속 트럼펫을 연주했다. 지금도 플루트를 연주한다. 중·고교시절에는 막연하게나마 과학자나 공학자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고 공부를 이어왔다. 공과대학이면 다 좋다고 생각해 서울대 공대 공업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우연히 읽은 ‘크리에이티비티’라는 제목의 원서가 그가 ‘창조’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에 집에 ‘크리에이티비티’(창조성)라는 원서가 하나 있었어요. 짧은 영어 실력으로 그 책을 읽었는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 제일 뛰어난 것이,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창조에는 문학적 창조, 음악적 창조 등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예술적 창조 이외에 공학적 창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잘 몰랐어요. 공학적 창조는 이전까지 없었던 것을 우리가 가진 과학 지식을 총동원해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앞으로 창조의 덕목을 키우고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습니다.”

그는 ‘병역 의무’ 이행을 위해 들어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창조의 희열과 마주했다. 1979년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특례 보충역으로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사해 5년 간 무기 체계를 만드는 일에 발을 담갔고, 그 시기를 “더없이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가 맡은 임무는 K200 전투 장갑차를 개발하는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K200 장갑차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든 지상 전투 장비다. 개발 초기 개념을 잡는 과정부터 시작해 시제품을 테스트하기까지 장갑차가 완성되는 과정을 5년 동안 지켜봤다.
“이게 공학적 창조의 기쁨이구나, 그것을 여기서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상업적 물건이 아니라 남북 대치 상태에 있는 이런 나라에서 자국민을 지키고 사회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는 데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도 생겼어요.”
K200 개발을 마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해외 유학은 그가 세워둔 인생 계획 가운데 하나였다. 여러 곳에 지원서를 보냈고 입학 승인을 받은 곳도 여러 곳이다. 최종적으로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를 택했다. 장갑차와 씨름하며 보낸 5년 동안 학교 공부는 잊고, 설계와 시험에만 집중했다. 유학 가서 다시 시작한 공부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이거 연필 잡는 법부터 새로 다시 공부해야 되겠구나’하는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어요. 실제로 첫 시험을 보고 채점 결과가 담긴 노트를 교수님이 나눠주는데 눈이 동그래지더군요. 120점 만점 시험에 40점을 받았어요. 평균이 80점, 제 바로 위가 60점, 결국 꼴찌를 했습니다.”

다음 시험에서 반전을 이뤄냈다. 이번에는 1등을 차지했다. 교수님의 두 눈이 이번에도 또 동그랗게 됐다.
“공부하는 방법이 틀렸던 겁니다. 그냥 무작정 열심히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거죠. 요령이 필요했어요. 나쁜 뜻의 요령이 아니고, 배운 것을 복습해야 했던 건데, MIT라는 학교 이름 때문에 주눅이 들었던 것 같아요.”
박사과정까지 마친 그는 1989년 귀국해 국방과학연구소 전차체계실장을 맡아 K1A1 전차 개발에 돌입했다. K1A1 전차 개발 사업은 미국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아 생산한 K1 전차 성능을 자체 기술로 개량하는 프로젝트였다. 이 사업을 통해 전차 관련 주요 기술과 부품들을 국산화할 수 있게 됐다. K1A1 전차 개발의 성공으로 한국은 독창적인 전차를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갖게 됐다.
전차라는 이름이 붙은 무기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15년이다. 영국에서 만든 ‘Mk I’이 시초다. 서구에서 진화와 발전을 거듭한 전차 기술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정점을 찍었다. 독일이 속도를 핵심으로 하는 ‘전격전’이라는 전술을 펼치며 전차는 지상 전투의 주력으로 자리잡았다. 반면 우리나라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도 변변한 전차 한 대 없는 나라였다. 미국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즉 스스로 국방을 책임질 수 없었다는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 ‘자주국방’은 중요한 시대적 과제이자 목표가 된다. 국방과학연구소도 1970년 창설됐다. 우리나라를 지키는 무기 체계를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노력이 이때 비로소 시작된다. 1970년대 후반 미국의 M48 전차를 개조하는 사업을 한국이 맡아 하게 됐다. 전차를 우리 손으로 기술적으로 만지기 시작한 시초다. 정부는 한반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고유의 전차를 가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K1 전차 개량 프로젝트다. 완전히 독자적으로 하기는 어려워서 미국 기술 지원을 받았다. 추후 88전차로 명명된다. K1 전차는 우리가 생산을 하지만 수출할 수도 없었고 한국군 실정에 맞춰 개량을 하는 작업도 일일이 허락을 받아 진행해야 했다.

