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재밌어 효도했지만… 횃불시위 주도해 불효도 했죠" "호기심 많아"… 중학생땐 매일 도서관모교 선인고, 성적 우수학생 집중지원예비고사 시절 인천 최초의 수석 배출"우주의 본질 알고 싶어" 물리학 전공"5·18 진상 규명하라" 시위 벌여 복역집시법 위반에 졸업후 취업 쉽지 않아학원 강사 일하다 늦깎이 한의대 입학원외탕전協 회장 맡아 한의 발전 노력"이기는 것 아닌 궁금증 푸는 게 공부"언제나 1등은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누구나 1등을 꿈꾸지만 그 기회가 모든 이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아임프롬인천'은 1등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인천 선인고 출신 서영석(청연한방병원 대표 한의사) 대한원외탕전협회 회장이다. 1983학년도 대입 학력고사 전국 자연계 수석을 차지하며 고향 인천과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지금도 그렇듯 대학입학 전형과 관련된 시험에서 수석 혹은 만점을 차지한 수험생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전국 자연계 수석을 차지한 서영석 회장의 기사도 당시 여러 일간지에 실렸다. 당시 서영석군은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부족한 과목에 노력을 집중했다"고 자신의 '비결'을 밝혔다.2024년 현재 서 회장의 이야기도 당시 고교생 서군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 회장은 "내가 재미있고 하고 싶어서 (공부를) 했다"며 "공부가 진짜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다.지난 17일 서 회장과 함께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는 모교 선인고를 찾았다. 조철수 선인고 교장은 "지금의 선인고가 있는 자리는 옛 효열초등학교 운동장 터"라고 설명했다. 서 회장의 옛 기사를 보면 "도시락을 2개씩 싸들고 다니며 학교 수업이 끝나고 밤 11시까지 도서관에 남아 공부에 열중했다"고 했다. "밤새 공부하던 옛 도서관을 한번 보고 싶다"는 서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조 교장이 현재 선인중으로 안내했다. 서 회장이 공부하던 옛 선인고 건물은 현재 선인중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인중 건물 7층 옛 도서관 자리는 칸막이가 설치된 도서관이 아닌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하는 특별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서 회장은 "옛날 생각이 난다"며 감회에 잠겼다."2학년 어느 날 갑자기 당시 임공순 교장 선생님이 부르시더군요. '이제는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을 학교가 지원해주겠다'면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하시더군요. 이후 각자 자리가 정해진 독서실이 생겼고, 밤을 새도 좋고 뭘 해도 좋다는 말씀도 있었죠. 실제 편하게 공부했고, 성적도 눈에 띄게 올랐던 것으로 기억해요."선인고가 '전국 수석'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적이 좋은 학생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스파르타식' 교육 방법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추첨을 통해 고등학교가 배정되는 '고교평준화'(소위 뺑뺑이) 정책과 '대입 학력고사' 제도가 맞물리면서다. 고교평준화 정책은 1974년 서울·부산을 시작으로 이듬해 대구·인천·광주를 포함한 5대 도시에서 실시됐다.대입 학력고사는 1982학년도에 도입됐다. 핵심 내용은 대입 본고사를 폐지하고, 고교 내신 성적과 학력고사 성적만으로 대학 입학자를 선발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전국 수석'이라는 말이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처음 시행된 학력고사의 첫 전국 수석 타이틀은 너무도 유명한 이가 차지했다. 제주도 출신 정치인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다.선인고가 속해 있던 선인학원은 1994년 시립화됐다. 이전까지 사립 체제였다. 서 회장이 1학년이던 1980년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했다."