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 특별기획

[선감학원 특별기획 PART2·(1)] 부랑으로 떠밀린 형제… 고통의 불은 아직 환하다

숨죽여 살아온 50년, 형 진성씨 이야기
입력 2022-11-20 16:00 수정 2023-01-16 10:33
지면 아이콘 지면 2022-11-2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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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 진성씨가 지난 8일 선감역사박물관에서 경인일보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
창고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었어요.
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불안해서 잘 수가 없어요.
진성(62·가명)씨는 살면서 잠을 제대로 이룬 날이 없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날 중에는 편안히 잠을 자 본적이 없다.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갔다가 붙잡혀서 창문도 없는 창고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었어요. 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고 깜빡 잠이 들어도 자꾸 깨고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꾸고.. "

그는 온 방을 환하게 불을 켜야만 하고, 누가 등 뒤에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결혼을 하고서도 집사람이 제 등 뒤에서 잠을 못 자요. 불도 환하게 켜 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거실에 나와서 불을 켜놓고 잡니다. 그래도 늘 자다가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해서.. 가족들이 너무 힘들죠."



그래서 그는 약의 기운을 빌려야만 한다. 아주 오랫동안 신경안정제, 수면제 등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

"저녁마다 약을 먹어요. 그래야 그나마 토막잠이라도 자니까.. 약 기운이 떨어지면 힘이 드니까 몸을 계속 괴롭혀요.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때까지 뭐라도 계속 해요. 그래서 피곤하면 그때 약을 먹고 잡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견딜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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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입소 당시 진성씨 원아대장.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는 눈물을 쏟았다. 그 눈물이 몹시 서럽다. 흡사 50년 전 그 날의 어린아이 같았다. 하루도 그 날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직장생활이 무척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두고 수군대는 것 같고.. 그런 기분이 계속 들어 견디질 못했어요. 제일 길게 직장생활을 한 게 6~7개월 정도. 도저히 직장은 못다닐 것 같아 조경을 배워 조경사로 일했는데 나이가 들고 힘이 들어 그만둔 후로는 대부분 운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주로 화물트럭이나 심야버스 같이 밤에 운전하는 일이요. 어차피 밤에 잠을 잘 못 자니까 그게 차라리 나았어요. 혼자서 조용히 일할 수 있고.. 그나마도 지금은 코로나로 일거리가 끊겼지만.."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 같아
직장생활 길게 한게 6~7개월
어차피 못자니까 밤에 운전해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지만, 그는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반평생을 살았다. 선감학원에서 겪은 충격으로 그 이전의 기억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적어도 진성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고, 형제들과 도란도란 지내며, 초등학교를 다니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때가 방학이었던 것 같아요. 외할머니댁에서 동생이랑 있었는데, 할머니가 (수원) 남문시장에 농사지은 오이, 호박을 팔러 나간다고 해 따라갔어요. 우리가 심심해하니까 할머니는 수원역에서 일하고 있던 형에게 잠시 놀러 다녀오라고 했어요. 할머니가 버스를 태워줬고, 수원역에 내려 형을 만나 조금 놀다가 형이 잠깐 일하러 간 사이에 대합실에서 동생이랑 깜빡 잠이 들었나봐요. 눈을 떠보니 나랑 동생이 공중에 들려서 어디론가 잡혀가고 있었어요. 할머니가 기다린다, 형이 여기서 일한다고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울지도 못하게 발로 차고 때리고.. 그렇게 역전 앞 부녀보호소에 끌려가 보니 먼저 잡혀 온 얘들이 스무명 쯤 있었어요. 그때 우리 형이 우리를 찾아서 왔고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경찰 복장을 한 사람이 형을 데리고 나가서 이야기하고 오더니, 먹여도 주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말하고는 형더러 가라고 했어요. 형이 그렇게 가고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끌려가는데, 오목천을 지나가대요. 할머니 집이 오목천이고 우리는 그 길을 너무 잘 알았거든요. 동생이랑 울부짖으면서 할머니 집이 저기라고, 주소까지 정확하게 말했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내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맞았어요. 그때 제가 10살, 동생이 8살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평범한 아이
선감학원 충격 느끼며 반평생

할머니 따라 나온 수원역에서
잠든 사이 부녀보호소 끌려가
오목천이라고 주소 말해도
10살, 8살 풀어주지 않고 때려
진성씨는 마음 한편에 맺힌 가족을 향한 응어리를 말했다. 지금도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번은 따져 물었다. "네가 우리를 보낸 것 아니냐고,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고. 할머니, 엄마가 우리를 그렇게 찾을 때 네가 말 한마디 했으면 됐지 않았냐"고 원망을 쏟아냈다.

형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어린 아이였고, 그저 경찰이 무서웠다고, 일도 못하게 하고 잘못을 끄집어 내 트집잡을 지 몰라 두려웠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니 지금도 엄마를 원망합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 '송혜희를 찾아주세요' 그 현수막을 운전하는 몇 십년째 보고 있는데, 다른 집은 새끼가 없어지면 그렇게 찾잖아요. 그런데 왜 엄마는 끝까지 찾지 않았냐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마음을 풀지 못했어요. 내 인생이 너무 힘들 때마다 엄마한테 왜 찾지 않았냐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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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4살 무렵의 진성·진동 형제가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진동씨 제공

선감학원에 끌려간 다음날부터 지옥은 시작됐다. 그가 당했던 끔찍한 일을, 그는 '그런 일'이라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손을 떨고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선감학원에 들어오고 다음날부터 (성)폭행을 당하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저는 화장실에 잘 못 가요. 그때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견디다 못해 (선감학원) 직원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는데, 방만 옮겨주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요. 제가 이걸 참으면 동생은 책임지고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동생은 학교도 보내주고 그런 일 없게끔 해주겠다고.. 그래서 참았어요."
끌려온 다음날부터 성폭행 당해
기억에 아직도 화장실 잘 못가
동생만은 지켜준다 약속에 참아

