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여배우와 엘긴 마블

바흐 음악만큼 영화에 많이 쓰이는 경우도 드물다. 줄스 다신 감독의 '페드라'도 그중 하나다. 1962년 작. 국내 상영시 제목은 '죽어도 좋아'였다. 앳된 알렉시스 (안소니 퍼킨스 분)가 스포츠카를 몰고 '페드라!' 를 외치며 죽음을 향해 절벽 너머로 질주하는 엔딩은 지금 봐도 가슴이 저민다. 그때 흘러나오는 곡이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다. 영화는 미국과는 달리 유럽과 한국에서는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이유가 있다. 페드라역을 맡은 멜리나 메르쿠리의 농염한 연기 덕분이다. 그리스 출신인 그녀는 다신 감독의 아내이며 그리스 민주화의 영웅이기도 했다. 훗날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문화부 장관도 지냈다.배우로서 전성기였던 1962년 메르쿠리는 런던을 방문했다가 대영박물관에서 '엘긴 마블'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엘긴 마블'은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외벽에 만들어진 수십 개의 사람 모양 조각을 비롯한 200여 점의 그리스 조각물. 영국은 이 조각물들을 1801년부터 1812년 사이 부조 길이의 절반에 해당하는 구간을 통째로 뜯어내 대영박물관에 전시해 왔다.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 조각물을 런던으로 이송하는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오스만제국 주재 영국 대사 토머스 엘긴이었다.메르쿠리는 장관이 된 후, '엘긴 마블'이 그리스로 돌아오면 전시할 박물관까지 지어놓고 반환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1994년 74세 일기로 눈을 감는다. 다신 감독은 아내를 기리며 '멜리나 메르쿠리 재단'을 설립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 문화재의 반환운동을 주도했지만, 그 역시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8년 세상을 떠났다.'엘긴 마블'을 둘러싸고 그리스와 영국은 오랜 시간 갈등을 빚어왔다. 그리스정부의 반환 요구에 영국 정부와 대영박물관 측은 '엘긴 마블'이 그리스만이 아닌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며, 대기오염으로 악명높은 아테네에 돌려줄 경우 훼손이 우려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내세우며 반환을 거부해 왔다. 하지만 영국이 EU(유럽연합) 탈퇴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조짐이 보인다. 영국과의 무역 협상을 준비 중인 EU 27개 회원국 측이 협상문에 '영국이 불법적으로 약탈해간 문화재를 반환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국민은 물론 메르쿠리의 평생소원이던 '엘긴 마블'의 귀환이 이뤄질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이영재 주필

2020-02-23 이영재

[참성단]프레임 전쟁

선거는 프레임 전쟁이라고 한다. 프레임이란 '정치·사회적 의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본질과 의미, 사건과 사실 사이의 관계를 정하는 직관적인 틀'을 말한다. 그 힘이 너무 강력해 보수건, 진보건 프레임 앞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남부의 작은 주 아칸소 주지사를 지낸 '40대 촌뜨기' 빌 클린턴이 조지 H W 부시에게 승리를 거둔 건 경제 프레임 덕이 컸다.클린턴은 구소련 붕괴에 따른 외교적 수혜, 여기에 1차 걸프전 승리로 지지율이 한때 90%까지 치솟았던 부시를 정상적 선거전략으론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클린턴 진영은 부시의 강점은 무시하고, 약점인 경제 성과를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한 줄의 프레임 속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늙은 부시 vs 젊은 클린턴'이란 프레임을 하나 더 추가했다. 스트레이트 한 방, 어퍼컷 한 방에 부시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로 유명한 '프레임 이론'의 창시자 조지 레이코프는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정당의 개별 정책이나 후보의 도덕성이 아닌 프레임에 있다고 주장한다. 전략적으로 짜인 틀을 제시해 대중의 사고 틀을 먼저 규정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며, 이 제시된 틀을 반박하려다가는 역으로 해당 프레임을 강화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레이코프는 미국의 진보 세력이 선거에서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를 프레임의 부재 또는 실패에서 찾았다. 평범한 사람들, 심지어 진보적인 시민들까지도 공화당에 투표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진보세력이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할 프레임을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거에서 이렇게 상대의 프레임에 말려들면 백전백패란 뜻이다.더불어 민주당 강서갑 지역구 공천경쟁이 '조국수호'란 프레임 속에 갇힌 꼴이 됐다. 금태섭 의원이 "총선을 '조국수호'총선으로 치를 수 없다"고 한 게 발단이었다. 여론이 금 의원 쪽으로 흐르는 듯하자 김남국 변호사는 자신의 출마를 '노무현 정신'에 따른 것이라며 '노무현 정신'이란 프레임을 들고 나왔다. '조국수호'와 '노무현 정신' 두 프레임이 맞붙은 것이다. 여당 경선이 이 정도인데, 4·15 총선에선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프레임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번 총선은 누가 상대방을 프레임 속에 잘 가두고, 또는 누가 그 프레임에 빠지지 않고 잘 피하는가에 따라 금배지의 향방이 결정된다. /이영재 주필

