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콤플렉스
[통 큰 기사-컬러콤플렉스 인터뷰 전문]아들의 커밍아웃 받아들인 강선화씨 가족
"목구멍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꺼내기 힘든 말" 숙제 마친 기분
어떤 분 내 품에서 눈물만 "프리 허그에서 받은 힘으로 1년 버틴다"
4년 전 아들 정예준(25·오른쪽)씨가 가족들에게 자신이 성 소수자임을 밝혔을 때 어머니 강선화(52)씨는 큰 충격 속에서도 아들을 품고 이해하기로 했다. 아들의 고백 이후 가족들은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등 성 소수자를 대변하는 '인권 운동가'로도 활동 중이다. 지난 18일 고양 일산에서 만난 선화씨는 "우리 사회가 성 소수자들이 마음 놓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도 불편함이 없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020.10.26 /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
Q. 예준 씨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언제 처음 느꼈고, 부모님께 왜 커밍아웃을 했나.
A.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아이를 짝사랑하면서 성 정체성을 깨달았다. 아무리 애써도 그 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애를 피해 다녔지만 그 아이를 잊으니 또 다른 남자아이에게 두근거렸다. 그때 마침 성 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웹툰을 봤고 내가 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게이'나 '동성애자'같은 단어는 목구멍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부모님은 모두 훌륭한 분들이셨지만 부모님에게조차 말하기 무서웠다. 그래서 어느 공간에서든 만성적으로 답답함을 안고 살았다.
20살이 돼서야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했다. 그런데 별일 아니라는 투로 반응했다. '뭐 어쩌라고'라는 식이었다. 이후 1년간 거의 모든 친구들에게 커밍아웃했다. 내 성 정체성이 바뀌지 않는 이상 부모님에게도 커밍아웃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면전에 대고 말하면 격앙될 것 같아 편지를 썼다. 한 달 간 썼다 지우다 하면서 설득될 만한 표현을 찾았다. 내가 어떤 자기 부정의 시간을 지나서 부모님을 믿고 커밍아웃하는지 표현했다. 그렇게 2016년 7월 '이번주 목요일에 중대발표를 한다'고 예고한 후 식탁에 편지를 올려두고 친구 집으로 피신했다.
Q. 선화 씨는 커밍아웃 당시 느낌이 어떠셨나.
A. 4년 전 일인데도 아직도 그날 기억이 생생하다. 너무 충격이었다. 직업이 항공승무원이어서 다음날 미국으로 떠났는데 비행기에 타고 나서 호텔방에 도착해서까지 48시간 가까이 잠을 못 이뤘다. 예준이가 준 '성 소수자 부모 인터뷰집'과 '성 소수자 부모를 위한 가이드북'은 차마 펼쳐보지 못했다. 용기가 안 났다. 내가 받아들이면 예준이가 다시는 다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런 태도가 바뀐 건 예준이가 컴퓨터 바탕화면에 내려받아 놓고 간 영화 '바비를 위한 기도' 때문이었다. 영화 주인공 바비는 부모가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내가 멍 때리고 있다가는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준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엄마에게 시간을 주면 좋겠다. 어떻게든 잘 헤쳐나가고 싶은데 아직은 힘이 든다'는 내용이었다.
불현듯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그동안 아이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예준이는 그야말로 '학교에 겨우 다녔다'고 할 정도로 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고 친구도 많이 없었는데 그게 성 소수자였기 때문이었나 하고 짐작해 봤다. 아이는 중학교 3학년 시절 기술을 배우겠다며 대학과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겨우 설득해서 인문계고등학교에 보냈는데 학교에선 자고 기술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새 기술학원 숙제하고 게임을 하는 등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했다.
그래도 우리는 비교적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정체성에 대해서만큼은 속 시원히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한국 사회가 게이를 못 받아들이니 부모도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Q. 예준 씨는 커밍아웃 후 어떤 기분이 들었나.