인천대와 인천전문대 대학생들 때문이었는지 실제 학교 정문 앞에 탱크와 무장한 군인이 보이기도 했고, 선인고 2·3학년 선배들이 폭동 수준의 시위를 일으키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선인학원 시립화 성공사 편찬위원회가 1996년 펴낸 책 '선인학원 시립화 성공사' 9쪽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도 있다.'1980년 3월22일 오전 10시경부터 운봉공고, 운산공고, 항도실고 등 학생 1천500여명이 수업을 거부한 채 교내 운동장에 모여 백인엽 축출, 교내 민주화, 실습시간 연장, 보충 수업료 인하, 무능 교사 퇴진 등 8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중략)…공업전문대, 인천대, 선화여상 등의 유리창 2천여장을 부수는가 하면 제물포역 앞 도로로 진출해 버스 유리창과 공중전화 박스를 박살내는 등 거대한 폭력사태로 변모한다.'선인학원은 인천대와 인천전문대 등 2개 대학과 10개 초·중·고교, 유치원 등 무려 14개 교육기관을 거느린 전국 최대 규모의 사학법인이었다. '인천 학령인구의 25%를 선인학원이 책임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거대했다.선인학원은 비리사학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예비역 중장 백인엽(1923~2013)이 성광중·성광상고를 운영하는 사학재단 성광학원을 1958년 인수한 이후 학교를 늘려갔다. 1965년 3월 학교법인 명칭을 '선인'으로 변경하고 교명도 새로 붙여간다. 재단 명칭은 형 백선엽(1920~2020)과 자신의 이름에서 따왔고 형의 호인 '운산', 자신의 호 '운봉', 어머니 이름 '효열', 아들의 이름 '진홍' 등으로 학교 이름을 채워나갔다. 1988년 인천대학교 승격 인가를 받을 때까지 수많은 학교의 '설립' '폐교' '교명 변경'이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사학법인 발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양적 팽창을 이뤄간다. 1993년 기준 재적 학생 수 3만6천441명, 교원 수 1천111명, 직원 수는 273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사학재단이었다.서 회장은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세계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 진짜 물리학도라면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이해와 근원적 호기심, 그런 것 때문에 물리학을 공부하겠죠. 당연히 그래야지 재미도 있을 것이고요…."서 회장은 자신이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고 말했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책을 좋아했다. 그는 부평동중학교 출신인데, 도서관은 늘 서영석의 차지였다."학교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어요. 도서관이 언제나 한가했어요. 방과 후에 매일 도서관을 갔어요. 젊은 여자 사서 선생님이 어느 날부터는 '영석이 너는 대출 신청을 하지 말고 그냥 읽고 싶으면 들어와서 아무거나 읽고 제대로 꽂아 놓고 가'라고 말하는 겁니다."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탐독했고,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대단한' 작가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몇 백 권을 읽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서울대 물리학과에 수석으로 진학하며 부모님에게 최대의 '효도'를 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불효자'의 길로 접어든다. 어머니가 공부 잘하는 효자로만 알고 살았던 착한 아들의 옥바라지를 해야했으니 말이다.1986년 5월19일자 경인일보 (인천)사회면을 보면 '횃불 시위를 벌인 학생 등 15명 연행'이라는 제목으로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18일 하오 8시5분경 인천시 동구 송림동 현대극장 앞에서 대학생 40여명이 '민주정부수립'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이다 긴급출동한 경찰에 의해 10여분만에 해산됐다. 경찰은 이 중 서영석군 등 15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연행, 시위 주동자 및 배후세력 등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그는 그날 기억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의 기억에는 함께 나선 동지들이 100여 명 정도였다. 골목길에 숨어서 라이터로 횃불에 불을 붙이고 '5·18 진상을 규명하라'고 외치며 차도로 뛰쳐나갔다. 골목 곳곳에 숨어있던 다른 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함께 뛰어 나왔다. '스크럼'을 짜고 동인천역 광장까지 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경찰이 나타났고, 금세 체포됐다. 그는 "그날 닭장차 안에서 평생 맞을 매를 다 맞았다"고 말했다.서 회장은 1986년 5월 횃불시위로 구속 수감돼 1년6개월 형을 받고 1987년 3월 가석방됐다. 