2020-02-20 이영재

[참성단]공천 놀음

정치 선진국에선 선거를 코앞에 두고 '공천 물갈이'나 '공천 학살', 심지어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자객 공천'같은 반민주적인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리 권한이 막강한 당 대표라 해도 지구 당원 의사에 반해 마음대로 현역 의원을 잘라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처럼 안정된 민주사회에선 누구든 소속정당의 지역활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자연스럽게 의회로 진출하게 되고, 심지어 총리도 할 수 있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도 그랬고 존 메이저도 테리사 메이도 그랬다. 이들은 물갈이 공천으로 정치에 참여한 참신한 인물도 아니고, '영입'으로 입당한 인물도 아니다. 지역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경력을 쌓아 지역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의회에 진출해 총리까지 올랐다.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물갈이'와 '영입'이란 단어가 거부감 없이 쓰이고 있다. 현역의원이 버젓이 있는데도 '전략 공천'이란 핑계로 영입인사를 특전사 낙하산 부대처럼 지역구에 마구 떨어뜨린다. 이러니 지역에서 묵묵히 활동했던 정치 지망생들에겐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비민주적이고 후진적인 정치문화가 아닐 수 없다. 말로는 '시스템 공천''상향 공천' 운운하지만, 실제 선거가 임박해서는 모든 규칙은 무너져 뒤죽박죽이다. 이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여야 모두 '물갈이'와 '영입'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이념도 노선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지구당과의 협의라든가 지역 정서 같은 것은 아예 무시된다. 국회의원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키기 위한 절박한 전략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지만, 표만 얻을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는 식이다. 여기에 '험지 출마'라는 말이 덧씌워져 '물갈이 공천'이 자연스러운 용어가 돼버렸다. 종편 등 TV 출연으로 약간의 지명도만 있으면 아무 지역이나 마구잡이로 내려보내는 게 일상화가 됐다.교과서 같은 얘기지만, 정당이 제구실하려면 무엇보다 지역 주민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지금같이 선거가 임박해서 펼치는 공천의 행태는 정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인스턴트 정치'에 불과하다. 내가 사는 지역의 골목길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급하게 주소를 옮기고 정당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단다 한들, 이를 지역 대표라고 하기는 어렵다. 선거를 앞두고 늘 반복되는 이런 '공천 놀음'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그저 한심할 뿐이다. /이영재 주필

2020-02-19 이영재

[참성단]앵테르미탕

미당 서정주가 시를 쓰던 시절만 해도 가난은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가난은 더는 시인의 무기가 아니다. 그래도 함민복은 시 '긍정적인 밥'을 통해 시인의 가난을 이렇게 은유적으로 노래했다.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시집이 한 권 팔리면/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박리다 싶다가도/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몇 해 전 최영미 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연간소득 1천300만원 미만의 무주택자라 생활보호 대상자가 됐다"며 "세무서로부터 근로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비참한 생활고를 밝힌 적이 있다. 50만권이 넘게 팔린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의 슬픈 고백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시인만 가난한 게 아니다. 몇몇 스타급 예술가를 빼곤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도 무명시절 영화 '호텔 선인장' 조연출을 하면서 1년 10개월 동안 650만원의 연출료로 생활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더불어민주당이 가난한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형 앵테르미탕' 를 도입하겠다는 총선 공약을 내놨다. '불규칙적' 이란 뜻의 '앵테르미탕'은 문화예술인의 생계 안정을 위해 프랑스 드골 정부 때부터 시행하고 있는 실업급여제도. 봉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얹혀가겠다는 얄팍한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 미안하게도 이 공약이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이미 우리에겐 '최고은 법'이라는 예술인복지법이 있기 때문이다.2011년 1월 33세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은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다면 저희집 문 좀 두드려 달라'는 쪽지를 남긴 채 굶주림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졌다. 충격적인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가난한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돕겠다며 당시 이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났어도 예술인들의 가난은 도무지 나아진 것이 없다. 선거를 앞두고 마구 쏟아내는 포퓰리즘 공약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영재 주필

2020-02-18 이영재

[참성단]'표현의 자유'

2018년 10월 더불어민주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북한군 침투설', '문재인 대통령 건강 이상설' 등 100여건의 유튜브 동영상 삭제를 구글코리아에 요청했다. 구글코리아는 "현재 진행되는 사건에 대한 '진실'은 파악되기가 종종 어렵다. 또한 언제나 옳거나 그르거나의 이분법적이지 않다"며 삭제 요청을 거부했다. 이에 민주당 가짜뉴스 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 박광온 의원은 "불량식품이 가게에서 팔리는데 가게 주인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한국 여당의 가짜뉴스 삭제 요구에 구글은 '표현의 자유'로 맞섰다."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볼테르 사상이 아니더라도, '표현의 자유' 없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없다. 중국의 '코로나19 대참사'도 신종 바이러스 출현을 알린 젊은 의사 리원량의 입을 막은데서 비롯됐다. 시진핑의 공산당이 세운 통제와 검열의 장벽 뒤에서 코로나19는 세계로 번지고, 리원량 등 중국 인민 1천700여명이 사망했고, 죽음의 행렬은 진행중이다.그런데 중국도 북한도 아닌 한국에서, 그것도 진보정권의 여당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시비에 걸린 최근 상황은 낯설고 당혹스럽다. 임미리 고대 교수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 '민주당만 빼고'가 두고 두고 민주당의 올가미가 될 전망이다. 민주당은 임 교수와 경향신문을 고발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정당이 됐다. 사과 없이 고발을 취소하면서 임 교수를 '안철수 사람'으로 낙인찍고, 지지자들의 임 교수 신상털기를 방치함으로써 오만한 정당이 됐다. 진보 진영 내부에 '#민주당만 빼고'에 동참하는 '반문'의 세력화가 뚜렷해졌다. 이낙연 선대위원장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임 교수가 수용했지만, 여당과 정권의 상처는 깊다.인종차별이나 아동포르노와 같은 반사회적, 비인간적 영역에선 표현의 자유도 제한받는다. 하지만 권력에 대해서는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제한되는 순간, 전체주의와 홍위병이 싹튼다. 민주화운동의 주역인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표현의 자유'에 담긴 자유민주주의의 함의를 모를리 없다. 그런데 정권 비판에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정권의 도덕적 권위 붕괴에 따른 피해망상이나 강박증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윤인수 논설실장

