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5]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김윤철 할아버지 (2)

고산지대에 둘러쌓인 북청평야… 통태와 북청 물장수의 고향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김윤철 할아버지
북청 출신 실향민 김윤철 할아버지가 피란을 떠나기 전 고향의 풍경과 어린시절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삼면이 산간벽지 남쪽으로 펼쳐진 동해
신북청면 양가리서 대대로 논농사 지어
농한기엔 부업으로 말린 명태껍질 벗겨

혹한 견디기 위한 아궁이 깊은 가옥형태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호랑이·표범 등장
대보름즈음 '북청사자놀음' 펼쳐지기도


오랑캐 침범 끊이지 않은 탓 단결력 좋고
자녀 학비 위해 물장수 활동 교육열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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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85) 할아버지가 태어난 함경남도 북청군은 한반도 산간벽지의 대명사로 꼽히는 '삼수갑산(三水甲山)'의 양강도 갑산에서 남쪽으로 168리(약 66㎞) 떨어져 있다. 해발 1천m가 훌쩍 넘는 고산지대가 북·동·서 방향으로 3면을 둘러싼다.



북쪽 후치령(해발 1천335m)에서 발원하는 남대천(南大川)이 중앙부를 가로지르는데, 남대천 주변으로는 산지가 대부분인 함경도에서 보기 드문 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는 동해를 끼고 있다. 이 때문에 북청사람들은 동해를 남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청군 신북청면 양가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할아버지 집안은 북청평야에서 논농사를 지었다. 북청평야의 젖줄인 남대천은 10대 초반 할아버지에게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남대천 양옆으로는 죄다 논밭이었어요. 여름이면 남대천에서 친구들과 목욕하거나 천렵하면서 놀았는데, 팔뚝을 강물에 담그고 가만히 한 20~30분 있으면 칠성장어가 달라붙어 살을 빠는 거예요. 팔을 쓱 꺼내면 한두 마리는 건졌죠. 논도랑에서 잡은 세추내(미꾸라지의 함경도 방언)를 고추장 풀어서 콩비지처럼 푹 끓여 먹는 세추내장도 맛이 기가 막힌데, 요즘 추어탕집은 그 맛을 못 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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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북청군 위치
북청은 빠르면 10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무르팍까지 쌓이는 건 예삿일이고, 많이 내리는 날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할아버지의 허리춤까지도 쌓였다. 북청군지편찬위원회가 1994년 발간한 '북청군지'에 따르면, 1927년 북청군의 평균 최저 기온은 12월 영하 8.2℃, 1월 영하 11.5℃, 2월 영하 8.6℃, 3월까지도 영하 4℃를 기록했다.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외양간을 마주 보고 부엌과 마루가 결합한 형태의 정지방(정주간)이 있고, 그 옆으로 큰방과 작은방, 창고방이 '밭 전(田)자'로 붙어있는 '일(一)자형' 초가집이었다. 온돌은 정지방·큰방·작은방이 하나로 연결돼 있어 불을 멀리 보내기 위해 아궁이가 깊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북청까지 올라왔을 때 인민군이 숨어 지냈을 정도로 아궁이가 깊었다"고 표현했다. 혹한을 견디기 위한 전형적인 함경도식 가옥형태다.

할아버지 고향에서는 겨울이면 집집마다 울타리에 명태를 걸어서 말린 '통태'(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통째로 말린 명태)를 먹었다. 북청군 신포읍(1960년 신포시로 승격)과 인근 마양도는 해방 전까지 전국 명태 어획량의 85%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 명태 산지였다.

농번기가 지나면 명태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부업으로 삼았는데, 20마리를 벗기면 1마리씩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네 친구들과 화투 노름의 하나인 속칭 '섰다'를 하면서 따낸 통태를 화로에 구워 먹으며 기나긴 겨울의 심심함을 달랬다.

화투가 없어서 하얀 천 쪼가리에 계란 흰자를 발라 광택을 내고, 각각의 패를 상징하는 간단한 그림을 그려서 만들었다.

