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아임 프롬 인천·(8)] 불굴의 샐러리맨, 타이어 하나로 지구를 돌았다

염호석 전 금호타이어 독일법인장
입력 2023-08-16 15:11 수정 2023-12-06 19:12
염호석 전 금호타이어 독일법인장.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해외 시장은 알고 나가면 전혀 두려울 것이 없는 새로운 개척지입니다."

1996~2018년 영업생활 엮은 책 출간
아프리카, 대양주, 북·중미 등서 활동
해외주재원으로 쌓은 노하우 담아내

'글로벌 러시' 저자 염호석은 금호타이어에서 20여 년 동안 해외 영업을 전담한 샐러리맨이었다. 1996년 입사해 2018년 독일법인장을 끝으로 회사를 떠나기 전까지 아프리카, 대양주, 북·중미, 유럽에 타이어를 팔았다. 전형적인 워커홀릭이면서도 가정에서는 든든한 남편이자 믿음직한 아빠였다. 그가 해외 주재원으로 겪은 시행착오와 축적된 노하우를 묶어 지난 7월 책으로 펴냈다. 해외 진출을 고민하는 중소기업, 해외 주재원을 꿈꾸는 직장인과 청년이 실무 지침서로 삼기에 충분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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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호석(맨 오른쪽) 전 금호타이어 독일법인장 가족은 부친을 따라 경남 거창, 서울을 거쳐 인천에 정착했다. /염호석 제공

염호석 전 금호타이어 독일법인장은 부친(염태수) 고향인 경남 거창에서 3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염호석 전 법인장의 '장사꾼 기질'은 사업가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부친은 서울시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월급이 너무 적은 이유로 그만두고 민간 기업 '경인에너지'(현 SK인천석유화학)에 입사했다. 염 전 법인장이 세 살 무렵 다섯 식구가 도화동 단칸방 셋방살이로 인천에 정착했다. 다섯 식구라고 하면 주인집이 싫어해 네 식구로 속이고 계약한 뒤 짐부터 옮겼다고 한다.



다섯식구 도화동 단칸방 셋방살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장사꾼 기질
대기업 대표와 '같은 성씨' 알게 돼
무작정 찾아가 납품 성사시킨 일화


염 전 법인장 부친은 경인에너지에서 삼양운수로 자리를 옮겼다가 정우유조를 세워 운송 사업에 도전했다. 탱크로리 여러 대를 보유하고 동양화학, 한불화학에 납품하면서 사세를 키웠다. 인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동양화학(현 OCI)은 1968년부터 소다회 공장을 가동했고, 1976년에는 프랑스 론풀랑과 합작 투자로 백(白)카본 공장을 설립했다. 동양화학의 소다회를 주원료로 하는 백카본은 제지, 페인트 등을 생산하는 기초화공약품이다. 1960~70년대는 화학산업의 부흥기였다. 학익동은 화학산업 생산기지로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인하대학교에서 송도고등학교로 이어지는 대로(大路)는 공장을 드나드는 대형 트럭으로 붐볐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소다회 생산 과정에서 나온 폐석회 처리 방향을 두고 시민사회단체와 OCI가 대립하는 진통을 겪었다. 현재 화학공장이 폐쇄된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다.

염 전 법인장은 부친이 사업가로서 저돌적 추진력을 갖고 있었다고 하며 대기업에 납품을 성사시킨 일화를 들려줬다.
"저희가 파주 염가인데, 본(本)이 파주 하나라 다 일가(一家)로 보면 됩니다. 어느 날 아버님이 신문을 보시다가 삼성특수제지 대표가 염인모씨인 것을 알고 무작정 찾아가서 그 회사에 납품을 성사시키셨습니다. 제가 그런 아버지의 기질을 닮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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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장에서 제물포성당으로 오르는 언덕길은 1970년대 저택이 즐비한 부촌이었지만 아파트 붐이 일고 도심이 확장하면서 단독주택이 있던 자리에는 빌라가 들어섰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부친의 사업 성공으로 가세가 폈다. 염 전 법인장이 숭의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가족은 도화동 단칸방에서 숭의4동 저택으로 이사했다. 제물포시장에서 제물포성당으로 오르는 언덕 주택가는 동일주택단지로 불렸는데 자유공원 기슭과 함께 인천의 양대 부촌(富村)이었다. 다섯 식구가 방 4개, 화장실 2개가 있는 단층집을 썼다. 몇 년 후 2층(방 3개, 화장실 1개)을 올렸다. 염 전 법인장은 입대 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부친 사업 성공, 숭의4동 저택 이사
"70년대엔 서울 종로학원 강사 등
고소득층 외지인 찾아와 집 지어"