2020-02-17 윤인수

[참성단]소매업의 종말

지난 11일 미국 델라웨어 주 연방 법원은 운영자금 부족으로 파산을 신청한 '포에버 21' 매각 방안을 최종 승인했다. 지난 9월 파산신청 한 지 5개월 만이다. '포에버 21'은 1984년 무일푼의 장도원·장진숙 부부가 창업해 미 교포들 사이에선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던 유명 의류회사다. 한때 세계 57개국에 800개가 넘는 매장을 가질 정도로 패스트패션 브랜드의 대명사로 자리 잡을 만큼 성장했다. 2015년 매출이 44억 달러(약 5조 2천억 원)로 자라·H&M 등 세계적 브랜드를 누르고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 회사가 단돈 8천만 달러(1천억 원)에 넘어간 것이다.'포에버 21'의 실패원인은 방만한 경영, 유사업체와의 경쟁 등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신규업체의 온라인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 내에서 온라인 공세에 밀려 폐업한 오프라인 매장은 한둘이 아니다. 125년 전통의 미국 백화점 시어스, 100년 역사의 바니스 뉴욕도 영업을 중단했다. 미국 최대 완구점인 토이저러스, 저가 신발 유통업체 페이리스 슈소스, 아동의류 전문점 짐보리 등도 폐업에 동참했다. 이를 두고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소매업의 종말(retail apocalypse)'이라고 지적하고 있다.공교롭게도 '포에버 21'이 파산신청을 냈던 지난해 9월 중소기업연구원이 '온라인 거래의 특징 및 시사점' 보고서를 낸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보고서는 '소상공인과 중소기업도 급변하는 유통환경을 고려해 온라인 쇼핑산업으로 진출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유통업의 흐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소매업의 종말'이라고 규정하고 '온라인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유통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경영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그 경고가 현실이 됐다. 롯데쇼핑이 2~3년 이내에 백화점, 마트, 슈퍼 등 700여 곳의 오프라인 매장 중 200여 곳을 정리한다고 발표했다. 모든 게 온라인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데 너무 오랫동안 오프라인 시장에 머무른 게 롯데의 실적악화를 불렀다. 매장이 문을 닫으면 수천명의 일자리도 사라질 전망이다. 롯데의 이런 결정이 유통업계의 본격적인 구조조정의 신호탄이 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소매업의 종말'이라는 불안한 징후가 우리 경제를 엄습하고 있다. / 이영재 주필

2020-02-16 이영재

[참성단]연주가와 악기

50세에 요절한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병균을 옮거나, 손가락이 다칠까 봐 아무하고나 악수를 하지 않았다. 피아노 선택도 까다로웠다. '굴드의 피아노'의 저자 케이티 헤프너는 '굴드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빛을 쏟아내는, 맑고 투명한 소리를 찾아 헤맸다'고 적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타인웨이앤드선스의 'CD 318'을 만났다. 굴드는 이 피아노를 자신의 손에 익숙하게 길들이는 데 7년이 걸렸다.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피아노 들고 다니는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다. 해외 공연마다 자신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물론, 전속 조율사까지 대동하는 '지구 최강의 까다로운 연주자'로 통한다. 2006년 미국 카네기홀 연주를 위해 뉴욕 JFK공항에 입국하려다 피아노를 폭발물로 의심한 세관의 착각으로 피아노가 심하게 부서지는 '사고'를 겪은 후, 피아노를 직접 분해한 뒤 현지에서 조립하고 조율까지 하며 사용했다. 이 모두 무결점에 가까운 연주를 선보이고 싶은 연주가들의 까다롭고 예민한 성격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연주가가 그런 건 아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1960년대를 풍미했던 '현대의 리스트'라 불리던 리히테르는 달랐다. 71세였던 1986년 그는 홀로 자동차를 몰고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역사적인 대륙 횡단 연주회를 가졌다. 작은 도시, 시골 마을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낡고 조율이 덜 된 피아노에서 감동의 선율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연주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자타가 공인하는 21세기 최고의 바흐 연주가인 피아니스트 안젤라 휴이트가 레코딩할 때 늘 사용하던 '파치올리 피아노'가 운반 과정에서 실수로 떨어뜨려 완전히 파손돼 그녀가 깊은 슬픔에 빠졌다는 소식이 요즘 클래식계의 화제다. 이탈리아 명가 파치올리가 제작한 F278로 페달이 네 개나 달린 세상에 단 한대 밖에 없는 피아노다. 악기는 연주가에게 육체의 연장이다. 좋은 악기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온다. 그렇다고 좋은 악기를 연주한다고 모두 좋은 연주가는 아니다. 볼품없는 악기도 연주가를 잘 만나면 명기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연주차 런던에 들렀다가 템즈 강가에서 거지 노인의 바이올린을 멋지게 연주했다는 파가니니나 허름한 피아노로 10명의 관객 앞에서 연주한 리히테르가 그런 경우다. /이영재 주필

2020-02-13 이영재

[참성단]'짜파구리'와 '독선 정치'

아카데미를 강타한 '봉준호'와 '기생충'의 여진이 수많은 에피소드를 낳고 있다. '짜파구리' 열풍도 그 중 하나인데 예사롭지 않다. 기생충에 등장한 짜파구리는 한우 채끝살을 토핑한 초호화 간식이다. 한 네티즌이 유행시킨 서민형 짜파구리에 한우를 얹어 양극화의 상징으로 활용한 '봉테일'의 연출은 감탄스럽다. 전세계 기생충 관객들이 짜파구리 레시피에 열광하는 것도, 영화의 주제와 여운을 미각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아닐까 싶다.짜파게티와 너구리 제조사인 농심은 신이 났다. 유튜브 채널에 11개 언어로 짜파구리 레시피 영상을 올려놓았단다. 지난해 국내에 이어 올해 국제적인 기생충 특수를 공짜로 누리니 봉 감독에게 절이라도 할 판이다. 그런데 짜파구리가 다양한 장르를 융합해 스스로 장르가 된 봉준호를 설명하는 레시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블랙코미디와 스릴러를 절묘하게 섞은 봉 감독의 기생충은 짜파게티와 너구리가 만나 새로운 맛을 창조한 짜파구리를 닮았다.짜파구리는 비빔밥처럼 무엇이든 섞고 보는 한국인의 융복합 유전자를 보여준다. 이어령은 "날것도 익힌 것도 아닌 그 중간 항(項), 자연과 문명을 서로 조합하려는 시스템 속에서 음식을 만들어 낸 것이 비빔밥"이라며 비빔밥을 '맛의 교향곡'이라고 했다. 유전자 덕분일까. 지금도 우리는 열심히 음식을 섞어 새로운 음식을 탄생시키고 있다. 레토르트 음식을 조합한 편의점 레시피가 매일 업데이트 되고, '전치찌개'는 명절 뒤 먹어야 할 메뉴가 됐다. 모든 음식을 받아들이는 김치의 수용성, 모든 식재료를 조화시키는 쌈채소의 융합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 없이 변주되고 있다.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봉준호 장르와 짜파구리 문화에 세계인들이 열광하지만, 조화와 상생의 유전자가 딱 문화분야에서만 작동하는 점은 아쉽다. 국민들은 빈부의 양극화보다 심각한 정치의 양극화에 매일 절망한다. 이어령은 과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독재는 힘으로 쓰러트릴 수 있지만 독선은 의식을 바꿔야 하기 때문에 "독선이 독재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짜파구리와 비빔밥과 전치찌개를 만들어내는 융복합의 유전자가 K-팝, K-푸드, K-무비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발현된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코리아가 아닌가. 해리스 미국 대사는 짜파구리를 먹으며 아카데미 시상식을 시청했다고 한다. 미국인도 간파한 짜파구리 정치미학을 정작 우리 정치인들만 모르니 답답한 일이다. /윤인수 논설실장

