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위치를 놓고 남북 학자 간 이견을 보인다. 북한학자들은 황해남도 신원군 일대로 비정하고 남한 학자들은 대부분 경기도 양주 고읍지구 일대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고구려 수도는 초기 졸본에서 시작해 집안 국내성, 환도성 그리고 평양성으로 이도하는 과정을 밟는다. 5세기 광개토대왕의 남방 공략에 힘입어 그 아들 장수왕대는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참수하며 공주로 천도케 한다.
이 시기동안 역사의 주 무대가 된 곳은 바로 아차산이다. 아차산은 경기도 구리시를 중심으로 서울 광진구, 중랑구 등과 경계를 이룬다. 아차산은 본래 아단산으로 조선 태조의 휘가 단(旦)과 겹치므로 조선시대 들어 차(且)로 바꿔 썼다는 기록이 있다.
'아단'은 무슨뜻일까. 아(阿)는 크다는 것을 지칭한 것으로 한강을 본래 '아리수'라 이름 한 것과 비교된다. 한강은 한자 표현이며 아리수는 본래 우리말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아단산의 한문표기는 '한단산' 혹은 한산(漢山)이 될 것이다.
아단산은 한산이며 이는 아차산성을 발굴할 당시 성안 건물지에서 북(北)·한(漢)·산(山) 혹은 한산(漢山)이란 명문기와의 출토로 가늠될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차성도 한성(漢城)과 같은 이름임을 알 수 있겠다.
아차산성은 조사결과 백제 신라 고성들과 비교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차산성과 연결된 능선을 따라 용마산 망우리까지 모두 17개소의 보루성으로 구축되며 또한 북쪽인 퇴계원~전두치 고개~퇴메산 그 이상으로 이어지는 장성형태란 점이다.
보루들도 만주 평양 등지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형태며 이곳에서 많은 양의 고구려 토기, 와당, 철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대동강 평양성과 한강을 낀 아차산성의 모습은 너무 흡사하다. 대동강을 해자로 하고 만수대를 중심으로 구축된 평양성은 모두 4중성이다. 아차산성도 아치울, 한다리 지역을 합치면 4중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구리 토평지역을 토성으로 구축했다면 평양성과는 너무 흡사한 모양새를 이룬다. 평양성을 일명 '장안성'이라 하고 구리 아차성 일대를 일명 '장한성'이라 하는 것도 아차산의 남평양 비정과도 관련이 있다 할 것이다.
북한 측이 주장하는 황해도 지방과 경기도 양주 고읍에는 이처럼 큰 강을 낀 천혜의 요새가 없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점을 감안, 구리 아차산성과 일대를 고구려 남평양의 고지로 비정한다. 보루 유적도 그랬지만 향후 깜짝 놀랄만한 유적 유물이 또 찾아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아직 아차산 일대의 유적은 남평양으로 장한성으로 혹은 한산으로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망우리로 연결되는 능선의 토루는 과거 많이 훼손되었고 향후 개발 사업으로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중요 유적의 훼손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고구려 역사 찾기도 독도를 지키는 이상의 애국운동이자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밑거름인 것을 위정자들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