지난 9일 제물포성당 입구 쪽 단독주택(수봉로33번길 79)의 문을 두드려 주민(77)을 만나 동일주택단지에 대해 물었다. 숭의동에서만 40년 이상 거주했다는 그는 "아래 (제물포)시장집에 살다가 20년 전 여기로 이사했다"면서 "동일주택 대지가 보통 100평에서 150평까지 넓었는데 예전에 와서 보면 참 눈부신 마을이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 부의 상징이었다. 인천의 중심 주거지였던 중구 내동은 좁은 필지에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주택의 신·증축이 불가능했다. 인천 중구에서 그리고 서울 외지인들이 배밭, 사과밭이던 숭의4동의 땅을 사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때 염 전 법인장 가족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염 전 법인장은 "70년대 이 동네에 서울 종로학원 강사 등 고소득층이 집을 지었다. 마당에 수영장이 있는 주택도 있었다"고 어린 시절 동일주택단지 풍경을 떠올렸다.



1980~90년대 아파트 건설·분양 붐이 일고, 인천 도심이 확장하면서 동일주택단지는 빌라촌으로 변했다. 염 전 법인장 가족도 숭의4동 집을 팔고 1990년대 관교동 동아아파트로 이사했다. LPGA 프로골퍼 김미현, 개그맨 이혁재 등 유명인이 이 아파트에 이웃으로 살았을 정도로 고가 아파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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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공원은 1970년대 후반 시민공원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1977년 수봉공원. /'인천의 어제와 오늘' 블로그

'소년 염호석'의 기억은 숭의초등학교, 수봉공원으로 점철된다. 숭의동은 미추홀구에서 이른 시기 근대식 학교가 들어선 지역이다. 숭의초는 1937년 창영공립보통학교에서 갈라져 나온 대화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고, 1946년 숭의국민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일제강점기 숭의동은 신도시 계획이 수립, 공사가 진행된 동네로 한국전쟁 이후 인구 유입이 꾸준히 늘었다. 수인선 철도와 경인전철 역사가 인접해 있고 사방으로 뚫린 도로가 인구를 끌어모았다. 가계 소득이 낮은 이른바 '시장집'에서부터 동일주택단지에 사는 부유층 아이들이 한데 모여 숭의초에서 공부했다. 요즘 말로 '소셜 믹스'가 구현된 공간이었다. 그는 제물포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제물포성당은 1976년 2월 도화동 가정집을 빌려 '제물포 성당 임시 사제관'으로 시작했는데 당시 신자 수는 1천471명에 이르렀다. 현 건물은 1978년 2월 완공된 것이다. 숭의초 교가는 "수봉산 기슭에 우뚝이 솟아/긴 역사 자랑하는 새싹의 학원"으로 시작했고, 염 전 법인장은 아직도 그 노래를 잊지 않고 다 부른다.

숭의초·수봉공원에 남아있는 옛 추억
소년만의 고민 생길 땐 혼자 공원 올라

중1때 펼친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
막연히 해외 생활 꿈 마음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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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공원.

수봉공원은 1970년대 중반 시민공원(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자유공원에 있던 놀이기구가 수봉공원으로 이전하면서 인천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염 전 법인장은 집에서 언덕길을 따라 올라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수봉공원을 자주 오르내렸다.

