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대욱 (전 경기도박물관장)
[경인일보=]광교산은 백두대간 13정맥 중 하나인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주봉(主峰)이다. 한남정맥은 경기수부지역인 수원을 비롯한 용인, 광주, 과천, 안양, 의왕, 부천, 시흥, 김포, 화성, 오산, 평택, 안성 등 경기남부권 일원을 포용하면서 한강수계와 서해수계의 분수령을 이룬 경기산하의 모체다.

한양에 경기도 행정의 본산인 관찰부와 도청이 자리하고 있을 때인 조선왕조 이래 1960년대는 삼각산이 경기도의 진산(鎭山)으로 자리를 지켰으나 이제는 광교산이 경기도의 진산이 되어야 하는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광교산은 백두대간 한남정맥의 주봉으로 해발 582m인 경기 중부권 산하의 상징이자 물줄기의 근원을 이루는 발원처이다. 민족사의 격동기 후삼국 쟁패기였던 서기 928년(고려 태조 11년, 후백제 견훤 37년, 신라 경순왕 2년)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친정(親征)하고 삼한통합의 벅찬 감격을 안고 송도로 귀경하는 길에 광악산전(光嶽山殿)에서 군사들을 위로할 때다. 광교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고 부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고 하며 산 이름을 명산(名山) 광교(光敎)라고 사명(賜名)한데서 유래하고 있다. 광교산에는 창성사(彰聖寺)를 비롯 89개처에 암자가 있었다고 하여 명산으로 회자되고 있다.

민족사의 이정표에서 민족중흥의 명제에 새로운 역사의식이 기지개를 켜는 1967년 6월 23일 경기도청이 광교산을 진산으로 발전하고 있는 수원으로 옮긴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광교산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 버팀목은 국난극복의 현장이라는 점이다. 임진왜란, 전화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37년 후인 1636년 또다시 북방민족인 여진족에 의해 전란을 겪어야 했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김준용 장군에 의해 광교산에서 대첩(大捷)을 거둔 역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로봉 8부능선 암벽에 새겨진 '忠襄公金俊龍戰勝地丙子淸亂公堤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충양공김준용전승지병자청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 김준용 장군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호남절도사로서 영하(營下)의 친병과 군·현의 병사를 모집, 근왕의 군사를 일으켜 광교산에서 청 태종의 사위인 양고리(揚古利)외 두 명의 대장을 살해한 격전지라는 암각문이다. 역사 기록은 결코 소홀함이 없는 것이다.

정조연간 수원의 화성(華城) 축성을 총리하던 영의정 채제공이 장군의 승첩 사실을 전해 듣고 전승지 암벽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여 굴욕의 역사 병자호란을 새롭게 조명하는 역사의 현장이 되게 하였다. 이곳의 지명이 호항곡(胡降谷:청군이 항복한 계곡)이다

광교산의 내일, '계성편시 장광설, 산색기비 청정신(溪聲便是 長廣舌 山色豈非 淸淨身)' 광교산의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역사의 소리를 토해내는 장광설이 되고, 산빛은 예나 이제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한결 같은 청정한 산빛으로 남기를 기원하면서 자연 그대로를 최고 경지의 통로(通路)라고 갈파한 장자(莊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화두(話頭)를 여적으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