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공인 롤모델 백년가게

[소상공인 롤모델 백년가게-#4 인천 흐르는물]LP와 커피, 낭만이 흐르는 곳



#들어가며

경기도·인천지역 '백년가게'를 소개합니다.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이 기사를 클릭했다면 조금은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보통의 사람들이 오랜 기간 일군 귀한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코로나19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소상공인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백년가게란? - 중소벤처기업부가 100년 이상 존속을 돕고자 지정한 30년 이상 업력(국민 추천은 20년 이상)의 소상공인 및 소·중소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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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 안원섭 대표./디지털콘텐츠팀

#낭만이 흐르는 곳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뒤꽁무니를 쫓다 보면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경주마' 같은 삶의 피로감이겠죠. 오늘은 메마른 현실에 지친 이들을 위해 낭만이 가득한 공간을 소개합니다. 특히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는 장소가 될 것 같습니다.

인천시 중구 신포동은 지금이야 구도심으로 불리지만 인천항 개항 이후 최대 상권을 이룬 곳입니다. 하지만 신포동 일대 개항장지구는 인천 내륙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주요 공공시설이 이전하고 인천항 내항의 항만기능이 점차 줄어든 1990년대부터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이곳에 안원섭 대표가 1989년부터 30년 넘게 운영 중인 LP카페 '흐르는 물'이 있습니다. 가게의 상호는 정희성 시인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나오는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호와 얽힌 에피소드가 재밌습니다.

"원래 상호는 시 구절을 인용해 '흐르는 것이 어찌 물뿐이랴'였어요. 그렇게 몇 년 하고 있는데, 공무원들이 와서 이름 좀 바꿔 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당시 우리 가게에 예술을 하거나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많이 왔는데, 관에서 볼 땐 상호가 문제였던 거죠. 그래서 '흐르는 물'이라고 줄인 거예요."

음악을 좋아하던 29살 청년이 문을 연 이 공간은 지역 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됐습니다. 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 미술을 하는 사람, 대중가요 또는 악기를 하는 사람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가게를 찾았습니다. 젊음을 함께 불태운 손님들이 이제는 자식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 정말 오랜 기간 가게를 일궈온 겁니다. 요즘은 '뉴트로' 열풍이 불면서 젊은 사람들이 LP를 직접 가져와 틀어달라고 하는 요청도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원래 독일 바우하우스로 유학을 가서 건축미학을 공부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독일이 통일된 거예요. 당시 독일에 살고 있던 누나가 '지금은 혼란하니 독일에 오는 걸 보류해 달라'고 해서 결국 못 가게 됐죠. 그러다 지금 집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하면서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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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많은 눈이 내린날, 흐르는 물 외관 전경. 안 대표가 가게 앞에 쌓인 눈을 쓸고 있다./디지털콘텐츠팀.

#등대지기를 꿈꾼 소년

시와 음악을 좋아했던 안 대표의 어릴 적 꿈은 대통령, 과학자, 선생님도 아닌 '등대지기'였습니다. 그는 '어두운 밤바다에 세찬 파도를 뚫고 오는 배들한테 불빛 하나 내려주는' 등대지기가 정말 좋았다고 합니다. 실제 등대지기를 뽑는 시험에 응시하려고까지 했으나, 기계 조작을 잘 해야 한다는 말에 포기했다고 하네요. 대신 지금은 손님들에게 '물지기'로 불립니다. '흐르는 물을 지키는 물지기', 어찌 보면 어릴 적 꿈을 이룬 셈입니다.

"개항장지구에 어둠이 내렸을 때 손님이 오든 안 오든 간판 불을 켜고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 등대지기와 비슷한 점이 있는 거죠. 이런 걸 보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교급이 아닌 나만의 행복."

흐르는 물은 음악을 듣는 곳이지만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은 아닙니다. 안 대표가 소장하거나 손님들이 가져온 LP 또는 CD로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그가 소장한 LP만 5천장 가량이니 웬만한 노래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LP의 음은 녹음할 때부터 '사람의 감정을 안 다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앞으로도 흐르는 물에서 음원으로 노래를 듣는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요즘은 음원으로 편리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저희 가게는 못 틀어드리는 음악도 있어요. 손님들이 틀어달라는 노래의 95% 정도는 바로바로 나와요. 제가 모르는 음반을 얘기하면 '잠깐 기다려 달라'하고 찾아본 뒤 없으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죠. 그래서 배우는 음악도 많아요. 나이, 성별, 직업별로 음악의 깊이, 넓이가 다 다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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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한 흐르는 물 내부 모습./디지털콘텐츠팀

#따뜻한 공간, 따뜻한 사람

흐르는 물이 위치한 신포동의 매력이 뭐냐고 묻자 답변이 쉴새 없이 쏟아집니다. 천진난만한 그의 모습에서 이 지역을 사랑하는 그의 진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동네에 대한 애정은 가게를 꾸준히 이어나가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40~60대를 지나가고 있는 인천 사람들은 이 동네에 와서 영화를 봤고, 쓴 소주 한잔을 마셨고, 레스토랑에 가서 경양식 돈가스를 먹었어요. 대한서림에서 책을 사고, 하다못해 나이트클럽을 가도 이 동네로 왔죠. 개항이 되면서 예술이든 음악이든 춤이든 커피든 모든 게 이쪽으로 들어왔어요. 가장 좋은 건 엄마 품처럼 어렸을 때 추억이 거의 변함 없다는 거예요. 신도시에 가면 편리하긴 하지만 왠지 내 옷이 아닌 것 같은데, 차를 타고 이곳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죠."

백년가게로 선정된 건 그의 인생에 큰 자부심이자, 초심을 돌아보게 하는 자극이 됐습니다.

"선정 소식을 듣고 집사람하고 함께 울었어요. 물질적 혜택이 많진 않지만 지난 세월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참 기뻤죠. 가게를 운영하면서 짜증이 나는 일이 왜 없겠어요. 백년가게로 선정됐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가게 운영을 하려고 해요."

안 대표는 손님들이 마음 편히 음악을 들으며 차 한잔, 맥주 한잔 할 수 있는,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이 하루빨리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흐르는 물이 '외갓집'같은 곳으로 기억됐으면 해요. 우연히 방문했어도, 가끔 갔어도, 오랜만에 갔어도 그 사람이 있어서 따뜻한 곳."

*흐르는 물 주소: 인천시 중구 신포로 31. 영업시간: 오후 6시~새벽 1시(일요일 휴무). 연락처: 032-762-0076. 커피와 음료, 맥주 등을 주문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인천대중음악전문공연장협회 소속 클럽으로, '홍대 라이브 클럽 데이'와 같은 다양한 문화 공연도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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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에서 밴드 공연이 열리고 있다./안원섭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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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흥기자

kangg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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