"아무것도 없는 야산에 놀이공원이 생기면서 친구들하고 자주 놀러 갔어요. 잠자리와 메뚜기도 잡았고. 어린 나이라고 해도 스트레스가 있잖아요. 그러면 혼자서 공원에 올라가고 주변 길을 걷고 달리면서 풀었어요. 미래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도 나고요. 제게는 굉장히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장소여서 인천에 오면 꼭 들러보는 곳입니다."

염호석 전 법인장이 막연하게나마 해외 생활의 꿈을 마음에 담기 시작한 건 송도중 1학년 때 집 서가에 꽂힌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을 읽으면서부터다. 세계여행가 김찬삼(1926~2003년)은 인천 출신으로 30여 년간 세계 1천여 도시를 여행한 모험가이면서 학자다. '세계의 나그네'로 불린 김찬삼이 삼중당에서 낸 컬러판 전집은 1970~80년대 베스트셀러 목록에 늘 올랐다. 염 전 법인장은 외교관이 되기로 마음먹고 대학에 들어갔다. 군 제대 후 외무고시에 매진했지만 1차에서만 두 차례 낙방했다. "당시엔 외무고시 응시 연령 제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계속 이렇게 고시에 매몰된 삶을 살기보다 상사에 들어가 내 꿈을 키워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돌이켜보면 외교관보다 상사맨이 제게 더 적합했던 것 같아요. 한국 제품을 세계 각 나라에 팔아 돈을 벌어오는 일, 참 멋있지 않나요?" 그는 1996년 금호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처음부터 해외 주재원 파견 근무를 목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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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호석 전 금호타이어 독일법인장.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Q : 금호에 입사해 상사맨으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각오 그리고 성과는 무엇이었나요?

A : 처음에 아프리카팀에 있다가 몇 개월 뒤 대양주팀으로 옮겼습니다. 남태평양 섬 지역 국가는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아 윗분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저는 아무리 작은 규모의 거래선이라도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이었어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타이티 쪽 바이어가 불어로 소통하니 너무 좋아했습니다. 오더 수주 실적이 전년도 대비 2배로 뛰었습니다.

Q : 인천에서 서울 회현동 사무실까지 통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A : 정말, 진짜 힘들었어요. 인천지하철이 없어 새벽 5시 40분 집에서 나와 주안역행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1호선을 타고 서울역에서 환승해 회현역, 명동역에서 내려 출근했었죠. 1시간 50분이 걸렸어요.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회사가 어려워 야근을 밥 먹듯이 했죠. 1호선이 끊기면 서울역에서 인천행 광역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것도 놓치는 일이 허다했어요. 그러면 1인당 5천원인 총알택시를 타거나 명동역 앞 세종호텔 사우나에서 자고 다음 날 출근했습니다.

염호석 전 법인장은 인적 네트워킹을 그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호기심 많은 성격인 데다 '교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 경험을 갖고 있다. 고교 시절 상담 교사 권유로 제물포고-인천여고 연합 서클 '나사렛'에 가입해 매주 토요일 답동성당 옆 가톨릭회관에서 독서 토론을 하며 세상을 배웠다. 박문희 코오롱글로벌 부사장, 정미애 전 주니가타 한국총영사 등이 나사렛 출신이다.



국내 처음으로 전투기 타이어 수출
1999년 필리핀 공군에 2만 달러 계약
후에 국정원에서 연락받은 지난 추억

또 다른 '최초 타이틀' 기록한 거래
북한과 타이어·압연 강철 물물교환
그러나 받기로 한 물품 못 받았던 비화

염 전 법인장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투기 타이어를 수출한 장본인이다. 1999년 필리핀 공군에 F-5 전투기용 타이어 80개(2만 달러 상당)를 납품했는데, 이것 역시 주한 사절단 모임에서 알게 된 필리핀 무관을 통해 성사시킨 일이었다. "필리핀 무관이 제 명함을 보고 '항공기 타이어를 만드느냐'고 한 질문에서 시작됐어요. 돌아와서 부랴부랴 가격 책정하고 협상하고, 기무사 들락날락하면서 겨우 승인을 받고 수출했어요. 수출 기사가 뜨니 이번엔 국정원으로부터 연락이 와 '왜 우리에겐 승인도 안 받고 보냈느냐'면서 혼난 적도 있답니다."