학교 못가고 하루종일 밭일
할당량 못 채우면 '방장'에 구타
겨울엔 벗겨서 밖에 서있게해
정작 동생은 함께 지내지도 못했다. 아니, 절대 만나면 안됐다. 그게 그곳의 법이었다. 그래도 동생이 걱정되고 보고파, 동생이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길목에 숨어 몰래 얼굴을 보곤 했는데, 동생은 학교에서 간식으로 나눠준 건빵을 남겨와 형에게 건넸고, 형은 일하다 잡은 개구리나 쥐를 구워 동생에게 먹이곤 했다. 그게 서로를 지키는 최선이었다.

진성씨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하루종일 일만 했다. "밭일, 논농사, 닭도 키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는 계속 일만 했어요. 양잠하는 시기에는 밤에 잠도 못 자고 일해야 해요. 누에는 밤에도 뽕잎을 줘야 하거든요. 잠깐 자다 알람소리 울리면 일어나 한 시간 이상 뽕잎 주고 그러면 잠이 다 깨고 다시 잠 들만 하면 일어나 뽕잎 주고.. 비가 오는 날엔 뽕잎을 다 닦아서 누에를 줘야 해요. 매일 할당량이 있어서 그만큼 일을 다 못하면 '방장'이라는 사람한테 맞아야 하고 괴롭힘을 당해요. 직원들이 우리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같은 원생 중에 나이 먹은 사람들, 직원들에게 협조하는 사람들을 숙소마다 '사장'으로 부르는 대장을 만들었고 각 방 마다는 방장을 만들었어요. 직원들이 윽박지르고 화내는 날이면 어김없이 매타작을 당해요. 곡괭이 자루 끌고 다니면서.. 겨울엔 옷을 홀딱 벗겨서 밖에 세워놔요. 그때 귀가 얼어 동상에 걸렸습니다."
견디지 못하고 갯벌로 나갔다
차오르는 물에 다시 빠져나와
물때 기다리고 있다가 만난 소년
'너희집 연락해주마' 적어가더니
죽은채 바다서 떠밀려와 묻어줘

고작 10살의 나이에 시작된 폭행과 강제노역. 견디지 못하고 그는 갯벌로 뛰어 나갔다. 살기 위해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갯벌을 걸어서 가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물이 많아 허벅지까지 빠졌다. 아직 저 섬까지 걸어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 갯골에 거품처럼 물이 차올랐다.  


"'아, 잘못 계산했구나' 싶어 다시 힘들게 빠져나왔어요. 일단 창고에 숨어 다음 물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잡혔습니다. 창문도 없는 창고에 갇혀 물도 먹지 못했어요. 그 뒤로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친해진 친구가 내가 매일 밤 폭행을 당하는 걸 알았어요. 어느 날 뜬금없이 그 친구가 '네 집 주소가 뭐냐'고 묻길래 알려줬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연필을 가져와 집 주소를 적더니 1년쯤 지난 뒤 '내가 나가서 너희 집에 연락해주마, 너희 엄마 데리고 오마'라고 말하곤 바다로 나갔어요. 얼마 안 지나 (바다에서) 누가 떠밀려왔다고 나가봤더니 그 아이가 죽어 있었어요. 얼굴이랑 팔에 소라가 잔뜩 붙어있는 채로.. 내가 이쪽 어디에 그 아이를 묻어주었는데 위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요. 내가 여기 올 때마다 꼭 묘역에 들러 그 아이를 찾는데 찾질 못합니다. 그 아이는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너무 미안해서.."

진성씨가 선감학원을 나올 수 있었던 건, 죽음의 문턱에서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프다고 말해 얻은 약을 무조건 모았다.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목매려는 순간 축산부 직원 발견
"책임지고 보내줄게" 이후서야 탈출

"아무 약이나 먹으면 무조건 죽는 줄 알았어요. 축산부에 건초를 저장하는 장소가 있거든요. 거기에서 약을 먹고 목을 매려고 하는데, 축산부 직원에게 발각됐죠. 약을 다 뺏겼어요. 축산부 직원이 나를 보더니 '내가 책임지고 너희 둘 내보내 줄게. 나이도 어린데, 죽지 마라. 동생 혼자 남으면 어떻게 사니' 그러고 정말 얼마 안 있다 여기서 나갔던 것 같아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그는 계속 울었다. 흐느낌 속에서도 또렷한 말로 "나는 부랑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시 민주공화당원이었고 수원 사무총장도 한 사람이에요. (선감학원 가서도) 계속 우리 집 주소를 말했고 집에 연락해달라고 애원했어요"를 반복했다.


부랑아가 아니었지만 선감학원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그는 정말 부랑아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평생을 선감학원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숨어 살았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삶은 결국 부랑아가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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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최헌길 경기도지사와 한미재단 관계자가 선감학원에 방문했을 당시 원생들. /선감역사박물관 제공
50년 넘도록 현재진행형으로 아픈데
잘못했다는 소리를 온전하게 하지 않아요.
수천명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이제와 생각하니 내가 선감학원에 왔다는 그 자체가 지금도 말 못할 일인가 싶어요.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 일단 여기 출신이라고 하면 온전한 눈으로 보지 않아요. 저는 부랑아가 아니었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거죠. 50년이 넘도록 나는 이렇게 현재진행형으로 아픈데, 이 일을 했던 사람들은 잘못했다는 소리를 온전하게 하지 않아요. 수천명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 사람들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아요."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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