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퀴어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개 '이반'(二般)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단체명을 사용했다. 일반(一般)과 달리 평범하지 않은 사람, 일(一) 아닌 이(二)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담은 이 단어는 확장된 축제 참여 숫자만큼이나 큰 변화를 맞았다.
'이상한·기이한'이란 의미의 퀴어(queer)는 본디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뜻으로 쓰였지만, 이제는 게이·레즈비언·트랜스섹슈얼·바이섹슈얼 등 제도에서 소외된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긍정 단어로 변모했다. 축제 위상 변화도 극적이다. 지난 16일 열린 행사에는 주한미대사가 참여해 공개 지지 발언을 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설문조사판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마련된 한 부스에서는 '커밍아웃을 위해 가장 필요한 변화는?'이라는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2022.7.16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
퀴어, 비하 → 긍정 단어 극적 변모
주한미대사 공개지지 등 위상 변화
이제 퀴어축제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개최를 모색하는 단계다. 이미 2018년부터 열리고 있는 인천에 이어 경기도퀴어축제가 준비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지난해 11월 경기도퀴어축제 개최 준비를 공식화한 경기도퀴어문화축제준비위원회는 지난 5~6월 사이 준비위원 모집을 거쳐 올해 안에 경기도에서 퀴어 축제를 열기 위한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광장에는 22년 전처럼 비가 쏟아졌다. 오후 5시 30분께 세차게 내리는 폭우가 익숙해질 때쯤 서울광장 인근을 지나던 행진 대열에서는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라는 가사의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대열에 함께한 이들은 차별에 맞서 '연대하겠다'는 다짐을 노래로 표현했다. 이들은 10m가량 펼쳐진 빗물 물웅덩이를 보란 듯이 첨벙첨벙 뚫고 나아갔다.
이날 이른 시각부터 서울광장 곳곳에는 활기가 넘쳤다.
이곳에서 만난 경희대학교 국제 캠퍼스 '아쿠아' 회장 B씨는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퀴어문화축제는 대학 축제와 달리 아우팅 위험이 없어 퀴어는 성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다. 부스 준비에 한창이던 B씨는 "바다에 다양한 해양 생물들이 살고 있다"며 "바다처럼 사회에도 여러 퀴어가 존재한다는 의미를 이 '블루 레모네이드'에 담았다"며 주력 상품을 열띠게 설명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찜통더위 속에서도 광장으로 향하는 이들의 표정을 밝았다. 광장 잔디밭에는 무지개색 굿즈로 한껏 멋을 낸 연인들이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무지개색 부채, 가방, 옷으로 치장한 퀴어들은 정답게 귓속말을 주고받거나, 양산으로 서로 햇빛을 가려주기도 했다. 무지개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한 퀴어는 잔디밭에 들어서자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 올려 자유를 만끽하려는 듯 팔과 몸을 흔들며 춤을 추듯 걸어나갔다.
5~6월 준비위원 모집 연내 개최 온힘
서울선 '연대 다짐' 빗속 행진 활기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부산에서 왔다는 고등학생 퀴어 3인은 기념사진 촬영에 한창이었다. 그 중 MTF인 김욤(활동명·18)씨는 "왜 죄다 게이랑 레즈비언만 있는 거냐. 트랜스들은 별로 안 보인다"며 소소한 불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잔디밭 너머에는 80여개 부스가 마련됐다. 성 소수자·여성 단체, 각국 대사관 등에서 마련한 부스는 축제를 찾아온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트랜스해방전선' 부스에서 만난 류세아(31)씨는 "행진이 가장 기대된다. 트랜스젠더 가시화 내용을 담은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려 한다"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동성애 반대" 맞불 집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지난 16일 서울광장 인근에서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맞불 집회가 열리고 있다. 2022.7.16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
경찰 펜스로 둘러싸인 서울광장 옆에선 동성애 반대 시위도 열렸지만, 광장 내 퀴어들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잔디밭에서 만난 땃쥐(활동명·23)씨와 쥬드(활동명·27)씨는 "다른 나라에선 반대가 이렇게 심하지는 않다. (반대 집회가) 이제 너무 익숙하다 보니 '합동 공연'이 된 거 같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머리에 풍선을 쓰거나 코스프레를 한 이들도 여럿 보였다. 화려한 옷을 입은 땃쥐와 쥬드씨는 입 모아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입고 다니겠어요. 그리고 이렇게 꾸며야 눈에 잘 띄어요. 우리가 여기 있다, 우리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더 크게 알리는 거죠."
오후 5시께 세차게 쏟아지는 장대비와 함께 '자긍심 행진'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퀴어 동아리 '외행성' 깃발을 든 한 남성은 빗줄기가 거칠게 쏟아질수록 더 크게 환호하며 깃대를 힘차게 흔들었다. 비를 맞으며 3.8㎞를 걷는 고된 일정이지만 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 피었다.
이들이 거리를 행진할 때 거리를 걷던 행인 일부는 소리를 지르며 동성애 반대 의사를 표출하기도 했다.
행진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은 맑게 개었다. 공식 일정은 끝났지만, 축제에 참가한 이들은 비에 젖은 차림으로 잔디밭 광장에 삼삼오오 모였다.
행진 내내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그대로 맞던 우산(활동명)씨는 기념사진을 찍은 뒤 마지막 소감을 전했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멋진 사랑을 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겁니다."
/신지영·이시은·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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