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중독자'였던 아버지의 그늘
차단할수록 옥죄는 부모 형제 굴레
가족, 끊는다고 끊어지지 않는 운명
마음 열고 받아들이면 삶의 안식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부러워했습니다. 어느 한 가지인들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삶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모르는 괴로움을 간직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습니다. 단순히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음주 후에는 항상 폭력이 따랐습니다. 그의 유년시절부터 상습적으로 어머니를 폭행했고, 어린 그와 동생들도 무차별적으로 손을 댔습니다. 그가 그토록 공부에 매진한 것도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굳은 의지로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해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두 동생은 가정 폭력의 트라우마로 성인이 되어서도 좀처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무위도식하는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지금도 매달 두 동생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내 모르게 동생들을 챙기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이 정도는 참고 견딜 만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에 두어 번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는 그를 고통으로 내몰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폭행했고, 참다못한 어머니는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아내와 자녀들에게 너무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모형제와 지금의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노력 끝에 이룬 자신의 가정이 부모와 형제들로 인해 망가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차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차단하면 할수록 부모형제의 굴레는 강하게 자신을 압박했습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날이 계속되다 보니 불면증과 우울증이 찾아왔고, 급기야 약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좋은 집에 고급 승용차도 더 이상 뿌듯하지 않았고, 주말에 골프를 치러 나서도 기분만 더 가라앉았습니다. 그 어떤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무슨 일을 해도 재미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별반 다를 게 없는 나날이 그를 조금씩 병들게 했습니다.
가족은 운명입니다. 끊는다고 끊어지지 않습니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모는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부정합니다. 꽤 긴 날을 한탄하고 우울해 하다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자신의 인생 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남보다 조금 부족한 그 아이가 자신에게 사랑을 알려주고, 살아가는 보람을 안겨다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그도 이제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를 인정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는 어머니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트라우마로 사회에 적응 못하는 형제를 더 이상 부끄러워해선 안 됩니다. 가족은 객체인 듯 보여도, 한 나무에서 자란 가지라는 걸 살면 살수록 깨닫게 됩니다. 아내와 자녀들도 그의 슬픔과 괴로움을 알아야 합니다. 용기를 내 부모형제와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더 이상 삶의 무게를 혼자 견뎌서는 안 됩니다. 가족은, 피하고 외면할 때 속박과 굴레이지만,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때 세상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든든한 안식처이자 버팀목이 됩니다.
가족의 치부를 드러내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감추고 외면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내 인생의 일부로 생각하고 살다 보면, 현실이 바뀌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 삶이 망가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장애인 부모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평생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거고, 삶의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