2020-02-12 윤인수

[참성단]오스카는 왜 스콜세지를 외면했나

잔치는 끝났다. 불은 꺼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무려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아이리시 맨'은 왜 단 한 개의 오스카도 받지 못했을까. '택시 드라이버' '비열한 거리' 등 영화사에 길이 빛날 명작의 감독이자 뉴욕대학 영화학과 교수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마틴. 하지만 제92회 아카데미는 그를 외면했다. 그나마 위안을 찾는다면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수상소감 중 "마틴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 공부를 했다"는 헌사, 그로인한 기립박수 정도였을 것이다.'기생충'의 기세에 눌리고 넷플릭스 영화라는 탓도 있지만, 굳이 이유 하나를 더 꼽는다면, 지난해 '마블영화'에 대해 쏟아낸 비판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에스콰이어지'와의 인터뷰에서 "마블영화는 테마파크에 가깝다. 인간의 감정이나 심리적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는 영화(cinema)가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한술 더 떠 뉴욕타임스에 '마틴 스콜세지: 나는 마블 영화가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 설명해주겠다'는 기고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나갔다'는 느낌이다.물론 마틴의 발언에 동조하는 감독들도 등장했다. 론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멍청이 같다. 마블영화에서 사람들은 웃긴 슈트를 입고 뛰어다닌다"고 말했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도 "슈퍼히어로 영화는 문화적 학살"이라고 말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지적은 더 날카로웠다. "슈퍼 히어로 영화는 서부극 장르의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서부극 장르가 죽은 시대를 살고 있다. 서부극이 쇠락의 길을 걸었듯이 슈퍼 히어로 영화도 서부극과 같은 방식으로 사라질 것이다."하지만 할리우드의 대세는 마블이라고 생각하는 팬들은 발끈했다. 이를 반영하듯 '버라이어티'지는 '아카데미 위원회의 젊은 회원들에게 반발을 살 것'이란 전망기사를 내놓았다. 이들이 마틴의 '아이리시 맨'에 우호적일 리 없으며 수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란 뜻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해 마블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를 아카데미 최초로 작품상 후보에 올려놓은 것은 아카데미 젊은 세대들의 힘이 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스카는 마틴을 외면했고, 그 영예는 고스란히 '기생충'에게 돌아갔다. 자신을 버린 '아카데미의 변신'에 77세의 거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영재 주필

2020-02-11 이영재

[참성단]'봉준호'와 '기생충'

"저는 그냥 12살 나이에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 먹었던 소심하고 어리숙한 영화광이었습니다. 이 트로피를 이렇게 손에 만지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2019년 5월 16일(한국시간),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남긴 소감이다. 국내언론은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릴 쾌거로 대서특필했다. 당시만 해도 황금종려상은 그저 기생충이 만들어 낼 기적의 서막에 불과했음을 아무도 몰랐다. 어제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봉준호와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4개부문을 석권하자 전세계 언론이 흥분했다. 뉴욕타임즈는 "한 편의 영화를 넘어선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제목 컷 하나로 기생충의 기적을 완성했다.하지만 봉준호에게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한국 영화관객들은 기생충의 기적이, 준비된 기적임을 안다. 그가 한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쏟는 피와 땀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의 그를 만든 '살인의 추억'은 경인일보 자료실에서 출발했다. 그는 "범인이 작품을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사건 당시 경인일보 보도를 샅샅이 살펴봤다. 이춘재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 암흑 같은 터널을 통해 세상에 나왔을 때, 봉준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봉준호의 어록도 그의 역량과 내공을 증명한다.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 그 언어는 영화다." 골든글로브 수상소감은 영화철학의 깊이를 보여줬다. "오스카상은 국제영화제가 아니다. 그저 로컬일 뿐"이라는 냉소로 아카데미의 폐쇄성과 제3세계 영화인의 자존심을 동시에 보여줬다. 마틴 스코세이지에 바친 헌사에선 품격이, 아카데미상 후보 지명을 '인셉션'에 비유한데서는 재치와 유머가 넘친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이 국제영화상으로 명칭이 바뀐 뒤 첫 수상자로서 "오스카가 추구하는 방향을 보여주었다"는 수상 소감은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세계 언론이 봉준호 어록을 재생하고, 할리우드 스타들이 기립박수를 보낸다. 낯설어 기분 좋은 장면들이다.기생충은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입봉한 봉준호의 일곱번째 장편영화다. 다소 빈약한 필모그래피에 아카데미가 4개 부문 오스카를 안겼다. 한 장르로 우뚝선 봉준호의 천재성 말고는 설명이 안된다. 봉준호가 2020년 2월 10일을 세계영화사에 의미있게 새겼다. /윤인수 논설실장