대구교도소 복역 당시 '교육'을 받으면 가석방을 허가해 준다는 교도소 측 '회유'를 수차례 받았지만 넘어가지 않고 버텼다. 어느 날 대전 교도소로 이감됐다. 교도관도 재소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텅 빈 건물에 사흘간 갇혀있다 보니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그는 "보안과 지하실에서 멍석말이를 당할 때도, 교도관에게 맞을 때도 버텼는데, 아무도 없는 곳이 무서웠다"며 말을 아꼈다. 그는 "함께 싸웠던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출소 이후 서울대 교수 권유로 즉시 복학했다. 그렇게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공부에 전념했고 1989년 졸업했다. 졸업 후 취직을 시도했지만 집시법 위반 구속 이력이 있는 그를 받아 줄 회사는 없었다. 지인 소개로 학원 강사일을 시작했다. 부평에서 제법 큰 학원도 운영했다. 서울에 있는 재수학원으로도 출강했다.학원 강사일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사교육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던 사람이, 심지어 사교육이 대한민국을 망치는 산업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물리학을 처음 시작할 당시 막연히 가졌던 꿈이 있었어요. 기초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철학이나 사학을 공부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생물학이나 의학을 배워 인간의 생명에 대한 공부까지 끝내자 하는 목표가 있었어요."1999학년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에 16년 아래 동생들과 경쟁해 합격한다. 2005년 졸업하며 한의사 면허를 취득했다.지금은 청연한방병원 원외탕전실 대표 한의사와 대한원외탕전협회장을 맡고 있다. 원외탕전실은 한의사가 처방을 내리면 한약을 짓는 의료기관의 부속시설이다. 여러 한의 의료기관이 주문한 한약을 납품한다. 한의약의 산업화를 위해 힘쓰며 한의계 발전을 위해 노력 중이다.서 회장에게 '전국 수석' 타이틀을 안겨준 고향 인천의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언제 어디서든 공부는 즐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궁금하게 여기고 알고 싶어해야 합니다. 그래야 재미도 생깁니다. 남들을 이기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방식의 공부는 성과가 생기기 힘들어요. 알고 싶고 배우려고 공부하는 것 그게 정상입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서영석 대한원외탕전협회 회장.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옛 선인고등학교1983년 1월 6일자 조선일보 기사.선인고 3학년 시절 사진. 담임 교사 오른쪽이 서영석 회장이다. 교사 왼편 학생은 서 회장이 1986년 5월 18일 시위에서 전투경찰로 마주하게 된다.서 회장 시위를 보도한 경인일보 1986년 5월 19일자 사회면 기사.기사 전문 온라인
1983학년도 대입 학력고사 전국 자연계 수석을 인천 학생이 차지했다. 인천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전국 1등 학생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그 학생은 대학 교수를 꿈꾸며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현재는 조금 엉뚱하게도 한의사가 돼 한약 산업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이번 아임프롬인천 31번째 손님 서영석(59·사진) 대한원외탕전협회 회장의 이야기다.서 회장은 1965년 인천 산곡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평동초·부평동중·선인고 등에서 공부했다. 학창시절 서 회장은 궁금한 걸 참지 못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 입학 후에는 강의실보다 길거리에서 투석전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서울대 4학년 재학 시절인 1986년 5월 18일 인천 동구 송림동에서 '5·18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주도해 구속됐다.복학 후 대학을 마쳤지만 구속 이력 때문에 취업까지 이르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어 학원 강사로 일하다 16년 어린 후배들과 경쟁해 한의대에 진학했다.면허 취득 후 개원하고 한의사로 진료 활동을 이어가던 중 대한한의사협회 부회장으로 호출됐다. 