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하는 역사, 철도

[질주하는 역사 철도·15]경기 실학 1번지 '수인선 일리역'

철길따라 남겨진 지성들의 흔적과 만나다
   
▲ 한대앞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옛 첨성리에 자리잡고 있는 성호기념관 전경.

[경인일보=글·사진┃조성면(문학평론가·인하대 강의교수)]기차에 등급이 있듯 독서에도 레벨이 있다. 책과 내가 하나가 되는 책인합일(冊人合一)의 문자선(文字禪)이 최상의 경지라면, 세상에 유익을 주고 세계를 경영하고자 하는 경세적(經世的) 책읽기는 공리적 독서의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이름난 세계적 독서가들의 독서론들이 많고 많지만, 이 중에서도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독서철학은 단연 발군이다. 이른바 '한 선비가 책을 읽으면 혜택이 사해에 미치며 그 공이 만세에 드리운다(一士讀書 澤及四海 功垂萬歲)'는 연암의 이 삼엄한 독서론은 그저 직업적으로 책보고 습관적으로 연구하는 동시대 학자와 책벌레들에게 책읽기의 의미와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매서운 회초리와 같다.

연암이 이 같은 공리적·실천적 독서론을 바탕으로 한국 실학의 한 축인 이용후생의 북학파를 이끌었다면, 성호 이익(1681~1763)은 독서를 통해 한국 실학의 양대 산맥인 경세치용 학파를 이끈 조선후기 최고의 실천적 독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호는 남인 명문의 후손으로 대사헌을 지냈던 아버지 이하진(1628~1682)이 숙종 6년(1680) 경신출척으로 진주목사로 좌천되고,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돼 왔을 때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가족 모두가 성호가의 영지인 성호장과 선묘가 있는 안산 첨성리, 즉 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내려왔고 성호는 이곳에서 평생을 독서와 학문에 매진하였다.

   
▲ 수인선의 종착역이었던 한대앞역.

성호가 출사에 뜻을 접고 평생을 독서에 주력하게 된 것은 중형(仲兄) 이잠(1660~1706)이 노론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 당하는 등의 정치적 어려움과 붕당정치에 대한 환멸 그리고 부친이 연경에서 사온 수천 권의 장서가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주이씨가(驪州李氏家)가 처한 불우한 정치적 환경과 학문적 인프라가 성호를 최고의 독서인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독서는 산림처사를 자처했던 일사(逸士)들처럼 자폐적이거나 도피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실용적이고 경세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사농합일·균전제·삼한정통론·천문학 등에 걸쳐 대단히 현실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권철신·이가환·정약전·정약용 등을 비롯하여 안정복·윤동규·황덕길·허전 등 조선후기 사상사를 빛낸 실학자들을 키워냈던 것이다.



한파가 잠시 주춤거리던 1월 중순 수인선 일리역의 자취를 추적해가다가 근동의 성호선생 묘소를 찾았다. 단아하고 빈틈없는 비명의 서체에 끌려 가만히 살펴보니 비문은 번암 채제공(1720~1799)이요, 글씨는 검여 유희강(1911~1976)의 솜씨다. 채제공은 정조시대 남인의 지도자이자 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로 경기감사 시절 몸소 이곳 일리까지 성호를 찾아 뵌 적이 있었고 영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 성호를 기리며 비문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비문은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967년에 세워진 것이다.

   
▲ 성호 이익의 묘비.

검여 유희강은 인천이 낳은 불세출의 서예가로 '향토인천 안내'(1959)를 펴낼 정도로 인천의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조예와 애정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검여는 서예가로 한참 성가를 높이고 있을 때 뇌출혈로 오른손과 우반신이 마비되는 시련을 딛고 일어서 왼손으로 작품활동을 한, 이른바 그 유명한 좌수서(左手書)라는 미증유의 신화를 남긴 문화예술인이다.

수인선 정식 정거장인 일리역은 본래 4호선 한대앞역에서 수원 방향으로 100m쯤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산~금정간의 전철공사 때 한대앞역이 생기면서 일리역은 1994년 9월부터 1995년 12월 31일 수인선이 폐선될 때까지 종착역의 역할을 하였다. 1937년 수인선 부설 당시 이 일대를 선촌(船村)이라고도 했는데, 그것은 이 근방의 매화동까지 배가 들어와서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성호기념관과 묘역은 일리역 또는 한대앞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옛 첨성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첨성(瞻星)이란 말은 말 그대로 별과 천문을 살핀다는 것이다. '성호사설'에 보면, 천문에 관한 글이 유독 많은데 이 또한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 성호 선생을 기리는 사당 이름이 '첨성사'인 것도 지명과 선생의 천문학 연구의 성과를 고려하여 붙였거니 하며 짐짓 아는 체를 했는데, 성호 선생님께서 백성을 위해 늘 천문을 살피고 정확한 농사의 시기를 가늠하셨기에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첨성사'란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게 관리인 할머님들의 말씀이다. 토지문제와 간척지 개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성호의 행장을 고려해 볼 때 관리인 할머님들의 말씀에 더 공감이 간다.

   
▲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피고 정확한 농사의 시기를 가늠했다는 성호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첨성사'.

그런데 첨성사의 현판과 경호재(景湖齋)란 재실의 현판에 새겨진 글씨도 범상치 않았다.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대쪽 같은 선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전형적인 학자풍의 글씨다. 염치불구하고 관리인 할머니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경호재라는 말은 성호 선생이라는 우뚝한 사상가를 멋진 경치처럼 우러러 받든다는 뜻이라고 일러주시면서 글씨가 누구 것인지는 모르겠다며 다시 분주한 손길을 놀린다.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 한참 동안을 낙관과 유인을 살피고 뜯어보았는데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낙심하고 입맛을 다시며 성호기념관으로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뜻밖에 이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기념관에 전시된 현판의 원본을 발견한 것이다. 주인공은 바로 청명 임창순(1914~1999) 선생이었다. 청명 선생은 '지곡서당'으로 알려진 태동고전연구소를 세워 전통학문의 맥을 이었으며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4월혁명, 이른바 4·19 교수시위를 주도했던 실천적 한학자요 지식인이었다.

   
▲ 청명 임창순 선생이 직접 쓴 첨성사 현판.

추운 날씨에 언 발로 눈길을 밟는 후학이 기특했음인가. 수인선의 이름 없는 작은 일리역 주변에서 한국의 대표지성들을 만나는 큰 홍복을 누렸다. 만유가 한 체성이요, 사생일신(四生一身)이라더니 과연 모든 것은 서로 하나로 통하고 연결된다. 이처럼 진리는 때로 크고 작고 좁으며 일상적이면서 신비하고 무섭다. 이 우주와 진리 앞에서 숨을 곳은 없으니 겸손하고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수인선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경기실학 1번지 한대앞역에서 다시 온 길을 되짚는다. 기온이 더 떨어지고 한파가 기승을 부리지만 결국 그 끝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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