"통태가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부풀어 오르는데, 손으로 꽉 쥐었을 때 딱딱하지 않고 살짝 물컹한 느낌이 들면 잘 된 거예요. 그걸 구워다 먹고 입안이 깔깔하면 무를 한 입 베어 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요."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은 1960년대 고향과 기후가 비슷한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 명태 덕장을 세웠고, 현재는 전국의 황태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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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겨울에는 무명 솜바지를 입으면 최고로 잘 입는 것이라고 했다. 개털로 만든 남바위(방한모)는 필수품이었는데, 함남지방의 명물인 풍산개의 털로 만든 게 인기가 많았다.

산짐승도 먹을 것이 떨어지는 겨울은 참새잡이를 하기에 제격이었다. 가끔 굶주린 노루가 산에서 집까지 내려오기도 하는데, 절대로 잡지 않고 오히려 잘 먹여서 돌려보내는 게 마을 풍습이었다. 반면 멧돼지가 민가로 내려올 경우엔 보양식 삼아 잡아먹었다.

일제강점기 초기 만해도 북청에는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가 살았다. 1917년 말 한국 호랑이 사냥에 나섰던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 1873~1927)의 '정호기(征虎記)'란 책을 (사)한국범보전기금에서 발굴해 2014년 새로 발간한 것을 보면, 북청에서는 당시 야음을 틈타 표범과 호랑이가 마을에 나타나 습격하고는 했다.

실제로 야마모토 일행이 미끼로 내놓은 돼지가 잡혀먹히기도 했으며, 북청평야에 우뚝 솟은 동덕산(750m)의 정상 부근 바위굴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호랑이굴이었다.

정월대보름 즈음에는 북청읍내나 도청(都廳·마을회관을 일컫는 함경도식 표현) 마당에서 '북청사자놀음'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큰 원형을 이루면서 둘러앉으면, 그중 몇 사람이 한복판으로 들어가 북 장단과 노래에 맞춰 춤판을 벌이는 '돈돌라리'는 북청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민속놀이였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쯤 유행했던 '이 강산 서산에/ 해가 떨어진다/ 얼씨구나 잘한다/ 재미가 쓰러진다'라는 내용의 돈돌라리 노래 가사를 특히 좋아했다. 노랫말 중 '해가 떨어진다'는 표현은 일장기의 해가 지면서 일본이 망하고,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였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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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겨울의 북청평야. 출처/'정호기(征虎記)'(2014, 에이도스)

북청은 '북청 물장수'로 상징되는데 이는 단결력과 교육열 등 특유의 지역색이 짙은 걸로 이어진다. 북청 물장수들은 조선 말엽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울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하면서 식수 영업권을 독점했다. 그 북청 물장수들 뒤에는 반드시 '서울 유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자기 자식은 물론이고 이웃 자녀의 학비마저 보태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북청군지'는 설명하고 있다.

4남1녀 중 넷째인 김윤철 할아버지의 큰형은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에 있는 와세다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수재였다고 한다. 당시 신북청면에서만 와세다대학교 합격생을 7명이나 배출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1876∼1949)도 '백범일지'에서 스무 살 청년이던 1895년 청나라 여행길에 들른 북청을 '문화향(文華鄕)'이라 부르며 교육열을 높게 평가했다.

동향끼리 똘똘 뭉치는 북청사람의 기질은 예로부터 오랑캐의 침범이 끊이질 않던 지정학적 위치와 관련이 깊은 듯하다. 살아남기 위해선 마을 사람 간 단결이 중요했을 터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1681~1763)이 쓴 '성호사설'은 북청이 기원전 6∼5세기 만주 북동부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숙신(肅愼)족에게 여러 번 함락됐다고 전하며, 조선 중기에 나온 관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도 오랫동안 여진(女眞)족에게 점거돼 오다가 고려 예종(재위 1105~ 1122) 2년에 이르러 몰아냈다고 밝히고 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범도 잦았다.

북청이 오죽 벽지로 소문났으면,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1556~1618)이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를 떠날 때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시를 지었다. 이항복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유배지 북청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항복의 시를 소개하며 "시를 욀 적마다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했다.

서울에 살던 북청사람들은 1947년 북청군민회를 창립했는데, 북청군민회관은 현재 서울 강남에서도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청담동에 있다.

'강남 부동산 개발 1세대'라 불리는 북청 출신 김형목(1928~2003) 전 학교법인 해청학원 이사장이 자신이 소유한 토지와 비용을 기증해 1974년 건립했다. 군 단위 이북5도 단체에서 자체 회관을 마련한 것은 북청군민회가 처음이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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