한방 처방을 양약 형태 약품으로 개발한 모양으로 만든 '천연신약물' 처방권을 양의사에게만 부여한 보건당국의 정책과 맞서 싸웠고, 한의사도 엑스레이, 초음파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리학을 전공한 한의사 출신으로 TV 토론에 나가면 논리에서 쉽게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토박이인 그는 30대 중반 넘어서까지 인천에서 생활했다. 현재는 인천을 떠나 살고 있지만 그는 자신을 "고향 인천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늘 고향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서울 변두리 도시가 아닌 국제적인 면모를 조금씩 갖춰가며 변화하는 고향의 모습을 보면 즐겁다"고 말한다. → 관련기사 ([아임 프롬 인천·(31)] 1983학년도 학력고사 자연계 전국수석 서영석 입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난기류 만난 마천루 사업 서울항공청, 연말까지 안전성 용역'송도 103층' 관제공역 포함돼 차질'시티타워' 김포공항 항로영향 분석다음달 시공업체 입찰 계획 밀릴듯인천 송도국제도시 6·8공구에 추진되는 103층(420m) 초고층 빌딩과 청라국제도시에 건립되는 청라시티타워(448m)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랜드마크 구실을 할 마천루들이 항공기 이·착륙과 관련한 고도 안전 협의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21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서울지방항공청은 송도 6·8공구 103층 초고층 빌딩과 청라시티타워가 항공기 저고도 운항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 안전성 등을 확인하기 위한 용역을 연말까지 진행한다.송도는 인천국제공항 활주로 반경 4㎞ 밖에 있어 고도제한 구역은 아니지만 항공기들이 지나는 관제공역에 포함돼 있다. 서울지방항공청은 인천공항에 이·착륙하는 항공기들이 최저 고도를 유지하는 데 초고층 빌딩이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조종사나 관제사 등 항공 관련 전문가들의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인천경제청은 올해 하반기까지 103층 초고층 빌딩 건립을 위한 국제 디자인 공모를 실시한다는 계획이지만 항공 당국과 협의가 길어질 경우 애초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103층 빌딩은 송도 6·8공구 중심부를 개발하는 사업의 랜드마크 시설로 추진되고 있다.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6·8공구 중심부 개발사업 우선협상대상자인 (주)블루코어PFV와 기본협약을 체결했다. 블루코어컨소시엄은 송도 워터프런트 인공호수 주변 128만㎡에 103층 높이의 초고층 타워를 중심으로 도심형 테마파크, 18홀 대중골프장, 주거·상업·전시시설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LH가 청라국제도시에 추진하는 청라시티타워 건립 사업도 항공 당국에 제동이 걸렸다. 서울지방항공청이 송도 103층 초고층 빌딩과 함께 청라시티타워도 용역에 포함시키면서 관련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지방항공청은 청라시티타워가 김포국제공항을 오가는 항공기 항로에 위치해 있어 관련 영향성을 분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LH는 이달 안으로 청라시티타워의 사업 타당성을 심의·의결하는 3차 경영심의를 완료한 뒤 다음 달 시공사 입찰에 나선다는 계획이었지만 항공 당국의 용역이 끝난 후 이 같은 절차를 진행할 것으로 전해졌다.LH 관계자는 "현재 항공 당국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최대한 타워 건립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LH는 2030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비 약 6천900억원을 들여 청라호수공원 중심부 일대 3만3천㎡에 지하 2층, 지상 30층, 높이 448m 규모의 전망 타워를 짓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서울지방항공청 관계자는 "항공기 운항에 필요한 여러 안전 위협 요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연말까지 이와 관련한 용역을 진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청라시티타워 조감도.인천 청라국제도시에 건립되는 청라시티타워(448m)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랜드마크 구실을 할 마천루들이 항공기 이·착륙과 관련한 항공기 안전 협의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사진은 청라시티타워 공사 현장. /경인일보DB
