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리얼리티

[판교 리얼리티·(2)기회]판교직장인의 기쁨과 슬픔①

만원버스에서 피어나는 '유니콘 기업'의 꿈…사람숲에서 기회를 낚다

6일 아침, 판교역 앞 버스장류장에 버스들이 줄지어 선 가운데 직장인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순환 출퇴근 마을버스 602-1B·2B 정류장

22인승에 80여명 태우고 출발 '만원 행렬'

■출근전쟁… 602-2B 버스 탑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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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3일 오전 8시30분. 

 

판교역에 도착한 신분당선 출입문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뛰기 시작했다. 

 

함께 달리며 "왜 뛰냐"고 묻자 "마을버스를 타야 된다"는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뛰는 이들을 쫓아가니 '602-1B·2B번 맞춤형 마을버스' 정류장. 판교역과 판교테크노밸리를 순환하는 출퇴근 버스 노선인데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602-1B번은 만원상태로 떠나는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고, 막 도착한 602-2B번 버스는 출입문 계단까지 가득 찬 앞문을 피해 뒤쪽 출입문으로 겨우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었다.



이미 전 정거장(판교역 남편)에서 승객을 34명이나 태우고 온 이 22인승 버스는 기자가 탄 판교역 서편 정류장에서 46명을 더 태우고서야 출발했다. 몸과 몸이 밀착한 버스 안에 뒷사람의 숨소리를 피해 나갈 공간은 없었다.

다음 정류장인 'H스퀘어'에서 40명 가까이 내린 뒤에야 간신히 숨통이 트였고, 여러 기업이 입주한 '이노밸리' 앞 정류장에서 20명 넘게 더 내리자 비로소 빈자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버스는 마지막 역인 판교테크노밸리 서북쪽에 있는 '세븐벤처밸리'를 돌아 다시 판교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막 신분당선에서 내린 승객들로 금세 다시 만원이 된다. 쉼 없이 달리는 만원 마을버스의 행렬 속에 판교의 아침이 지나갔다.


구독경제 기반 면도날 렌탈·판매 스타트업 '와이즐리'
'출퇴근 지옥'에 인력유출 막고자 이사… "돌아오고 싶어"

■이탈… 나는 왜 판교를 떠났나




구독경제에 기반한 면도날 렌탈·판매 스타트업 '와이즐리'가 1년 반 만에 판교를 떠난 것도 출퇴근이 화근이었다.

와이즐리는 2017년 3월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김동욱 대표와 친동생, 김 대표의 친구 이렇게 셋이서 의기투합해 출발했다. 

 

이들이 방구석을 탈출해 판교 스타트업 캠퍼스에 입성한 건 2018년 3월. 모두 설립한 지 불과 3년여 만에 유망 스타트업으로 주목받았다. 김 대표에게 판교는 '기회의 땅'이었다.

창업초기 발판이 돼 준 판교와 작별을 고한 건 지난해 8월이다. 와이즐리는 서울 왕십리로 사무실을 옮겼다. 사업이 탄력을 받으며 직원 수가 18명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서로 뜻만 맞으면 됐던 초창기와 달리 늘어난 직원들의 근무환경과 복지도 고민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매일 아침저녁, 출퇴근 지옥을 겪어야 하는 직원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울며 겨자 먹기로 판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스타트업은 우수한 인재 확보가 생명이다. 인력 유출을 막으려면 직원 복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스타트업이 해줄 수 있는 복지라는 게 출퇴근이라도 여유있게 하는 거다. 테크노밸리 근처엔 직원들이 혼자 살 만한 주거공간도 없어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직원들의 고생이 컸다. 출퇴근 시간이 '1시간30분'이 넘게 걸리는데, 솔직히 직원들 볼 면목이 없었다."

판교역 근처로 사무실을 옮길까 고민도 했지만, 이제 막 자리 잡은 스타트업이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도 못 됐다. 

 

6일 아침, 판교역 앞을 출발하는 버스에 직장인들이 빼곡히 탑승해 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굳이 마을버스를 안 타도 되는 판교역 주변으로 사무실을 알아봤지만 이미 대기업들이 꽉 차 있었고, 그나마 임대료가 비싸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판교의 스타트업 지원은 이제 막 창업을 시작한 초기에만 집중돼 비즈니스 모델이 형성되는 시기의 스타트업이 갈 자리가 없다."

실제로 테크노밸리 내에는 '판교 스타트업 캠퍼스'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등 창업을 시작한 이들에게 공간과 컨설팅, 투자 등을 지원하는 공간이 있지만 '예비·초기 창업(BI·비즈니스 인큐베이터)'에만 집중됐다. 

 

심사를 통해 선발된 스타트업은 대부분 30㎡ 내외 작은 사무실을 임차하는데, 와이즐리와 같이 '3년 이상 창업(포스트 BI)' 기업은 20명 이상 직원이 늘어나면 그만한 공간을 임차하는 일이 쉽지 않다. 

 

김 대표는 "공공에서 지원하는 사무실은 공간이 작다. 일반 오피스를 임차하면 인테리어, 사무집기 등 부수 비용이 부담된다. 서울에는 우리 정도 스타트업들이 입주할 공간이 꽤 있는데 20·30대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인테리어가 완비된 사무실을 빌려준다. 그게 '공유 오피스'"라고 말했다. 


초기 창업에서 어엿한 기업의 형태를 갖춰가는 과정은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가 꿈꾸던 미래 모델인데, 교통과 사무실 임차 등 현실적인 문제가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그럼에도 여전히 김 대표는 판교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 

 

"판교는 사무실 근처에 산도 있고 공원도 있어 점심시간, 또는 머리가 복잡할 때 산책도 할 수 있다. 쾌적한 근무환경을 모두가 좋아했고 아이디어도 잘 나왔다. 서울과의 접근성이 뛰어난 것도 너무 좋다. 언젠가 판교로 돌아가고 싶다." 

 

대형 IT 기업들이 밀집한 판교 테크노밸리 중심가. 대중교통이 불편해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유동인구가 적다. /강승호기자 ksh@kyeongin.com

김 대표의 소망처럼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이들에게 판교는 '창업하기 좋은 곳'이다. 

 

공공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서울의 고급 인력들이 판교를 '마지노선'으로 출퇴근하고 있어 매력은 여전하다.

탄성 파우치 용기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이너보틀'의 오세일 대표는 "판교의 장점은 '구룡터널'만 지나면 회사에 올 수 있다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판교는 서울 강남에서 오가기 편하고 안산 등 경기 서부권, 화성 등 경기 남부권으로 이동하기 편하다"며 "스타트업은 인재를 잘 구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판교는 구인이 잘 된다"고 설명했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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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팀

글: 공지영차장, 신지영, 김준석기자
사진: 임열수부장, 김금보기자
편집: 안광열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
그래픽: 박성현, 성옥희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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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s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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