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기지 80년 부평, 그 시작과 끝·(1)]영욕의 역사 뒤로한 채 '인천 떠나는 미군'

미군 상륙과 맥아더동상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9-12-16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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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관련
15일 오전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하부에 맥아더 장군과 부관들이 보트에서 내려 얕은 해변을 걸어서 상륙하는 부조가 설치되어있다. 사진으로도 남은 이 유명한 장면은 실제로 인천이 아닌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레이테섬 탈환 작전 모습이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1871년 신미양요때 강화에 '첫 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 역전 불구
월미도 등 대규모 인명피해도 남겨
탈환 부조도 잘못 묘사 바로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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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미국은 인천 부평 캠프마켓을 포함한 미군기지 4곳을 한국에 반환했다.

미군이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 38도선 남쪽으로 진주해 부평에 있는 일본군 군수공장(일본육군조병창)을 미군기지로 접수한 지 74년 만이다.

일제의 조병창 조성시기까지 거슬러 무려 80년 동안 부평은 일본과 미국의 군수기지였다.

인천에서 완전히 떠나게 되는 미군이 처음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곳도 인천 강화도였다.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많이 떠올리지만, 미군의 첫 상륙은 1871년 4월 '신미양요'다.

미군은 수년 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서 불에 타 침몰한 사건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해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신미양요로 강화에서 수많은 조선군이 전사하고, 민가가 방화·약탈 피해를 당했다. 한국과 미국 사이의 역사상 첫 교전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1893~1963) 중장이 이끈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서 두 번째로 한반도에 상륙했다.

미군은 1948년 8월 15일 남한이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3년 동안 38도선 남쪽 지역을 통치했다. 1949년 6월 한반도에서 잠시 철수한 바 있는데, 이때도 인천항을 통해서였다.

미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다시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불리했던 한국전쟁의 초반 전세가 일거에 뒤집혔다.

이때 인천 월미도는 초토화 되고, 인천항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월미도에서는 주민만 1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북한군보다 월미도 주민의 인명피해가 훨씬 더 컸다.

1957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해 인천 중구 만국공원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1880~1964)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공원 이름이 '자유공원'으로 바뀐 것도 이때다. 동상 하부에는 맥아더와 부관들이 해변을 걸어서 상륙하는 장면을 표현한 부조작품이 붙어 있는데, 지금껏 인천상륙작전의 실제 장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이 유명한 장면은 실제로 인천이 아닌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레이테섬 탈환 작전 때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자 인천상륙작전 때 주요 거점으로 활용됐던 팔미도 등대 전시관에도 맥아더의 필리핀 레이테섬 상륙작전 사진을 인천상륙작전인 것처럼 엉뚱하게 표현했다.

미군기지가 철수하는 지금, 이를 인천 상륙 당시의 것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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