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향한 불꽃, 목숨을 건 배포… 펜으로 항거한 언론

1919년부터 상해 임시정부서 발간 7년간 소식 전해

3·1 운동의 의미·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상세 보도

독립 의지 고취·임정 활동 홍보… 재정난 고군분투

이선경·유갑순 등 독립운동가들도 국내 배포 힘써

200호 넘는 발행 기록 항일 염원 역사 남겼던 역할

/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매년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국내 최초로 민간이 만든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일(1896년 4월 7일)에서 비롯됐다. 서재필이 이끌던 독립협회가 제작했다.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국내에 언론을 처음으로 움트게 해 민주 국가의 기틀을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의미가 크다.

첫 ‘독립신문’은 3년 뒤인 1899년까지 제작됐지만 그 취지와 정신, 의미는 머나먼 중국 상하이까지 이어졌다. 그로부터 20년 뒤, 1919년 3·1 운동 이후 같은 해 만들어진 상해 임시정부에선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정부의 활동상과 국민 계몽 등을 위해 같은 제호의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1919년 8월부터 1926년 11월까지, 무려 7년 동안 207호가 간행됐다. 조선 독립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매 호마다 관련 소식들을 부지런히 게재했다. 때때로 상해판 독립신문을 받아본 경기도내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의 불꽃을 태우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만큼이나 상해판 독립신문 역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사회를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언론 본연의 기능에 충실했던 신문이었다는 평이다.

■ 파주에 머무는 그 시절 치열했던 항일의 기억

1924년 10월 4일자 상해판 독립신문. 독립운동가 채찬 선생의 항일 운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내 유일본으로, 지난 2022년 대중에 공개한 바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1924년 10월 4일자 상해판 독립신문. 독립운동가 채찬 선생의 항일 운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내 유일본으로, 지난 2022년 대중에 공개한 바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상해판 독립신문은 연세대학교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국립민속박물관의 파주 수장고를 빌려 다수의 국가 문화 유산을 보관하고 있는데 독립신문도 마찬가지다. 상시 공개되지는 않지만 파주시 탄현면 일원에 100여년 전 치열했던 항일 현장의 기록들이 보관돼 있다. 연세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상해판 독립신문은 지난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문은 지난 2020년 각각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상해판 독립신문의 제작은 1919년 3·1 만세 운동과 무관치 않다. 그해 3월 전국 곳곳에서 항일의 열기가 불타올랐던 와중에, 3·1 만세 운동의 의미와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독립신보’가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만세 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던 인사들이 ‘우리 소식’이라는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후 같은 해 8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신문 제작 활동이 본격화됐다. 처음엔 ‘독립’이라는 제호로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발행됐다. 임시정부의 활동과 독립 운동 상황을 알리는 게 주 목적이었다. 임시정부의 기관지 성격이었지만, 신문사의 편집과 운영 등에선 임시정부의 간섭을 받진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일제의 견제가 지속됐다. 당시 일본 상해 총영사는 상하이를 관할하고 있던 프랑스 조계 당국에 임시정부는 물론 신문사 폐쇄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그 영향으로 같은 해 10월 25일자부턴 제호를 ‘독립신문’으로 바꿨다. 일제의 간섭만큼이나 경영난도 신문 제작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임시정부에서 보조금을 일부 지급했지만 역부족이었다. 3주가량 아예 발행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결국 발행일을 기존 화·목·토에서 화·토로 감축 조정했다. 그럼에도 끝내 1926년 폐간을 면치 못했지만,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겨가면서 이듬해인 1941년 복간됐다.

