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36] 강화 솔정리 고씨가옥

강화도 3대 부잣집, 그 넉넉함이 묻어나는 한옥의 매력
{ 고씨가옥 : 인삼 무역업을 했던 고대섭이 1941년 건축 }

신상윤 기자

발행일 2016-09-08 제9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인천 고택기획 강화 월정리 고씨댁2
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은 강화 3대 부잣집의 하나로 알려진 곳으로 방앗간, 양조장, 인삼무역, 직조장 등을 운영했던 고(故) 고대섭 씨가 건축한 집이다. 이 집은 담장으로 둘러싼 건물을 중심으로 앞과 좌, 우 양 쪽에 3개의 창고 건물이 지어져 있어 당시 집주인의 재력을 가늠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왼쪽 흑백사진은 고대섭 씨가 운영했던 양조장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방앗간·양조장 운영 집안에 창고가 있을 정도
전통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 더해
가림막 설치해놓은 우물·서양식 목욕시설 눈길
아궁이 구멍있는 지

2016090701000443800019895
과거 농촌에선 '방앗간'과 '양조장'을 부(富)의 상징으로 여겼다. 곡식이 귀했던 시절, 누렇게 익은 볍씨가 하얀 쌀로 태어나는 방앗간과 쌀겨로 구수한 막걸리를 제조하는 양조장은 풍요로움을 의미했던 것이다.

강화도와 같이 육지와 떨어져 있는 섬에도 방앗간과 양조장이 부를 대표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강화도에는 홍씨, 김씨, 고씨 등 3대 부잣집으로 일컫는 부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인천 고택기획 강화 월정리 고씨댁28

방앗간과 양조장을 운영했던 강화 고씨(高氏)가 살던 '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도 이 중 하나다. 인천 강화군 강화대로 674번길 23의 4(송해면)에 위치한 고씨 가옥은 강화고인돌체육관에서 강화대로를 따라 600여m를 가다 송해우체국을 지나 우측으로 200여m를 가다 보면 넓은 대지 위에 있다.

이 집은 강화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일본과 중국 등으로 인삼 무역을 했던 고(故) 고대섭이 1941년 지은 걸로 알려져 있다.

지난 2일 오전 고대섭의 증손자 고영한(34) 씨로부터 고씨 가옥에 대한 상세한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고영한 씨는 "증조부께서 인삼무역을 하면서 중국, 일본 등을 비롯해 서울·개성·제주도 등 국내외를 많이 다니셨다고 들었다"며 "이 집은 증조부께서 어느 날 개성에 사업차 방문을 했다가 봤던 집이 마음에 들어서 그 집을 똑같이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고씨 가옥은 목조로 지어진 주택으로,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이 도입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씨 가옥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이어진 담장을 따라 좌·우측 등 3면에 문을 냈고, 안쪽으로는 마당을 중심에 두고 '기역(ㄱ)'자 형 안채와 '니은(ㄴ)'자 형 사랑채 등이 둘러싼 '미음(ㅁ)'자 한옥을 하고 있다.

솟을대문과 맞닿아 있는 곳에는 과거 방앗간으로 사용했다는 청색 슬레이트의 지붕 건물이 있다. 현재 이 건물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니은(ㄴ)'자 형태의 사랑채가 나타나는데, 사랑채에 있던 누마루는 수십 년 전 화재로 소실됐다.

고씨 가옥을 지을 때 사용한 돌과 상량문 등의 목재는 황해도에서 공수했다고 한다.

고영한 씨는 "증조부께서 집을 짓기 위해 건축 재료를 전부 황해도에서 배로 실어 날랐다고 하더라"며 "당시 건축 자재를 실어 날랐던 사람들에게 '배를 타고 오는데 이 집을 지을 터에서 도깨비 불빛이 올라와 돈을 많이 벌겠구나 하는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인천 고택기획 강화 월정리 고씨댁7
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은 개성에 있는 한옥을 본 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고씨 가옥은 화려한 창틀과 별도의 목욕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미뤄봤을 때 고대섭 씨가 상당한 재력을 쌓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중정, 대청 등이다.

고씨 가옥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에 중정(中庭)을 드나드는 출입구가 있다. 또 다다미가 깔렸던 일본식 다실(茶室)도 있다. 마당에는 깊이가 10m가량의 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기역(ㄱ)'자 형태의 가림벽이 세워져 있었다. 이 가림벽은 외부에서 우물에서 빨래 등을 하는 여성들을 볼 수 없게 가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씨 가옥의 특징 중 하나는 땅을 2m가량 파낸 후 지은 점이다. 기단 아래에 펼쳐진 지하 공간에는 각 방마다 놓인 온돌을 데우는 아궁이 구멍이 있었으며,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집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고씨 가족은 한국 전쟁 당시 지하에 숨은 뒤 내려오는 계단을 철문으로 봉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울러 고씨 가옥의 별채에는 서양식 목욕시설도 설치돼 있는데, 설치연도는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지름 1.5m 규모의 무쇠솥이 마치 지금의 현대식 욕조와 같은 역할을 했다. 건물 밖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데울 수 있었다.

고영한 씨는 "증조부께서 방앗간을 하신 뒤로 양조장, 인삼재배, 직조공장 등을 크게 하면서 사업이 번성했다고 옛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며 "당시 강화도에 이 정도의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집을 대궐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인천 고택기획 강화 월정리 고씨댁15
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은 개성에 있는 한옥을 본 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고씨 가옥은 화려한 창틀과 별도의 목욕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미뤄봤을 때 고대섭 씨가 상당한 재력을 쌓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욕실, 안방과 부엌 등이다.

도윤수 동국대학교 불교건축문화연구소 연구원은 "강화 솔정리 고씨 가옥은 기존 강화에 토착 세력이 거주했던 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부유한 건축 양식이 눈에 띈다"며 "창문이나 난간 등에 장식을 한 것들이 서울이나 개성 등 특정 지역의 부유한 상인들의 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식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화의 기존 민가들은 집 안에 창고를 들일 만큼 집을 크게 짓지 않았는데, 고씨 가옥은 담장 내 방앗간과 양조장 등을 운영했던 건물을 보유하고 있을 만큼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강화도가 고인돌과 돈대를 중심으로 한 관방유적 등을 중심으로 역사적 평가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데, 내륙과 달리 선사시대 때부터 강화에서는 건축 행위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며 "강화에 있는 주택들을 개별 건축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화했는지 조명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고씨 가옥은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 양식이 혼합되면서 당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지난 2006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됐다.

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신상윤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