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내내/무늬도 근사한 말벌 집을 품고 있던/저 나무,//지금/살아온 날들의 빛깔로/단풍 드는 중이다//저 많은 잎들도/추억 따라/단풍 드는 품새가/다 다르다//빈 말벌 집을 매단 채/깊은 가울 풍경이 된/저 나무,//그 풍경 안에/멋진 늦가을 한 분도/계신다'(박서혜, 멋진 늦가을)
인천 도심의 생활을 접고 강화로 이주해 마니산 자락에 터를 잡고 15년을 보낸 박서혜 시인이 펴낸 여섯 번째 시집이다.
시집은 ▲빈손, 환하다 ▲어디쯤일까 ▲개기일식 등 3부에 걸쳐 55편의 시와 시인이 남기고 싶은 순간을 포착한 사진 10여 작품을 함께 담았다.
강화로 이주해 그곳의 바람과 땅과 나무, 이웃을 오롯이 담아낸 첫 시집인 전작 '마니산 자락'(2011년 다인아트 刊)과 마찬가지로 강화의 풍경은 여전히 작품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지만 시인의 시선이 한층 더 깊어져 있음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강화로 터를 옮긴 지 15년이 지났음에도 시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강화의 풍광은 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에서 길어올리는,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재발견해 내는 작가의 시선이 참 따뜻하다.
1946년생인 고령의 시인이 세월에 대한 회한이나 사무침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이번 시집의 특징인데, 달관에 가까운 담담함, 뭔가에 사무치지 않아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시인의 여유로움이 곳곳에 배어난다.
정지은 문화평론가는 "누군가에게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의 또 다른 변주가 아니라, 강화라는 현실에 단단히 발 붙이고 있는 생활인의 이야기이기에 가능했다"며 "시인이 그리는 풍경이 옛 시절의 회상이나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생생한 현재"라고 평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