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을 만나다·8]동구릉-수릉 (추존 익종· 신정왕후)

성군의 푸른 싹 병마에 갉혀 누런 낙엽으로

김두규 기자

발행일 2009-11-05 제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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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동구릉 오른편 초입으로 들어가다 보면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 역시 하나만 마련되어 있어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릉처럼 보이는 수릉(綏陵)이 자리잡고 있다. 수릉은 순조의 아들 익종(翼宗·1809~1830)과 그 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조씨의 합장릉이다. 일반인들은 익종과 신정왕후의 무덤이라고 하면 그들이 누구인지 잘 모를 것이다. 조선 말엽 역사에 등장하는 '조대비(趙大妃)'라고 하면 좀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즉위케 하고 흥선군으로 하여금 대원군 자격으로 섭정을 하게 한 조대비가 바로 신정왕후이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익종 임금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실제 왕으로서 통치를 한 것이 아니고 '추존(追尊)된 왕'이어서 조선왕의 계보에서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추존왕이란 생전에는 왕이 아니었으나 죽어서 왕이 된 경우를 말한다. 누구나가 그러한 추존왕의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생전에 세자였으나 왕이 되지 못한 채 죽고 난 뒤,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을 때에 한정된다. 그리고 익종은 대한제국 성립후 1899년 '문조익(文祖翼) 황제'로 다시 추존되기에 이른다.

   
▲ 조선 제24대왕 헌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익종과 신정왕후 조씨의 합장릉인 수릉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으로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의거해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됐다.

# 큰 뜻 펼치지 못하고 요절한 추존왕

익종(효명세자)은 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의 큰 아들이자 24대 왕 헌종의 아버지로, 1812년(순조 12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1827년(순조 27)에는 19세의 나이로 부왕인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효명세자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을 시기에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도정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돼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했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원래 몸이 약했던 그는 아들을 얻은 이후 더욱 자주 의원에게 처방을 받아야 했고, 결국 1830년(순조 30) 5월 6일 22세의 젊은 나이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요절한다.

# 명당을 찾아 헤맨 아버지의 자식사랑

순조임금은 아들(익종)이 죽자 그의 시호를 '효명(孝明)', 묘호를 '연경(延慶)'으로 내리고, 조선 최고의 길지를 찾아 장지로 정하도록 하는데 온 정성을 쏟는다. 마치 조선 초기 세조임금이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아들의 장지를 찾아 40여 일 동안 경기도 일대를 직접 돌아다닌 끝에 현재의 서오릉(고양)에 최종 자리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순조도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을 위해 그러한 정성을 쏟는다.

처음에 장지로 결정된 곳은 능동(陵洞)의 도장곡(道莊谷)인데, 현재 능동 어린이대공원 일대이다. 이곳을 장지로 정하고 산릉 조성작업을 진행하던 중 혈처 주변에서 5기의 옛 무덤 흔적과 유골이 발견된다. 묵묘(古墓)와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땅이 길지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산릉작업을 계속할 수 없다. 순조임금은 땅을 더 깊이 파서 진토(眞土)가 나오면 장사를 지내려고 했으나 반대의견이 더 많아 작업을 중단시키고 다른 곳을 찾게 한다. 장지로 다시 잡은 곳은 양주(楊州)의 천장산(天藏山·경희대 뒷산) 아래로 의릉(경종 임금 의릉) 근처였다. 한때 안기부가 자리해 출입이 금지되던 곳이었는데 현재는 안기부가 옮겨나가고 그간에 훼손된 능역이 많이 복원된 덕분에 대략적으로나마 수릉의 터가 어디인지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로부터 5년 뒤 순조임금이 죽고 그의 손자인 헌종(憲宗)이 1835년 즉위한다. 헌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아버지 효명세자는 익종(翼宗)으로 추존되고 무덤이름도 '수릉'이라는 왕릉으로 격상된다.
   
▲ 금관조복에 얼굴이 길쭉하고 눈과 입술이 가늘게 표현된 수릉의 문인석.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에서 조선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성을 볼 수 있다.

# 헌종· 철종때 두번의 천릉(遷陵)거쳐 동구릉에 안장

동대문구 이문동 의릉 근처(옛날 안기부터)에 있던 수릉은 두 번의 천릉(능을 옮김)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풍수지리 때문이었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질문 하나 던지겠다. 아버지가, 먼저 죽은 아들을 위해 잡은 무덤 자리가 더 좋을까? 아니면 아들이 잡은 아버지의 무덤자리가 더 좋을까? 그리고 아들(익종)에 대한 아버지(순조)의 애틋한 마음이 더 클까, 아니면 아들(헌종)의 아버지(익종)에 대한 효심이 더 애틋할까? 할아버지가 잡은 자리가 손자에 의해 부정되었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다.

익종의 아들인 헌종은 할아버지 순조가 잡은 아버지 무덤 터에 대해서 "국세가 산만하여 마음이 늘 불안하다"며 이장을 하게 한다. 헌종 12년(1846)에 헌종이 직접 양주의 용마봉(龍馬峰·광진구 용마산) 자락으로 이장을 시킨다. 그로부터 10년 후, 헌종에 이어 보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 6년(1855), 스물다섯의 나이의 임금이 수릉 재이장을 명한다. 그 이유가 '큰 비가 올 때마다 재실 앞이 범람하기 때문'이었다고 국조보감은 기록하고 있다. 과연 큰 비의 탓만이었을까?

철종은 일찍이 강화도로 귀양을 가서 농사만 짓고 살았기 때문에 이전의 풍수에 능했던 임금(세종, 세조, 정조)과 같은 풍수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왕이었다. 풍수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철종의 전임자인 헌종임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왕실에서 익종의 무덤 이장을 주장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당연히 왕실의 큰 어른이 된 익종의 부인 조대비(신정왕후)였다.

조대비는 남편인 익종보다 1년 먼저 태어나지만, 익종보다 60년을 더 살아 1890년에 죽는다. 조대비의 아들 헌종은 임금으로 재위할 때 많은 여자를 거느렸지만 숙의 김씨에게서 딸(옹주) 하나만 낳았을 뿐이다. 그 딸마저 일찍 죽는다. 조대비는 할머니로서 그토록 갈망하던 손자를 생전에 안아보지 못한 것이다. 또 정조-순조-익종-헌종으로 이어지는 왕들의 후손은 거의 없어서 궁궐에 왕손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풍수상 조상 묘가 흉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천릉을 한 용마산 자락의 땅은 큰 비가 오면 재실 앞까지 물이 차오른다고 한 것이다. 결국 조대비 입장에서는 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자리는 자기도 죽으면 묻혀야 할 자리이다. 철종으로 하여금 천릉을 지시하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로 이장하게 된 자리가 바로 현재의 동구릉이었다. 동구릉 자리로 이장지가 결정되자 철종 임금은 수릉에 대한 진향문(進香文)을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장하게 될 자리가 진실로 좋은 곳이어서 여덟 능(陵)의 영혼이 달빛 아래 노니는 자리이니,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에 거의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또 황형(皇兄·익종과 철종은 항렬이 같고, 익종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형이라고 부른 것이다)의 효성에 감동된 소치이니, 황형께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도와준 것입니다."

이렇듯 동구릉에는 기존에 여덟 개의 능이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익종과 조대비의 무덤인 수릉이 들어감으로써 아홉 개의 능이 됐다.

글/김두규 우석대교수 eulekim@hanmail.net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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