■ 지역 곳곳 항일의 불꽃 피운 독립신문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출범 후 제작된 상해판 독립신문의 창간호. 사장 겸 주필이었던 춘원 이광수가 창간사를 통해 자주 언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출범 후 제작된 상해판 독립신문의 창간호. 사장 겸 주필이었던 춘원 이광수가 창간사를 통해 자주 언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1919년 상해판 독립신문 창간 당시 사장 겸 주필을 맡았던 춘원 이광수는 창간사를 통해 ‘문명인의 생활에 언론기관이 필요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거국일치해 광복의 대사업을 경영하는 이 때 더욱 긴요함을 느낀다…외국의 신문이 천백 종이 있더라도 각기 자기 일에 몰두해 우리를 돌아볼 여유가 없고 우리의 사정과 사상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 국토에 일어나는 큰 사건이 외국인에겐 물론이거니와 우리 국민에게도 전해지지 못한다. 우리의 주의와 행동을 오해해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기도 한다. 우리의 사정과 사상은 우리의 입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본보의 창간은 능력이 커서 그런 게 아니고 부득이 해 그런 것이다. 이 책임으로 나섰으니 정성과 힘을 다해 분투하려 한다’고 했다. ‘사회의 공기(公器)’로서의 언론의 존재 가치, 그리고 독립을 위해 자주적인 언론이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이 이어졌지만 독립신문사는 창간사에서 선언한대로 많은 독자들이 신문을 통해 항일과 독립의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언제나 발로 뛰었다.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해 태극기를 내건 상하이 한인들의 모습과 임시정부의 기념식을 보도하는 등 3·1 운동이 나라와 민족에 갖는 의미를 되새긴 점 등이 단적인 모습이다. 항일 무장 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중국 간도와 만주 등에서의 독립군 활약상도 당시 국내에선 알기 어려웠지만 독립신문에 비교적 상세히 보도됐다.

‘수원의 유관순’으로 전해지는 독립운동가 이선경. 학생 비밀 결사 조직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며 상해판 독립신문을 마을에 배포, 항일 운동 상황을 알려 국민들이 독립의 의지를 다지게끔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해당 이미지는 상상도. /수원시 제공
‘수원의 유관순’으로 전해지는 독립운동가 이선경. 학생 비밀 결사 조직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며 상해판 독립신문을 마을에 배포, 항일 운동 상황을 알려 국민들이 독립의 의지를 다지게끔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해당 이미지는 상상도. /수원시 제공

국내 독립운동가들은 상해판 독립신문을 곳곳에 배포하며 항일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애썼다. 대표적인 인사가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이다. 수원 출생인 그는 이득수, 최문순, 임순남 등과 함께 학생 비밀 결사조직 구국민단(혈복단)에서 활동했다. 1920년 상해판 독립신문을 확보해 수원지역 마을에 배포하는 일을 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신문을 배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단원들이 매주 수원 삼일학교에 모여 배포 방안 등을 모색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려 했지만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고 끝내 숨졌다. 당시 독립신문은 이선경의 재판 관련 소식을 보도하기도 했다. 인천 강화군 출생 독립운동가인 유갑순도 임시정부 교통국에 속해있던 이원직 등과 함께 상해 독립신문을 국내에 배포하는 활동을 했다.

1925년 1월 1일자 상해판 독립신문의 4면.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의 선언서가 게재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내 유일본으로, 지난 2022년 대중에 공개한 바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1925년 1월 1일자 상해판 독립신문의 4면.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의 선언서가 게재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내 유일본으로, 지난 2022년 대중에 공개한 바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이선경과 유갑순처럼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붙잡혀 유죄를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21년 독립신문 배포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원직 등에 대한 그 당시 법원 판결문은 상해판 독립신문을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치안 방해의 행위를 선동하는 기사를 게재한 인쇄물’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해 직·간접적으로 조선 독립사상을 고취, 격려하고 또는 독립운동 자금의 제공을 권유하거나 혹은 혁명사상, 파격사상을 선동하는 기사를 게재한 신문’으로 명시하기도 했다.

숱한 고통과 희생에도 항일의 시간을 기록하고 전하려던 수많은 움직임은 결코 꺾이지 않은 채 200호 넘는 신문들에 담겨 독립을 향한 염원을 만들어냈고, 이윽고 광복의 기쁨을 이룩해냈다. 기억은 기록으로 남아 역사가 되고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돼 내일을 만든다.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