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종로 한복판 독립투사의 거점 '조선여관'
보신각 인근 강화 출신 주인이 운영
임정 관계자 접촉장소 등 기록 눈길

2019111301000929000044541
일제강점기 강화도 사람이 서울 종로에 차린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아지트'였다는 기록들이 있어 주목된다.

특히 조선여관은 강화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출신 유경근(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적통으로 내세운 해외 망명정부와 제2차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했던 '대동단'의 주역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 총책 역할도 한 독립운동가다.



유경근이 활동거점으로 삼으면서 비밀리에 여러 독립운동가를 접촉한 장소는 서울 종로 관철동 보신각 근처에 있었던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은 조선여관에서 이동휘가 이끄는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하고,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을 꾸렸다.

1919년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진 유경근의 심문조서를 보면, 판사는 유경근에게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획책소가 아니냐고 물었다.

유경근은 "여관 주인이 강화도 사람이라 강화 사람들은 그 여관에서 묵으므로 그곳에 가면 고향의 사정을 알 수 있어 자주 갔다"고 했다.

유경근이 체포된 이후 연통제 조직을 맡았던 강화 출신 윤종석(1896~1927)의 심문조서에도 판사가 조선여관은 경성에서의 조선독립운동본부가 돼 있었다고 언급한다. 윤종석은 "그러한 사실은 모른다"고 답했다.

조선여관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잇는 장소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특파원인 명제세(1885~?)가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유경근과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중국 톈진에서 국내로 입국해 찾아온 곳도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이 독립운동을 논의할 안전한 장소로 조선여관을 택한 것은 여관 주인과 '동향'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관철동 조선여관에서 1920년 9월께 일제 앞잡이 처단 등을 목표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무장계획단' 조직이 논의됐다는 기록도 당시 판결문에 나왔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10일자에는 평남경찰서 경찰이 의열단원을 잡기 위해 경성에 들어와 관철동 조선여관을 포위하고, 투숙 중이던 의열단원 1명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앞서 1923년 1월 의열단원인 김상옥(1890~1923)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시기 의열단원이 종로 한복판에 있던 조선여관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경인일보 포토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박경호기자 기사모음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