"싱가포르와 닮은 점 많은 인천, 역외특구 지정 해볼만하다" 부평 출생… 주안서 어린시절 보내교사였던 아버지, 퇴직후 원목상으로유복한 환경 덕, 해외문화 많이 접해제대후 유럽 여행 "설렘 잊지 못해"대학 마치고 삼성물산서 첫 사회 생활국내 1세대 벤처캐피털 기업으로 이직싱가포르서 오랜 근무… 컨설팅社 창업"여전히 외국서 국내 투자 까다로워""시행착오 나로 충분… 길잡이 되고파"1970~1980년대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은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 1900년대 초반부터 주안 일대에 퍼져 있던 대규모 염전은 1970년 매립공사가 시작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는 국가 주도 산업단지인 '주안공단'이 들어섰다. 공단 주변에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주안사거리와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도심이 성장했다.아임프롬인천 서른 번째 주인공 원대로(54) 윌트벤처빌더 대표의 유년 기억은 이곳 주안에서 시작된다. 그는 국내 스타트업의 동아시아 진출 컨설팅과 유망 기업의 금융 투자, 경영 등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VC) 스타트업을 이끌고 있다. 한국·싱가포르 벤처 투자 전문가인 원 대표를 만나고 관련 인물·자료를 찾아보니, 40~50년 전 인천 주안의 변모와 활기를 빼놓고 그를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었다. 소년 원대로가 주안에서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택했던 도시, 주안에서의 삶원 대표는 1970년 외가가 있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모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비슷한 시기 그의 조부모도 함경도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늦둥이 막내 아들이 귀한 손주를 낳자 고령이었던 그의 친할머니는 '원대로' 다 이루었다며 기뻐했다. 당시엔 순한글 이름이 생소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큰 길(大路)이라는 의미의 한자를 붙였다.인천에서 태어났지만 원 대표 가족은 충북 청주에서 그가 5살이 되던 해까지 살다 상경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였던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발령받으면서다. 1977년 주안국민학교(현 주안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의 가족들은 인천 남구 주안에 자리를 잡았다. 부친은 학교를 그만두고 목재 수입 사업에 나섰다. 아파트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때다.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을 수입해 아파트 건축·인테리어 자재로 팔았다.공장은 인천 주안역 뒤편 북구(현 서구) 가좌동에 자리했다. 가족은 시민회관사거리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주안공단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과 가족들이 모여 살면서 양옥 형태 주택이 많이 지어졌다.인천시가 집필한 '도시마을 생활사-주안동'에는 '주안공단'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970년대 북구 가좌동에는 한국제재공단이 조성됐고, 주안지구로 분류됐다. 이 공단에는 나왕·미송 등 목재를 다루는 업체 30개가 입주해 있었다.5대째 인천 주안국민학교 인근에서 살아온 구본형(61)씨는 1970년대 중반 주안을 '윤택했던 마을'이라고 표현했다. 구씨는 "70년대부터 옛 초가집과 기와집이 헐리고 슬래브지붕으로 된 양옥집이 많이 들어서며 신도시처럼 변해 주안은 잘사는 동네로 인식이 됐다"며 "주안공단에 다니던 월급쟁이들이 주택을 사서 주안사거리쪽에 자리를 잡고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했다"고 설명했다.주안에는 자연스럽게 중산층 가정이 모여 살았다. 원 대표는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또래에 비해 해외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1970년대 인천 남구에 한국스카우트 미추홀지역대가 설립됐다. 학교 단위로 운영되는 스카우트보다 지역대의 활동이 더 활발했다. 주안에 모여 살던 이웃들은 각 가정에서 비용을 갹출해 매주 일요일 버스를 빌려 스카우트 활동을 했다고 했다.원 대표는 용산 미군 부대에 방문해 미군 자녀들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함께한 경험도 있다. 