A. 1분에도 몇 번씩 감정이 바뀌었다. '내가 왜 이처럼 힘든 일을 겪어야하나'라는 분노와 함께 '어쨌든 중요한 숙제를 마쳤다'는 후련함이 들었다. 한편으론 슬프기도 했다. 편지를 남긴 직후엔 친구와 PC방에 갔다가 찜질방에 갔다. 게임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폭언을 듣거나 집을 나와 혼자서 제2의 삶을 꾸리는 상황 등을 상상했다. 이미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해 1년 간 500만원을 벌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걱정이 많이 됐다.
Q. 이후 가족끼리 언제 재회해 어떤 말을 나눴나.
A. (아이)아빠랑 둘이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입을 떼기가 두려웠다.
커밍아웃 나흘 만에 귀국해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남편과 예준이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연애는 했니' 등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는 커밍아웃 3일 만에 부모모임에 나가서 위로와 지지를 받고 와서 이미 괜찮아진 상태였다.
Q. 어떤 과정을 거쳐 예준 씨의 성 정체성을 이해하게 됐나.
A. 처음엔 거짓 죄책감이 들었다. '예준이가 성 소수자가 된 게 혹시 내 탓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예준이에게 '엄마가 너를 이렇게 낳아 힘든 인생을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예준이는 '그것도 나에겐 상처가 된다, 내가 게이가 된 게 엄마 잘못도 아닌데'라고 했다. 순간 부모의 죄책감이 아이에겐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가급적 죄책감을 자제하려 노력했다. 어찌 됐든 부모로서 자식을 행복하게 살게 해 주는 게 내 목표라고 생각했다. 커밍아웃 한달 후인 8월부터는 부모모임에도 참석했다. 아이 아버지는 커밍아웃 3일 만에 모임에 참석해온 상태였다. 처음에 한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는데 내 차례가 되자 '저는 한달 전에 아들이 게이라고...'하면서 말을 못 잇고 계속 울었다.
Q. 커밍아웃한 뒤 어떤 차별을 겪었나.
A. 혐오의 말은 늘 듣는다. '부모가 저 모양이니까 자식이 저렇지'하는 말들이다. 지난해 인천 퀴어 퍼레이드에 부모 모임 회원 자격으로 참석했을 때 그런 말을 들었다. 동성애 혐오 세력이 우리를 에워싸거나 멱살을 잡고, '부모모임' 명칭이 쓰여 있는 티셔츠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땅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했다.
네티즌 또한 아들에 대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한다. 어쩌다 유튜브를 한번 찍으면 댓글이 폭격 수준이라 소송을 생각할 정도다.
일상에서도 차별의 시선이 있다. 예준이가 애인과 길에서 손잡고 뽀뽀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아이는 오히려 그걸 즐긴다. 그러나 부모로서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혹시라도 예준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폭행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Q.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건가.
A. 그렇다. 한국에서 성 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을 못 하는 이유가 '힘들게 살까봐' 이다. 차별금지법이 있으면 사회안전망이 생기니 아무래도 이런 걱정이 덜할 것이다. 캐나다에 잠깐 있다 왔는데 그 나라 부모들은 자식이 커밍아웃을 해도 우리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해고당할 우려 등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나라 아이들은 13~14살에 일찌감치 커밍아웃을 한다고 한다. 아이도 부모도 덜 힘들다.
Q. 그런데 왜 법이 제정되지 않는다고 보나.
A. 정치인의 표 계산 때문이다. 특정 종교나 정치 계파가 차별금지법에 항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어찌 됐든 자기 지역구에서 또 해먹어야 하는 게 정치인들이다. 예전에 부모모임에서 국회의원실을 방문해 자료를 전달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해 볼까 했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정치판 뚫기는 역시 힘들었다. 그 와중에 기득권을 내려놓고 소신 있게 차별금지법 찬성 발언을 해 주는 장혜영 의원 등에게 감사하다.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진정으로 고민하는 정치인도 있다고 느꼈다.
Q. 차별금지법 이외에 어떤 수단이 필요한가.
A. 학교 성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선생님 중에서도 성 소수자를 잘 몰라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2011년 조사에서 성 소수자 비율은 3.8%였다. 성씨 중 '강 씨' 보다 많은 수치다. 이들의 존재를 알릴 기회가 정규 교육 과정에 없는 것이다. 이미 장애인에 대한 교육은 정규 교육에서 이뤄지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 소수자에 대한 교육은 아직 학교에서 못 한다.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다. 여학생은 치마 교복을, 남학생은 바지 교복만 입을 수 있는 제도 등을 고쳐 성적 다양성을 허용해야 한다.