2020-02-10 윤인수

[참성단]롬니의 한 표

미국은 개신교의 나라다.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면서 성경에 손을 얹고, 달러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만큼 종교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도 드물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던 존 F. 케네디가 대선에 뛰어들며 했던 가장 큰 고민도 종교 문제였다. "나는 가톨릭을 대표하여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종교와 정치의 선을 그은 것도 그래서다.2008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였던 밋 롬니 상원의원은 모르몬교도다. 선거를 앞둔 각종 여론조사에서 "모르몬 교인 대통령 후보에게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답할 정도로 종교는 그에게 큰 족쇄였다. '롬니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면 대부분 국민이 '모르몬 교도'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역시 케네디가 그랬던 것처럼, 2008년 공화당 후보 경선을 앞두고 "나는 어떠한 교회의 독트린도 결코 대통령의 직무와 법의 권위 위에 놓지 않겠다"며 정·교 분리 선언을 했다. 주류사회의 거부감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이번 트럼프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공화당 의원 중 유일하게 롬니가 탄핵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롬니는 미국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찬성표를 던진 여당 상원의원으로 기록됐다. 워싱턴포스트지는 "롬니 의원은 공화당에서 외로운 목소리를 냄으로써 역사에 자신의 발자국을 뚜렷이 남겼다"고 전했고, 뉴욕타임스도 "역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라고 전했다. "탄핵소추안에서 배심원 격인 우리 상원의원들이 헌법의 의무에 등을 돌린다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며, 양심의 가책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표결 전 롬니가 울먹이며 했던 연설도 회자하고 있다.롬니를 보면서 떠오른 장면이 있다. 지난해 말 더불어 민주당과 친여 군소정당들이 밀실협상을 통해 선거법에 이어 공수처법안을 강행처리 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찬성표를 던졌던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교섭단체 대표 협상이라는 국회법상 대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 헌법 위반 소지가 다분하고 민주국가의 틀을 허물 가능성이 큰 법이 정상적인 국회 논의 과정도 없이 통과되는데도 이들 중 그 누구도 반대 목소리를 내는 국회의원은 없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큰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롬니의 한 표'가, 그래서 너무도 부럽다. /이영재 주필

2020-02-09 이영재

[참성단]매카시즘 70년

1950년 2월 9일, 공화당 여성당원대회가 열리는 미 웨스트버지니아 휠링시. 미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서류 뭉치를 흔들어 대며 "여기에는 국무성 안에서 암약하는 205명의 간첩 명단이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매카시의 이 폭탄선언은 미국 사회를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정치권과 학계는 물론 문화계 특히 할리우드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다. 미국인들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던 매카시즘은 이렇게 시작됐다.영화계와 방송계의 작가·감독·연예인 가운데 324명이 공산주의자라는 멍에를 쓰고 일자리를 잃었다. 찰리 채플린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을 떠났고, 공산당원 출신의 거장 엘리아 카잔은 좌절과 고독, 회한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극작가 아서 밀러,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도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고통을 당했다.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온 '굿 나잇 앤 굿 럭(Good night and Good luck)'은 매카시즘이 극에 달했던 당시, 언론이 어떻게 이에 대처하는지 다룬 영화다. 2005년 작. 흑백영화다. 배우로서 최정점에 오른 조지 클루니가 감독을 맡아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굿 나잇 앤 굿 럭'은 당시 미국 CBS 방송 뉴스 앵커로 명성을 날린 에드워드 머로가 진행한 뉴스 다큐멘터리 쇼의 은유적인 클로징 멘트다.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 정론을 굽히지 않았던 머로와 제작팀의 갈등과 고뇌를 그렸다.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빨갱이'로 몰릴까 감히 매카시에 대항하지 못하던 시절, 머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연하게 '자유'를 외쳤던 언론인이었다. 흑백영화로 제작한 것은 희고 검은 두 색을 대비함으로써, 두 갈래로 나뉘어 이념전쟁을 벌였던 당시 아픈 과거를 떠올리면서 현실을 직시하라는 클루니 감독의 경고로 읽힌다. 이렇게 매카시의 광풍은 무려 4년이나 지속됐다.하지만 기막힌 반전도 있다. 1990년대 소련 해체 이후 기밀문서가 하나씩 공개되면서 당시 매카시가 지목했던 미 고위관리들 일부가 진짜 소련 간첩으로 확인된 것이다. 매카시즘을 무분별한 '마녀사냥'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이래서 뒤집히는 역사는 늘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9일은 매카시의 광풍이 불어닥친 지 꼭 70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념 논쟁'과 '빨갱이' 논란이 낯설지 않은 우리에게 이날이 주는 교훈은 남다르다. / 이영재 주필

2020-02-06 이영재

[참성단]윤석열 현상

우리 주변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수없이 일어난다. 이탈리아의 '마니 풀리테'와 브라질의 '라바 자투'가 그런 경우다. '깨끗한 손'을 뜻하는 '마니 풀리테'는 1992년 이탈리아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해 벌인 '부정부패 척결작업'이다. 전체 국회의원의 25%인 177명이 조사를 받았고 4명의 전직 총리를 포함해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경제인 등 2천993명이 부패혐의로 체포됐다. "우리의 작업은 단순히 더러운 손을 솎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 투명하게 만드는 일종의 구조혁명"이라며 수사를 주도한 안토니오 피에트로 검사는 이탈리아 국민의 영웅이 됐다.차량의 묵은 때를 말끔히 벗겨 내는 분사기처럼, 뇌물·돈세탁 등 불법으로 얼룩진 브라질의 썩은 정치를 뿌리 뽑겠다는 '라바 자투(Lava Jato·고압 분사기)' 일명 '세차작전'은 '국민 판사' 세르지우 모루가 주도했다. 브라질 파라나주 연방 판사였던 그는 '마니 풀리테'를 모델로 삼아 금융범죄관련 지식으로 무장한 검사와 경찰, 국세청 직원으로 '드림팀'을 꾸렸다. 그들의 표적은 한때 90%의 국민 지지를 받았던 룰라 전 대통령. 결국, 룰라는 불법 자금 및 자산은닉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국민은 성역 없는 수사를 외치던 이 열혈 판사에 열광했다. 현재 법무부 장관인 그는 2022년 브라질 대선의 유력한 대권 주자 후보다.물론 이들의 수사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예비검속제' 폐지안으로 저항하자 검사 등 수사진과 판사들은 총사직을 내걸고 반대투쟁을 벌였고, 국민이 힘을 실어줬다. 덕분에 중선거구제가 소선거구제로 바뀌고, 비례대표제가 폐지됐다. 룰라 역시 호세프 대통령이 면책특권을 위해 장관직을 주려고 했지만, 사법부와 국민 저항에 부딪혀 이 역시 무산됐다. 모든 게 한 편의 영화처럼 전개됐다.한 신문사의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권 후보로 윤석열 검찰총장이 10.8%로 2위에 올랐다. 뜬금없는 조사와 발표에 국민과 정치권이 깜짝 놀라고 있다. 윤 총장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며 자신을 여론조사에서 빼 달라고 했지만, 국민들은 '윤석열'이란 이름이 왜 거론됐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분위기다. '윤석열 현상'은 조국이 장관에 임명된 그 순간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현실은 때론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그것이 정치영화일 경우는 특히 그렇다. /이영재 주필