그는 "탄산음료가 귀했던 시절에 음료판매 트럭에서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음료들이 펼쳐져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금발머리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981년부터 인천에서 스카우트 활동을 해온 최해경(53)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 사무처장은 "당시에 스카우트 활동을 하러 아이들이 미군부대에 들어가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박상도 미추홀지역대 초대 단장이 스카우트 단원들과 함께 용산 미군 부대에 방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에 따르면 인천지역 스카우트는 1923년 조선소년군 인천지부를 뿌리로 한다. 이후 1937년 일제에 의해 보이스카우트 운동은 강제해산됐다. 1947년 인천보이스카우트 재건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 말부터 지역 단위의 스카우트 활동과 초·중·고등학교 단위의 스카우트 활동이 활발해졌다. 1985년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 소속 대원은 2만3천여명에 달했다. 1986년에 경북 경주에서 열린 잼버리대회에는 인천연맹 소속 대원 300명이 참가했다.■ 배낭여행 1.5세대, 세계로 첫발을 내딛다원 대표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91학번으로 입학했다. 국내에서는 1989년 1월 해외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원 대표는 군 제대 후인 1995년 3주간 서유럽으로 첫 배낭여행을 떠났다. 당시 그는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공부에만 매진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유럽으로 떠났다. 영국 런던에 도착해 도시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설렘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인생 첫 배낭여행 이후 공부에만 전념하겠다는 다짐은 사라졌다. 오히려 다른 선진국을 더 경험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쪽으로 결심이 섰다. 1997년 IMF로 경기 불황이 이어졌지만, 대기업은 대학생들의 해외 탐방을 대규모로 지원했다. 원 대표는 1996년에는 삼성화재가 주최하는 미얀마· 베트남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했고, 1997년에는 삼성그룹과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하는 중국 베이징(Beijing), 서울(Seoul), 도쿄(Tokyo)의 앞글자를 딴 '베세토(BeSeTo)' 해외연수에 참여해 한·중·일 각 국가의 도시를 2주간 탐방했다.그중에서도 원 대표는 1997년 7월 대우그룹의 해외탐방에 참여했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고 했다. 당시 대우그룹은 '세계 경영'을 목표로 해외 공장을 인수했다. 그는 영국에 있는 대우자동차 디자인연구소, 대우차가 인수한 폴란드 국영기업, 프랑스에 있는 대우전자 전자레인지 공장을 탐방했다. 그는 "해외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유럽의 엄청난 규모의 공장 앞에 태극기와 대우 마크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에 내가 다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상사맨부터 벤처 캐피털 스타트업까지대학 졸업이 가까워 오자 원대로 대표는 해외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해 고민했다. 최근에는 어느 기업이든 해외에 현지 법인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 해외에 나가는 기회들이 많지만, 1990년 말까지만 해도 국내 대기업 그룹도 해외 사업은 종합상사에 맡기는 구조였다.1999년 삼성물산 국제업무 파트에서 첫 사회생활을 했다. 그가 처음 속한 곳은 정보통신 사업부였다. IT기기 수입과 수출을 하는 부서였다. 그중에서도 원대로 대표는 국내 중소기업의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일을 담당했다. 삼성전기 계열사 제품을 유럽 쪽에 판매하고, 위성 방송용 수신기기인 '셋톱 박스'를 러시아 시장에 진출시켰다.1990년 후반에는 '닷컴(.com) 붐'이 불었다. 원 대표는 "IT·인터넷 기기 등을 다루던 중소 기업들이 투자를 받아 코스닥 상장을 하고, 회사 매출이 크게 증가하는 걸 지켜보면서 유망 중소기업에 자금을 대고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에 관심이 생겨 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원 대표는 2000년 상사맨을 그만두고 현재 한국의 1세대 벤처캐피털 전문 기업으로 불리는 KTB 네트워크로 옮겼다. 그간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과 동남아 벤처 기업에 투자를 담당했다.원 대표는 2006년을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파견을 나갈 기회를 얻었다. 