Q. 예준 씨의 커밍아웃과 성 소수자 부모모임이 선화 씨의 삶에서 어떤 의미였나.
A. 처음엔 그저 '우리 아들이 좋아하니까' 부모모임에 단순히 참석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남편과 함께 시간이 날 때마다 성 소수자 관련 집회에 참석한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서 '나는 게이 아들을 둔 부모입니다'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행진했다. 군대 내 동성 간 성행위 처벌법인 군형법 제92조 6항 폐지를 위한 집회에도 참여한다. 예준이도 인권단체에서 에이즈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며 게이합창단 단원으로 무대에 서고 있다. 커밍아웃을 계기로 가족이 모두 '인권 운동가'로 바뀐 셈이다.
한편으로는 부모의 역할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비단 성 소수자 부모가 아니더라도 부모는 이래야 하는구나'라고 말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식 입장에선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자식이 자신의 삶을 살게 놓아두고 부모는 묵묵히 그 길을 함께 가줘야 한다. 때로 아이가 가는 길이 너무 험할 때 손잡아 일으켜 주고, 돌이 있으면 치워 주는 게 부모의 일이다.
Q. 퀴어 퍼레이드에서 성 소수자 부모모임의 '프리 허그' 행사를 인상 깊게 봤는데 어떤 의미인가.
A. 성 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인정하는 의미다. 한국 사회에서 성 소수자는 마음 놓고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자해나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다른 집단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들은 1년에 한 번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해 부모 모임 회원의 품에 안긴다. 어떤 분은 내 품에 안겨서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프리 허그에서 받은 힘으로 1년을 버틴다'고 했다.
Q. 다른 성 소수자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누군가 자녀에게 커밍아웃을 받으셨다면 내가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 또한 남편과 부모모임 활동을 하며 비로소 아이들과의 벽이 허물어진 것 같아 좋다. 우리 세대에서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으니 '괜찮은 어른'이 돼 간다.
A.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아이를 짝사랑하면서 성 정체성을 깨달았다. 아무리 애써도 그 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애를 피해 다녔지만 그 아이를 잊으니 또 다른 남자아이에게 두근거렸다. 그때 마침 성 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웹툰을 봤고 내가 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게이'나 '동성애자'같은 단어는 목구멍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부모님은 모두 훌륭한 분들이셨지만 부모님에게조차 말하기 무서웠다. 그래서 어느 공간에서든 만성적으로 답답함을 안고 살았다.
20살이 돼서야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했다. 그런데 별일 아니라는 투로 반응했다. '뭐 어쩌라고'라는 식이었다. 이후 1년간 거의 모든 친구들에게 커밍아웃했다. 내 성 정체성이 바뀌지 않는 이상 부모님에게도 커밍아웃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면전에 대고 말하면 격앙될 것 같아 편지를 썼다. 한 달 간 썼다 지우다 하면서 설득될 만한 표현을 찾았다. 내가 어떤 자기 부정의 시간을 지나서 부모님을 믿고 커밍아웃하는지 표현했다. 그렇게 2016년 7월 '이번주 목요일에 중대발표를 한다'고 예고한 후 식탁에 편지를 올려두고 친구 집으로 피신했다.