김 고문은 K1A1 사업을 진행하며 “전차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기술적 이해와 설계적 이해를 높이려는 노력을 엄청나게 쏟아 부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K1A1 개발사업을 통해 전차에 대한 기술을 축적한 우리 정부는 K2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군, 국방부, 국방과학연구소, 현대로템을 비롯한 방위산업체들이 힘을 모아 K2 흑표전차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K2 전차는 우리나라 방위 산업이 지상 전투분야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지상 전투 장비를 완전히 이제 우리 손으로 만들고 수출도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수출이 가능한 전차라는 것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우리 소유의 전차라는 겁니다.”
김 고문은 K2 전차가 전 세계 ‘탑3’ 혹은 ‘탑5’안에 반드시 꼽히는 전차라고 강조한다. 다른 나라의 전차가 도저히 범접하지 못하는 기술을 K2 전차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K2 전차는 부드러운 서스펜션으로 야지(野地)를 빠르게 이동하며 작전을 펼치는 능력이 우수하다. 또 차체 높이를 지형에 맞게 올리고 내릴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다. 주포로 첫 발을 사격한 후 두 번째 포를 사격할 때 필요한 시간이 6초 정도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축에 속한다. 명중률이 90%라고 하면 두 발을 쏠 경우에는 명중률이 99%에 가까워진다. 자동으로 포탄을 장전할 수 있는 능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무기 체계 속에서 전차는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전차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김 고문은 여전히 전차는 ‘지상전 최고의 무기’라고 강조한다.
“모든 무기가 그렇습니다. 공격 수단이 나타나면 그에 대응하는 수단이 또 나타납니다. 창과 방패를 뜻하는 모순( 矛盾)이라는 말을 다 아시잖아요. 무기의 역사 속에 계속 반복된 말입니다. 드론 공격에 허무하게 당하는 전차를 보며 혹자는 전차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지만 대응 방안은 이미 다 개발이 됐고 이제 적용이 시작되는 단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세계 최고 반열에 올라온 K2 전차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라도 주춤한다면 또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김 고문의 조언이다.

“우리도 변화해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무기는 정부 즉 군(軍)이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군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소통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야 합니다. 공학적으로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전차 나온다고 해도 실제 전투에서는 최고일 수는 없습니다. 과거 정부가 주도했던 전투 장비 생산을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만큼 군과 소통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해 보입니다.”
■약력
1954년 인천 숭의동 출생
1967년 창영초등학교 졸업
1970년 인천중학교 졸업
1973년 제물포고등학교 졸업
197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공업교육학과 학사
197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공업교육학 석사
1979~1984년 국방과학연구소(ADD) 선임연구원
1984~1986년 미국 MIT 재료공학(Materials Science and Engineering) 석사
1986~1989년 미국 MIT 재료공학 박사
1989~1999년 국방과학연구소 전차체계실장
1999~ 2000년 미국 육군 무기체계분석연구소(AMSAA) 연구원
2000~2003년 국방과학연구소 분석평가실장
2003~2012년 국방과학연구소 흑표전차개발단장
2012~2019년 아주대 대학원 시스템공학과 정교수
2020년~ 현대로템 기술자문
■연구개발성과
K2(흑표) 전차 체계개발단장, 사업 책임자
K1A1 전차 체계개발 실장
K1 전차 및 계열전차 방호구조 연구 분석 및 국산화 개발
K200 전투장갑차 체계 형상설계 및 개발
■수상내역
2023년 자랑스런 방산인상 방산기술상
2010년 5.16 민족상 과학기술부문
2009년 국방과학연구소 올해의 ADD인상
2007년 보국훈장 천수장
2000년 미국 육군 무기체계분석연구소(AMSAA) 소장 표창
1998년 국방과학연구소 국방과학상 은상
1996년 국방과학연구소 국방과학상 관리상
1994년 국방부장관 표창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