이후 2009년부터 KTB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장을 지냈고, 2013년 현대투자증권(현 KB투자증권)을 거쳐 2016년 벤처기업 컨설팅 스타트업 '윌트 벤처 빌더'를 창업해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창업 후 첫 컨설팅은 싱가포르에서 만난 아내가 이끌어 온 화장품 e-커머스 사업이다. 이후에는 한국 기업들과 스킨십을 늘렸다. 국내 기업이 싱가포르나 동남아 진출할 때 자문을 구해서 초기에 스타트업 교육을 하고 있다. 창업자와 동업해 초기 스타트업 컨설팅, 자금 투자(벤처캐피털), 기업 육성·성장(액셀러레이터)까지 총괄하고 있다.■ 출향 이후 싱가포르에서 본 인천인천은 이민자의 도시다. 지난해 6월 인천에서는 재외동포청이 문을 열었다. 원 대표는 싱가포르 국적의 아내와 결혼 후 2010년 영주권을 취득했다. 시민권까지 취득하면서 싱가포르 국적이 됐다.해외 투자 환경과 국내 기업의 진출을 위해 일하는 컨설턴트로서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원 대표에게 물었다. 그는 "인천을 국내의 역외(off-shore) 특구로 지정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해외 투자자에게 한국 내 여러 규제들로 국내 투자는 까다롭다. 인천에서 국제 기준에 맞춘 회사법, 세금 제도를 적용한다면 국내 자금 유·출입이 훨씬 자유로워지고 국내 투자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원 대표 목표는 국내 중소기업·스타트업 성장을 돕는 것이다. "중국 소설가이자 철학가인 루쉰이 했던 '청년들아 날 딛고 오르라'는 말처럼 저도 앞선 분들이 있었기 떄문에 조금 더 빨리 해외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중소기업, 스타트업 해외 진출의 시행착오는 '나 하나로 끝내자'는 마음으로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원대로 윌트벤처빌더 대표.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주안국가산업단지.1982년 8월 전북 무주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 태평양잼버리 겸 제6회 한국잼버리 대회에 인천미추홀지역대 소속으로 참여한 원대로 대표(앞줄 맨 왼쪽). /원대로 대표 제공1996년 삼성화재가 주최한 미얀마· 베트남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한 원대로 대표(뒷줄 오른쪽). /원대로 대표 제공기사 전문 온라인
"주안에서 세계로, 앞으로도 원대로(元大路) 살것" 아임프롬인천 서른번 째 주인공인 원대로(54·사진) 윌트벤처빌더 대표가 겪은 유소년의 인천, 청년 시절의 한국은 역동적이었다. 그의 친가는 함경도, 외가는 황해도 출신 실향민이다. 교사 출신 부친은 '아파트 건설 붐' 속에서 주안공단에 수입 목재 사업장을 차려 부를 이뤘다. 1970년대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동은 상전벽해라 할 만큼 변화 속도가 빠른 동네였다. 옹기종기 초가집이 늘어선 염전 마을은 양옥집이 채웠고, 주안에 정착한 이주민은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렸다. 40~50년 전 주안은 인천의 신도시와도 같았다.원 대표는 다문화,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보이스카우트 정신'을 유년기 주안에서 체득했다. 1970년대 설립된 한국스카우트 미추홀지역대 초대 단장 박상도씨는 미군부대 군무원이었다. 원 대표를 비롯한 한국스카우트 미추홀지역대 아이들은 용산 미군기지를 방문해 미군 자녀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당시 아이들이 쉽게 경험하기 힘든 국제 교류의 장이었다. 원 대표는 1982년 8월엔 전북 무주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 태평양지역 국제 잼버리'에도 참가해 28개국에서 온 타국 소년들과 함께 야영생활을 했다.1991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원대로 대표는 해외여행 자유화에 발맞춰 세계 각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1997년 이후 외환위기 시절에도 삼성·대우 등 국내 대기업은 대학생 해외 탐방을 확대했다. 해외에서 국내 기업 공장을 견학하고 봉사활동을 벌인 자리에 원 대표가 서 있었다. 자연스레 세계로 눈을 넓히게 됐다.대학 졸업 후 삼성물산에서 상사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IT·인터넷 기기를 러시아 시장에 팔았다. 2000년대 이후 국내외 유망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 열풍이 불자 투자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2016년부터는 싱가포르에서 자신의 회사를 열고 자신의 경험을 살려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국내 스타트업의 컨설팅 활동 등을 이어오고 있다.