장예준씨는 20살 되던 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부모에게 알렸다. 이 때 편지를 어머니 강선화씨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강선화씨 제공 |
장예준씨는 20살 되던 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부모에게 알렸다. 이 때 편지를 어머니 강선화씨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강선화씨 제공 |
Q. 선화 씨는 커밍아웃 당시 느낌이 어떠셨나.
A. 4년 전 일인데도 아직도 그날 기억이 생생하다. 너무 충격이었다. 직업이 항공승무원이어서 다음날 미국으로 떠났는데 비행기에 타고 나서 호텔방에 도착해서까지 48시간 가까이 잠을 못 이뤘다. 예준이가 준 '성 소수자 부모 인터뷰집'과 '성 소수자 부모를 위한 가이드북'은 차마 펼쳐보지 못했다. 용기가 안 났다. 내가 받아들이면 예준이가 다시는 다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런 태도가 바뀐 건 예준이가 컴퓨터 바탕화면에 내려받아 놓고 간 영화 '바비를 위한 기도' 때문이었다. 영화 주인공 바비는 부모가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내가 멍 때리고 있다가는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준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엄마에게 시간을 주면 좋겠다. 어떻게든 잘 헤쳐나가고 싶은데 아직은 힘이 든다'는 내용이었다.
불현듯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그동안 아이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예준이는 그야말로 '학교에 겨우 다녔다'고 할 정도로 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고 친구도 많이 없었는데 그게 성 소수자였기 때문이었나 하고 짐작해 봤다. 아이는 중학교 3학년 시절 기술을 배우겠다며 대학과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겨우 설득해서 인문계고등학교에 보냈는데 학교에선 자고 기술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새 기술학원 숙제하고 게임을 하는 등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했다.
그래도 우리는 비교적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정체성에 대해서만큼은 속 시원히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한국 사회가 게이를 못 받아들이니 부모도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Q. 예준 씨는 커밍아웃 후 어떤 기분이 들었나.
A. 1분에도 몇 번씩 감정이 바뀌었다. '내가 왜 이처럼 힘든 일을 겪어야하나'라는 분노와 함께 '어쨌든 중요한 숙제를 마쳤다'는 후련함이 들었다. 한편으론 슬프기도 했다. 편지를 남긴 직후엔 친구와 PC방에 갔다가 찜질방에 갔다. 게임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폭언을 듣거나 집을 나와 혼자서 제2의 삶을 꾸리는 상황 등을 상상했다. 이미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해 1년 간 500만원을 벌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걱정이 많이 됐다.
Q. 이후 가족끼리 언제 재회해 어떤 말을 나눴나.
A. (아이)아빠랑 둘이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입을 떼기가 두려웠다.
커밍아웃 나흘 만에 귀국해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남편과 예준이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연애는 했니' 등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는 커밍아웃 3일 만에 부모모임에 나가서 위로와 지지를 받고 와서 이미 괜찮아진 상태였다.
Q. 어떤 과정을 거쳐 예준 씨의 성 정체성을 이해하게 됐나.
A. 처음엔 거짓 죄책감이 들었다. '예준이가 성 소수자가 된 게 혹시 내 탓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예준이에게 '엄마가 너를 이렇게 낳아 힘든 인생을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예준이는 '그것도 나에겐 상처가 된다, 내가 게이가 된 게 엄마 잘못도 아닌데'라고 했다. 순간 부모의 죄책감이 아이에겐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가급적 죄책감을 자제하려 노력했다. 어찌 됐든 부모로서 자식을 행복하게 살게 해 주는 게 내 목표라고 생각했다. 커밍아웃 한달 후인 8월부터는 부모모임에도 참석했다. 아이 아버지는 커밍아웃 3일 만에 모임에 참석해온 상태였다. 처음에 한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는데 내 차례가 되자 '저는 한달 전에 아들이 게이라고...'하면서 말을 못 잇고 계속 울었다.
Q. 커밍아웃한 뒤 어떤 차별을 겪었나.
A. 혐오의 말은 늘 듣는다. '부모가 저 모양이니까 자식이 저렇지'하는 말들이다. 지난해 인천 퀴어 퍼레이드에 부모 모임 회원 자격으로 참석했을 때 그런 말을 들었다. 동성애 혐오 세력이 우리를 에워싸거나 멱살을 잡고, '부모모임' 명칭이 쓰여 있는 티셔츠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땅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했다.
네티즌 또한 아들에 대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한다. 어쩌다 유튜브를 한번 찍으면 댓글이 폭격 수준이라 소송을 생각할 정도다.
일상에서도 차별의 시선이 있다. 예준이가 애인과 길에서 손잡고 뽀뽀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아이는 오히려 그걸 즐긴다. 그러나 부모로서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혹시라도 예준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폭행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Q.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건가.
