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료의료봉사·문예지원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이종윤 공무국장 日 신문경력 '인쇄업 선구자' 별칭
엄흥섭 편집국장은 단편 '새벽바다'쓴 소설가 유명
해방 뒤 경인지역의 첫 우리말 신문인 대중일보에는 송수안을 비롯해 각계에서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각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대중일보가 왜 탄탄한 기반을 갖출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쉽다. 자본주와 인쇄인, 기자들의 이력이 화려했다.
대중일보 사장 고주철은 인천에서 유명한 의사였다. 인천언론인클럽이 낸 '인천언론사'는 고주철을 '인천에서 알아주는 알부자'로 '사회봉사에 앞장섰다'고 기록했다.
1921년 11월 4일 동아일보는 '고주철군 전별회'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는데, 그 내용은 '인천 청년 의사계에 명성이 있는 고주철이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 중 환자 무료치료를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고주철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고유섭의 숙부였다. 이 때문에 문화·예술 쪽의 행사에도 후원을 많이 했다. 요즘말로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창간 이사장 송수안은 1936년 일본어신문인 조선시보 인천지사장을 맡으면서 언론계와 첫 인연을 맺었다.
또 1940년 3월에는 매일신보 인천지사장을 지낸 것으로 '신문백년인물사전'(1988년)에 나와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신문 보급의 중요성과 기술을 익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당시에 일제 논리를 대변하는 신문을 취급하면서 조선인으로 겪었을 내적 아픔은, 그가 지역신문을 낼 때 중요한 자양분으로 삼았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창간 공무국장 이종윤은 일본 도쿄고등공예학교 인쇄과를 나왔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에서 근무한 뒤 1927년부터 선영사라는 이름의 인쇄소를 운영했다. '인쇄업의 선구자'라는 별칭이 있었다.
선영사는 1944년 일제에 의해 모든 시설을 징발당했지만, 이종윤은 빼앗긴 인쇄기를 1946년 미군정청에서 불하받고 대중일보 인쇄인에 취임했다.
창간 당시 인쇄인이었던 윤세원은 인천인쇄합자회사를 운영하던 인물이었다.
기자들 중에는 이름난 문인이 많았다. 편집국장 엄흥섭은 1930년대 단편 '새벽바다'를 쓴 소설가였다.
문화부장 김도인은 월간잡지인 '월미'를 발행하고 각종 연극·교육 사업에 참여했다. 진종혁은 문학동인지 '습작시대'의 발행·편집인이었고, 여기에 엄흥섭, 김도인이 참여했다.
대중일보는 창간호에서 시인이자 평론가인 임화가 쓴 축시를 게재했다. 임화는 '자유 언론의 사용'이라는 제목의 창간 축시에서 "우리 조선의 서쪽 관문인 인천항에 자유의 소리를 전하는 신문이 탄생함은 경축할 일", "우리민족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근로대중의 행복의 옹호와 증진에 기여하는 것만이 언론의 자유가 진실로 자기의 진가를 발휘하는 방도"라고 썼다.
대중일보 창간 이듬해 기자로 입사한 김응태, 이벽은 훗날 경인 언론의 거목으로 성장한다.
김응태는 인천신보, 주간인천, 인천신문을 거쳐 경기일보 부사장에 올랐다. 이벽은 인천신보, 동양통신, 경기일보 편집부국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이들 2명은 1973년 정부에 의한 언론통합이 이뤄지면서 언론계를 떠나게 된다.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