2020-02-05 이영재

[참성단]팬데믹

세계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우한 폐렴) 확진 환자 수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사망자도 400명을 넘었다. 이렇게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팬데믹(pandemic)이다.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황'을 뜻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염병 경보단계를 1단계부터 6단계로 나누었는데 이중 최종 6단계를 말한다.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사람을 뜻하는 'demic'의 합성어다. 역사적으로 가장 악명 높았던 팬데믹은 1346년에 유럽 동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353년까지 유럽 전역에 급격하게 확산하며 유럽 인구 30%의 생명을 앗아간 흑사병이다. 처음엔 죽어가는 이유도 알 수 없었고, 마침내 원인을 알았을 때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모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2천만~5천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1918년 스페인 독감, 1957년 100만명이 사망한 아시아 독감, 1968년 80만명이 사망한 홍콩 독감도 팬데믹이다. 하지만 WHO가 공식적으로 '팬데믹'을 선언한 것은 2009년 6월 인플루엔자 A(H1N1) 신종플루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했을 때 딱 한 번뿐이었다.최근 넷플릭스가 '팬데믹-인플루엔자와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6부작을 방영하면서 '팬데믹'이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지난달 22일 첫 방영이 공교롭게 중국발 신종 코로나의 확산이 본격화한 시점과 맞물리면서 SNS를 중심으로 이 다큐멘터리가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방영한 넷플릭스의 기획력이 놀랍지만, 넷플릭스 측은 "최근 감염병 사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은 아니다"라며 펄쩍 뛴다.이 다큐멘터리는 치명적인 감염병의 대유행을 막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의료인, 자원봉사자들이 힘겨운 전쟁을 벌이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신종 바이러스의 주요 발병지역으로 중국을, 감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박쥐를 지목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재래식 축산업이 인간의 생명 위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가축의 공장식 집단 사육과 불결한 도축과정이 '팬데믹'의 위험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을 먹는 식습관이 남아있는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각각 코로나바이러스와 에볼라 바이러스가 발병한 것은 그래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영재 주필

2020-02-04 이영재

[참성단]시험대 오른 시진핑 주석

중국은 2018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열어 '국가주석 2연임 제한' 조항을 삭제하는 개헌을 단행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전인대 직후 중국 관영언론들은 시 주석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인민일보가 보도한 시진핑 총서기의 '금구(金句)', 즉 시 주석의 '금쪽 같은 어록'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중국 사회주의라는 큰 건물에서 당은 전체 뼈대이고 당 중앙은 대들보다." 전인대 폐막식에서는 시 주석을 "국가의 조타수"라는 찬양도 나왔다. 마오쩌둥을 지칭하는 별칭이었던 '국가의 조타수'는 개인숭배 금지와 함께 사라졌던 용어다.하지만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출범을 선포한 '국가의 조타수' 시진핑의 행보는 곳곳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미국은 작심하고 무역전쟁을 선포해 중국 견제에 나섰다. 중국 공산당의 금과옥조인 '하나의 중국' 정책은 홍콩 시민들의 봉기로 '송환법'을 포기하는 좌절을 맛봤다. 홍콩 시위에 자극받은 대만에선 인기가 급락했던 반중파 차잉잉원 총통이 재선에 성공했다.설상가상인가. 후베이성 우한 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공산당과 시 주석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2003년 광둥성에서 발생한 사스의 감염정보를 은폐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던 중국은 이번에도 신종 코로나 발생 초기 상황을 축소 은폐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8일 첫 환자가 발생했지만 우한시를 봉쇄한 건 50일 가까이 지난 1월 23일이었다. 우한 시민 500만명이 중국 전역과 세계 곳곳으로 탈출한 뒤였다.70여개 국가들이 중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하는 등 중국의 신종 코로나 대응에 대한 세계의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 시 주석의 1인 독재를 신종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한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 칼럼을 주목할 만 하다. "시 주석이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며 시 주석의 명령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중국 방역행정을 꼬집었다. 시 주석은 신종 코로나를 "악마"로 지칭하며 전면전을 선포했지만, 관료들은 사후 책임을 우려해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중국은 신종 코로나 사태를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중국내 감염은 멈출 기미가 안보인다. 국가의 조타수 시진핑이 신종 코로나로 진땀을 흘리고 있다. /윤인수 논설실장

2020-02-03 윤인수

[참성단]'농민 대통령'