A. 그렇다. 한국에서 성 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을 못 하는 이유가 '힘들게 살까봐' 이다. 차별금지법이 있으면 사회안전망이 생기니 아무래도 이런 걱정이 덜할 것이다. 캐나다에 잠깐 있다 왔는데 그 나라 부모들은 자식이 커밍아웃을 해도 우리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해고당할 우려 등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나라 아이들은 13~14살에 일찌감치 커밍아웃을 한다고 한다. 아이도 부모도 덜 힘들다.
Q. 그런데 왜 법이 제정되지 않는다고 보나.
A. 정치인의 표 계산 때문이다. 특정 종교나 정치 계파가 차별금지법에 항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어찌 됐든 자기 지역구에서 또 해먹어야 하는 게 정치인들이다. 예전에 부모모임에서 국회의원실을 방문해 자료를 전달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해 볼까 했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정치판 뚫기는 역시 힘들었다. 그 와중에 기득권을 내려놓고 소신 있게 차별금지법 찬성 발언을 해 주는 장혜영 의원 등에게 감사하다.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진정으로 고민하는 정치인도 있다고 느꼈다.
Q. 차별금지법 이외에 어떤 수단이 필요한가.
A. 학교 성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선생님 중에서도 성 소수자를 잘 몰라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2011년 조사에서 성 소수자 비율은 3.8%였다. 성씨 중 '강 씨' 보다 많은 수치다. 이들의 존재를 알릴 기회가 정규 교육 과정에 없는 것이다. 이미 장애인에 대한 교육은 정규 교육에서 이뤄지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 소수자에 대한 교육은 아직 학교에서 못 한다.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다. 여학생은 치마 교복을, 남학생은 바지 교복만 입을 수 있는 제도 등을 고쳐 성적 다양성을 허용해야 한다.
Q. 예준 씨의 커밍아웃과 성 소수자 부모모임이 선화 씨의 삶에서 어떤 의미였나.
A. 처음엔 그저 '우리 아들이 좋아하니까' 부모모임에 단순히 참석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남편과 함께 시간이 날 때마다 성 소수자 관련 집회에 참석한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서 '나는 게이 아들을 둔 부모입니다'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행진했다. 군대 내 동성 간 성행위 처벌법인 군형법 제92조 6항 폐지를 위한 집회에도 참여한다. 예준이도 인권단체에서 에이즈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며 게이합창단 단원으로 무대에 서고 있다. 커밍아웃을 계기로 가족이 모두 '인권 운동가'로 바뀐 셈이다.
한편으로는 부모의 역할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비단 성 소수자 부모가 아니더라도 부모는 이래야 하는구나'라고 말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식 입장에선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자식이 자신의 삶을 살게 놓아두고 부모는 묵묵히 그 길을 함께 가줘야 한다. 때로 아이가 가는 길이 너무 험할 때 손잡아 일으켜 주고, 돌이 있으면 치워 주는 게 부모의 일이다.
Q. 퀴어 퍼레이드에서 성 소수자 부모모임의 '프리 허그' 행사를 인상 깊게 봤는데 어떤 의미인가.
A. 성 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인정하는 의미다. 한국 사회에서 성 소수자는 마음 놓고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자해나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다른 집단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들은 1년에 한 번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해 부모 모임 회원의 품에 안긴다. 어떤 분은 내 품에 안겨서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프리 허그에서 받은 힘으로 1년을 버틴다'고 했다.
Q. 다른 성 소수자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누군가 자녀에게 커밍아웃을 받으셨다면 내가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 또한 남편과 부모모임 활동을 하며 비로소 아이들과의 벽이 허물어진 것 같아 좋다. 우리 세대에서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으니 '괜찮은 어른'이 돼 간다.
/기획취재팀
※기획취재팀
글 : 정운차장, 이원근, 이여진기자
사진 : 김도우기자
편집 : 박준영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
※기획취재팀
글 : 정운차장, 이원근, 이여진기자
사진 : 김도우기자
편집 : 박준영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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