전투기 타이어 수출 외에 그가 '최초' 타이틀로 내세울 만한 거래 시도가 또 있다. 북한에 승용 타이어를 보낸 실무 역할을 담당했는데, 지금까지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들려줬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아마 1999년이었을 겁니다.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되던 시기 그룹 베이징 지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타이어를 북한에 보내는 대신 각강(자른 면이 정방형으로 각이 진 압연 강철)을 받는 물물 교환 거래였어요. 컨테이너 20개(TEU)에 타이어 약 1천500개를 실어 인천항을 통해 보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보내기로 한 각강은 들어오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염 전 법인장은 2000년 금호타이어 호주법인으로 발령받았다. 꿈에 그리던 해외 주재원이 돼 첫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함께 호주에 가 시드니 교외 킬라라 지역의 작은 유닛(빌라)을 얻었다. 호주에서 타이어를 파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고가의 미국·유럽산 타이어와 저가의 중국산 타이어가 경쟁하는 틈에서 상대적으로 브랜드 인지도가 낮은 타이어를 팔아야 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금호타이어를 홍보했다. 당시 염 전 법인장의 아내가 코트라 해외 주재원 가족 수필 공모전에 출품한 글을 보면 장사꾼으로서 남편의 기질이 잘 나와 있다.

"남편은 무척 성실하고 자기 일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회사 제품에 대한 자랑을 잊지 않는다. 이런 남편을 나는 '타고난 장사꾼'이라고 부른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런 남편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이웃집에 차를 마시러 가서도, 처음 보는 사람이 많은 파티에서도, 남편은 항상 금호타이어 자랑을 즐겨한다. 그러면 나는 행여 남편이 어울리지 않는 화제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곤 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내가 더 열심히 금호타이어 자랑을 늘어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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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호석 전 법인장은 해외 주재원의 성공 조건 중 하나로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꼽는다. 호주 주재원 시절 시드니 서큘라 키 페리 선착장 앞에서 큰딸과 찍은 사진. /염호석 제공
비즈니스는 상대가 있는 게임입니다.상대를 모르면 거래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Q : "호주에서 모든 비즈니스를 배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 : 호주, 북미, 유럽 등 선진국 거래처와의 협상은 논리 싸움입니다. 논리가 적합하면 상대방은 깔끔히 수용합니다. 처음 부임했을 때 카운터 파트너인 구매 담당 이사가 무지막지하게 깐깐했습니다. 우리 제품 가격을 깎아야 한다는 논리에 초기엔 제가 번번이 당했습니다. 미팅 후 복기하면서 제 나름의 논리를 만드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상대가 원하는 걸 제시하면서도 제 방향대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판매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Q : 이와 관련해 해외 영업 경험이 없는 중소기업 경영자들에게 들려줄 조언이 있을 텐데요.