농협중앙회장은 250만 농민을 대표한다. 임기 4년 단임제의 비상근 명예직이지만, 400조원 규모의 자산, 30개에 달하는 계열사 대표와 8만명 임직원의 실질 인사권을 행사하고 예산편성 및 집행, 감사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1천118개의 농·축협조합도 거느리고 있다. 그래서 농협중앙회장을 '농민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농협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농협은 올해 초 한 기업 평가사에서 발표한 국내 대기업집단 공정자산 순위에서 61조3천억원으로 10위를 차지했다. 신세계, KT, 한진, CJ 보다도 앞선다.농협중앙회는 임명제로 회장을 선출하다 1988년 지역조합장들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를 도입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던 2007년 12월 선거 때부터 간선제로 바뀌었다. 겉으론 비용을 절감하고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부정선거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지만, 결과적으론 이 전 대통령의 고교 후배가 회장으로 당선되면서 '이명박 후광'이라는 구설에 오르는 등 농협중앙회장 자리는 늘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간선제로 치러지는 깜깜이 선거 탓에 직면한 농업 현안보다 지역 구도에 따른 판세에 끌려다닌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그동안 경기지역에서는 역대 단 한 번도 회장을 배출하지 못했다. 영·호남이 권력을 나눠 갖는 정치구조와 대의원의 지역분포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장 선거 대의원 수는 292명이다. 권역별로는 영남권이 90명, 호남권은 63명, 경기지역은 서울·인천까지 포함해도 겨우 54명이다. 영·호남에 비해 늘 열세였다. 최근까지 영·호남 출신이 각각 회장 자리에 올랐었다. 이번 24대 선거에 '호남 재집권론 vs 중부권 통합론'이란 말이 나온 것은 특정 지역이 자리를 독점하는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농협중앙회가 경기도 출신 '농민 대통령'을 맞게 됐다. 지난달 31일 치른 농협중앙회 회장 선거에서 이성희 전 성남 낙생농협 조합장이 당선됐다. 이 회장 개인적으로는 지난 선거의 아쉬운 패배를 딛고 일궈낸 값진 승리다. 이제 농협에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당장 시급한 건 농업환경 악화를 극복하고 농가소득을 늘리는 것. 여기에 조합장 중심의 지배구조로 개편하고 중앙회장 선거 직선제 도입도 이 회장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정치권에 흔들리지 않는 농협이 되기를, 그래서 진짜 새 바람이 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이영재 주필

2020-02-02 이영재

[참성단]'쩐의 전쟁' 슈퍼볼

미국에선 미식축구(NFL)와 아이스하키(NHL), 농구(NBA), 야구(MLB)를 '4대 프로 스포츠'라 부른다. 이 중 미국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종목은 단연 미식축구다. 상대 진영을 휘저으며 터치다운을 하는 경기방식이 미국의 개척자 정신과 잘 맞아 떨어지는 까닭이다. 게임 수가 적은 것도 NFL 인기의 또 다른 이유다. 미 프로야구가 연간 162게임, 프로 농구가 82게임인데 비해 미식축구는 1개 팀이 고작 16게임을 치른다. 그래서 입장권도 비싸고, 표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구단 가치만 봐도 미식축구팀이 단연 최고다. 지난 22일 포브스가 공개한 '2019년 가치 있는 프로스포츠 구단'을 보면 NFL 댈러스 카우보이가 50억 달러로 1위,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38억 달러)가 7위, 뉴욕 자이언츠(33억 달러) 10위 등 26개 구단이 50위 이내에 이름을 올렸다. 중계료도 NFL이 연간 49억5천만 달러로 MLB 15억 달러, NBA 9억5천만 달러, NHL 2억 달러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슈퍼볼은 NFL 두 개 리그의 우승팀이 단판으로 최종 승자를 가린다. 올해 결승전은 내달 2일(미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하드록스타디움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대결로 펼쳐진다. 천문학적인 방송 광고 때문에 슈퍼볼이 열리는 날을 '슈퍼 선데이'라 부른다. 올해 슈퍼볼 광고 단가는 30초에 500만∼560만 달러(58억~65억 원)에 이른다. 초당 2억원. '세계 최대의 광고판'이란 말이 그냥 붙은 게 아니다. 올해 슈퍼볼 광고엔 20개사가 참여하는데 우리나라 기업으로 기아차와 현대차가 포함됐다. 뒤늦게 2020 미국 대선의 민주당 후보 대열에 뛰어든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슈퍼볼 경기의 60초의 광고를 1천만 달러에 구매했다고 해서 화제다. 출마 선언 이후 8주 동안 벌써 2천900억 원을 광고에 쏟아 부은 그다. 60조 원 재산가인 블룸버그는 정치기부금이 아닌 개인 돈으로 모든 비용을 지급했다. 블룸버그 측은 광고 집행을 "단지 트럼프 대통령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슈퍼볼 다음날인 2월 3일 첫 민주당 대선 후보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 때문이다. 돈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도 슈퍼볼 60초 광고를 구매하며 '돈 자랑'을 했다. 바야흐로 '쩐의 전쟁'이 시작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20-01-30 이영재

[참성단]중국 국민 입국금지 논란

질병을 관리하는 권력의 방식은 시대와 권력의 형태에 따라 변화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시민권력이 부재하던 시대에는 감염성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철저하게 격리했다. 신도 외면한 문둥병(나병) 감염자들은 거주지에서 추방해 그들만의 소굴에 가둔 것이다. 13세기 기독교 세계 전체에 나병환자 격리장소가 1만9천개에 달했다는 사료는 권력이 나병환자 격리에 얼마나 철저했는지 보여준다.중세말기 유럽 전제군주들은 질병에 걸린 백성들을 격리하는 대신 도시에 가둔 채 통제하고 감시하는 방식으로 전염병에 대처했다고 한다. 도시를 떠받치는 산업노동력을 무작정 격리할 수 없어서다. 페스트가 창궐하자 왕들은 도시의 백성들 명단을 만들어 매일 이들의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시신을 태우고, 감염자를 자택에 가두는 등 촘촘한 행정권을 발동했다.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쥔 전제군주들은 세원인 백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격리하거나, 모아 놓고 철저히 통제하는 전제적 권한을 행사했던 것이다.하지만 시민권력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전제적 질병관리가 가능하지 않다. 우선 과거엔 하루 2㎞ 정도였던 전염병 전파속도가 지금은 수천㎞에 달한다.('바이러스 대습격' 발췌) 정보통신의 발달로 시민들은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정보 수집과 판단이 가능해졌다. 중국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우한 폐렴) 발생지인 우한시를 봉쇄했지만 이미 500만명의 시민은 중국 전역과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우한 봉쇄를 결정한 중국과 단박에 국경폐쇄를 선언한 북한은 공산당의 전제적 성향을 보여준다.지금 국내에서도 국경 봉쇄 논란이 일고 있다.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자는 국민청원에 서명한 국민이 29일 60만명에 육박했다. 상당수 국민들이 우한 폐렴 방지를 위한 가장 확실한 대책이 중국 국민에 대한 국경봉쇄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대표가 이를 '혐오' 논리로 반박하고 나섰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다. 이런 상황일수록 한중 양국 국민의 혐오를 부추기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말은 맞는데 동문서답이다. 국민이 제안한 국경 봉쇄 대책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할 일이다. 난데 없이 외교적이고 도덕적인 수사로 국민을 훈계하고 나서는 바람에 정치적 논란을 자초했다. 청와대의 '우한 폐렴' 명칭 변경 요청도 불쏘시개가 됐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의 정치적 변종이 출현한 셈인가. /윤인수 논설위원

