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

[풍경이 있는 에세이] 숙덕숙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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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소설가
조카는 이제 스무 살이다. 대학교 1학년. 학교 근처 원룸을 구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우리 집엘 들렀다. 스무 살이 다 가기 전에 보디 프로필 사진을 찍는 것이 목표라며 요즘 한참 운동 중이란다. "허벅지 근육이랑 복근도 만들 거예요. 상상만 해도 신나요. 가늘어서 예쁜 다리보다 근육으로 탄탄한 다리가 훨씬 멋지잖아요!", 그래, 맞는 말이야! 나도 함께 신이 나서 떠들었다. 말라깽이 다이어트가 뭐가 좋아. 건강하고 단단한 몸이 훨씬 더 예쁘지. 침대를 놓고 나면 낮은 테이블 하나 놓고 바닥에 앉을 자리도 부족할 것 같다는 방 한 개를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55만원으로 계약했단다. 월 관리비도 6만원을 더 내야 하고 전기요금과 수도요금도 별도라니 월 70만원은 우습게 나갈 판이지만 그래도 첫 자취생활의 꿈에 부푼 이 스무 살 여자아이는 휴대폰으로 테이블과 스탠드, 빨래바구니를 검색하며 마냥 기뻐한다. 나는 또 그게 뭐라고 같이 설렌다.

"그런데, 이모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실은 양궁 국가대표 선수를 둘러싸고 터져 나온 온라인 학대 때문이었다. 쇼트컷에 여대 출신이라 페미(니스트)일 거란 우스꽝스러운 억지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웅앵웅, 오조오억이라는 단어가 남성 혐오를 뜻한다며 금메달을 박탈하라는 둥 끝도 없이 퍼지는 온라인 학대가 진정, 이 시대를 사는 20대의 심정 한 축인지 물어보고 싶었던 거다. 

 

숨어서 안산 선수를 '온라인 학대'
언론이든 어디든 대꾸해 주니까
제대로 된 소리라고 착각하고 더 해


"너희들, 그러니까 너희 과 남학생들이 실제로 이런 소리를 하기는 해? 이게 그냥 몇몇 키보드워리어들의 장난질인지 진짜 20대 남자아이들의 생각인지 이모는 그게 정말 궁금해."

조카가 피식 웃는다.

"이모, 걔들은 다 숨어 있어요."

숨어 있다고?

"밖에 나와서 그런 말 못 하죠. 친구들 앞에선 아무 말 안 해요. 그냥 숨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대체 누가 그러는지 우린 알 수가 없어요. 20대 남자애들이 그런다 하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나도 조카처럼 피식 웃었다. 숨어 있다고 해서 그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은 안다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그냥 숙덕거리게 내버려 뒀어야
적어도 '혐오' 의미 제대로 알았으면


안산 선수의 일을 지켜보며 나는 '혐오'의 의미에 관해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혐오는 '폭력'과 '학대'를 포함한다. 아우, 난 쟤가 너무 싫어, 하고 하소연하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 이어졌던 유색인종 차별에 관해 잘 알고 있다. 백인들은 아주 오래 유색인종들을 혐오했고 그것은 폭력과 학대로 이어졌다. 폭력과 학대를 당한 유색인종들은 백인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우리가 그것을 두고 '백인 혐오'라 부르지는 않는다. 애초 폭력과 학대로 이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취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폭력, 학대로 이어졌기 때문이고 쉽게 말해 그것이 강자와 약자의 구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을 혐오하는 이성애자들을 미워해봤자 그건 여태 '저항'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웅앵웅'과 '오조오억'이 여태 남성 혐오가 될 수 없는 이유다. 그건 수많은 통계가 설명한다. 통계는 '팩트'다.

일련의 사태를 접한 친구의 반응은 이러했다.

"누가 그런 소릴 하면 저리 가서 놀아, 라고 하던가 보호자 분 어디 계세요, 하면 되는 거야. 언론이든 어디든 대꾸해주니까 그게 제대로 된 소리라고 착각하고 더 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조카의 말처럼 숨어서 숙덕거리고 말게 두었어야 하는데. 그런데도 내가 지면을 빌려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적어도 '혐오'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썼으면 해서. 그래서.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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