A : 비즈니스는 상대가 있는 게임입니다. 한국식으로 '나는 이게 맞다'고 주장하면 상대방이 그걸 받아주느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를 모르고 우리가 아는 게 전부인 양 주장하면 거래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염 전 법인장은 2008년 뉴욕사무소장 시절 "영업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딜"을 성사시켰다. 뉴욕의 명물 옐로 캡(택시)에 금호타이어를 독점 납품한 것이다. 금호타이어는 LA에 본부를 두고 뉴욕사무소를 개설해 염 전 법인장을 초대 사무소장으로 보냈다.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 영업이 막막했다. 그러던 중 옐로 캡에 일본산 요코하마 타이어가 부착된 것을 발견했다. 옐로 캡 기사에게 타이어 대리점을 알아내 찾아갔다. 타이어를 금호로 바꿀 수 있는 가격, 광고비 지원 조건 등을 협상했다. 미주 본부에 보고하고 대리점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요코하마를 금호로 바꾼 이후 맨해튼에 갈 때마다 '내가 판매하는 제품이 굴러다니고 있다'는 자부심이 넘쳐났었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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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호석 전 법인장은 멕시코지사장 시절 매출 신장을 기록해 2011년 무역의날 기념식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염호석 제공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뉴욕사무소가 폐쇄됐다. 그는 미주 본부 또는 본사로 가지 않고 2010년 멕시코지사 부임을 감행했다. 감행이라고 한 건 그가 서반아어를 구사하지 못했는데 멕시코는 영어가 통용되는 곳이 아니고, 멕시코지사의 실적이 경쟁사보다 크게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지사장으로 그는 멕시코뿐 아니라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등의 영업을 책임지게 됐다. 출근 전 아침에 서반아어 개인 교습을 받았다. 본사에서 고부가가치 하이인치(17~20인치) 제품 목표치를 전년 대비 두 배로 올린 상황이어서 거래선 발굴에 집중했다. 멕시코 전역에 수십 개의 소매점을 두고 젊은 층을 대상으로 고인치 타이어를 판매하는 거래선(UHP)을 집중 공략했다. 줄담배를 즐기는 거래선에게 '동질감'을 주기 위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그렇게 해서 주문의 90% 이상이 고부가가치 제품인 거래선을 뚫었다. 그는 멕시코지사장 부임 1년 만에 매출을 60% 이상 늘리고, 2011년 매출 1억 달러를 넘겨 멕시코 시장 수입 타이어 점유율 1위에 올랐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제48회 무역의 날 행사'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멕시코지사 부임, 거래선 발굴 집중
동질감 주기 위해 끊은 담배 물기도
고부가가치 제품인 거래선 뚫어 성과
2011년 매출 1억 달러 '국무총리 표창'

염 전 법인장은 매년 유서를 쓴다. 10여 년 전 과장 직무 교육 중 재테크 강사의 제안을 매년 실행한다. 재산 내역, 은행 계좌와 비밀번호 등을 USB에 담아 가족에게 남긴다. 그는 독일법인장 재직 중 금호타이어 지배 구조가 바뀌는 과정에서 회사를 떠나게 됐다. 최근 유서에서 아내에게는 "정말 어려웠던 독일에서 몇 년간 두 딸과 남편을 돌봐준 것에 정말 감사한다"는 뜻을 전했다. 보스턴칼리지를 졸업한 첫째 딸, 스탠포드대에 재학 중인 둘째 딸에게는 "아빠는 용인 천주교 묘지에 묻어 달라" 그리고 "너희들은 세계를 넘나드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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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호석 전 법인장은 지난 7월 저서 '글로벌 러시'를 펴내 자신의 해외 영업 경험을 공유했다. /라온북 제공

매년 유서 쓰는 염 전 법인장,
아이에 남긴 말 "세계 넘나드는 사람 되길"

염 전 법인장은 네덜란드 자동차 부품 무역회사 EQC의 독일 대표를 거쳐 지난 6월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일정실업에서 전무로 재직 중이다. 방송통신대 경영대학원 MBA 과정을 밟고 있다. 해외 주재원으로 삶이 인생 1막, 중소기업 임원이자 작가 생활을 인생 2막으로 본다면, 인생 3막은 고향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해외 진출을 준비하는 중소기업을 돕는 '가교' 역할을 하고자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숨을 크게 몰아쉬고 해외에 눈을 돌리고 경쟁력 있는 도시로의 진출을 꿈꿔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도화동 세 살 무렵이 나의 첫 기억
월미도 바다 보며 넓은 세상 꿈 꿨죠.
인천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줬습니다.
염 전 법인장은 자신을 '찐 인천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인천에서의 경험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저는 인천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제 첫 기억은 세 살 무렵 도화동에서 시작합니다. 인천 숭의초, 송도중, 제물포고 경험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제 삶의 일부입니다. 월미도에서 바다를 보며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꿈을 꿨습니다. 인천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해주었습니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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