2020-01-29 윤인수

[참성단]신종(新種) 바이러스

인플루엔자 보균자가 대도시에 잠입한다. 호흡기로 전파되며 감염 속도 초당 3.4명. 치사율 100%. 전에 볼 수 없었던 신종 바이러스로 사망자가 속출한다. 정부는 국가 재난사태를 발령, 급기야 도시 폐쇄라는 초유의 결정을 내린다. 피할 새도 없이 격리된 사람들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대 재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목숨 건 사투가 시작된다. 2013년 개봉한 영화 '감기'는 신종 전염병 공포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재난영화다. 당시 의학 전문가들은 영화적 상상력의 소산으로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하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했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18년 여름, 프랑스 주둔 미군 병영에서 독감 환자가 발생했다. 처음엔 감기와 증상이 비슷해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미군들이 속속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감염자가 급속하게 확산해 미국에서만 무려 50여만명이 사망했다. 물론 유럽 대륙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했다. 영국에선 25만명, 프랑스에선 40만명이 숨졌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등 유럽의 유명 화가들도 피하지 못하고 희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신종 바이러스가 4개월 후 아시아를 덮쳤는데 식민지 치하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총독부 연감을 보면 당시 인구 1천678만 명의 절반에 가까운 740여만명이 감염돼 14만명이 사망했다. 이른바 1918년 '무오년 독감'이다. 하지만 이는 추정치에 불과하다. 당시의 허술한 통계를 고려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12월 3일자 매일신보의 기사가 이를 증명한다. '서산군에만 8만명의 독감 환자가 있고, 예산·홍성서도 야단이다. 감기로 사망한 사람이 2천명이나 된다'.지금까지 한 세기 동안 서너 번씩 신종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했다. 200만명이 사망한 1957년 아시아 독감, 100만명이 사망한 1968년 홍콩 독감, 1979년 에볼라 바이러스, 2000년대 사스, 메르스가 그런 경우다. 이것들이 무서운 건 신종(新種)이라 치료 약을 늘 앞서서 나간다는 점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우한 폐렴 공포가 경기도를 덮쳤다. 이제 무엇보다 2차 감염을 차단해야 한다. 쓸데없는 괴담 확산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지금은 정부가 국민에게 신뢰를 주어야 한다. /이영재 논설실장

2020-01-28 이영재

[참성단]한비자의 망징

중국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는 진시황이 탐냈던 인물이다. 진시황의 5대조인 진효공은 법가사상가인 상앙을 발탁해 강력한 법치주의를 실시해, 진나라를 전국7웅 중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천하통일을 앞둔 진시황이 법치의 대가인 한비자를 모시려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한비자는 망하기 일보직전인 조국 한(韓)나라를 법치로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진시황은 그를 얻기 위해 일부러 한나라와 전쟁을 선포했고, 다급해진 한나라는 한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진시황에게 보내고 말았다.한비자는 망국을 향해 치닫는 한나라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저서 '한비자'에 망징(亡徵)편을 남겼는데, 나라가 망할 47가지의 징조를 열거해놓았다. 예를 들어 "전쟁과 방어는 하찮게 여기면서 어짊과 의로움으로 자신을 꾸미는 데 힘쓰면 망하게 된다"라는 식인데, 망해가는 왕조에서 벌어지는 온갖 통치비리를 망라했다. 현대의 정치지도자들도 꼭 새겨야 할 경고들로 가득하다.한비자가 법가의 입장에서 밝힌 나라가 망할 징조는 이렇다. "군주가 꾀를 부려 법을 왜곡하고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수시로 어지럽히며 법령과 금령을 쉽게 바꿔 명령을 자주 내리면, 망하게 된다." 청와대와 법무부가 검찰, 정확하게는 윤석열 검찰총장과 벌이는 전대미문의 법적 공방이 한창인 요즘, 귀에 쏙 박히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청와대와 법무부는 두 번의 인사를 통해 윤 총장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기소를 강행한 윤 총장을 향한 정권의 비난은 법치의 영역을 벗어났다. 추미애 법무장관은 "날치기 기소"라는 정치언어로 윤 총장을 압박했다. 일개 비서관인 최 비서관은 "기소 쿠데타"라며 자신을 정권의 최고통치자로 격상시키는 지경이다.문재인 대통령은 윤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살아있는 권력도 엄정히 수사하라"고 당부했다. 법치의 원칙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 윤 총장은 지금 손발이 다 잘린 채 감찰대상이 됐다. 상앙은 저자거리에 말뚝을 세워놓고 옮기는 자에게 상을 준다는 약속을 지킴으로써 법치의 기초를 세웠다. 만일 문 대통령이 상앙의 이목지신(移木之信)의 고사대로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 윤 총장을 신뢰하고 조국을 읍참마속 했다면, 법치의 전범(典範)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윤석열을 향한 정권의 광적인 혐오 뿐이다. 설 연휴 민심이 많이 흔들렸을 것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20-01-27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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