인천에서 자라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원 대표는 싱가포르 국적 재외동포다. 재외동포청을 품은 도시 인천을 애정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그에게 인천은 여전히 '기회의 도시'로 다가온다.원 대표는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된 인천 주안에서의 기억과 인연으로 '으뜸으로 큰 길'(元大路)이라는 의미의 이름처럼 현재의 내가 가는 길이 만들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아임 프롬 인천·(30)] 주안에서 세계를 꿈꾼 보이스카우트 원대로입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
스타트업 해외 진출 길잡이 되고 싶죠, 시행착오는 나 하나로 끝내자는 생각입니다. 1970~1980년대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은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 1900년대 초반부터 주안 일대에 퍼져 있던 대규모 염전은 1970년 매립공사가 시작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는 국가 주도 산업단지인 '주안공단'이 들어섰다. 공단 주변에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주안사거리와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도심이 성장했다. 아임프롬인천 서른 번째 주인공 원대로(54) 윌트벤처빌더 대표의 유년 기억은 이곳 주안에서 시작된다. 그는 국내 스타트업의 동아시아 진출 컨설팅과 유망 기업의 금융 투자, 경영 등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VC) 스타트업을 이끌고 있다. 한국·싱가포르 벤처 투자 전문가인 원 대표를 만나고 관련 인물·자료를 찾아 보니, 40~50년 전 인천 주안의 변모와 활기를 빼놓고 그를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었다. 소년 원대로가 주안에서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택했던 도시, 주안에서의 삶 원 대표는 1970년 외가가 있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모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비슷한 시기 그의 조부모도 함경도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늦둥이 막내 아들이 귀한 손주를 낳자 고령이었던 그의 친할머니는 '원대로' 다 이루었다며 기뻐했다. 당시엔 순한글 이름이 생소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큰 길(大路)이라는 의미의 한자를 붙였다. 인천에서 태어났지만 원 대표 가족은 충북 청주에 그가 5살이 되던 해까지 살다 상경했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발령받으면서다. 1977년 주안국민학교(현 주안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의 가족들은 인천 남구 주안에 자리를 잡았다. 부친은 학교를 그만두고 목재 수입 사업에 나섰다. 아파트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때다.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을 수입해 아파트 건축·인테리어 자재로 팔았다. 어린 원대로에게 공장에 쌓인 원목은 장관이었다. 그는 “큰 트레일러 여러 개를 연결해 놓은 크기였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반 나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고 기억했다. 공장은 인천 주안역 뒷편 북구(현 서구) 가좌동에 자리했다. 가족은 시민회관사거리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주안공단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과 가족들이 모여 살면서 양옥 형태 주택이 많이 지어졌다. 주안사거리와 시민회관사거리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1970년대 이전 주안에서 볼 수 있었던 '시골 풍경'도 자취를 감췄다. 인천시가 집필한 '도시마을 생활사-주안동'에는 '주안공단'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970년대 북구 가좌동에는 한국제재공단이 조성됐고, 주안지구로 분류됐다. 이 공단에는 나왕·미송 등 목재를 다루는 업체 30개가 입주해 있었다. 나왕은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평균 높이가 40m인 목재자원으로, 주로 합판재나 가구, 악기 등을 만드는데 쓰인다. 미송은 북아메리카 주에서 자라는 평균 높이 100m, 지름 13m의 거대한 소나무로, 건축과 토목, 선박 건조용으로 쓰인다. 5대째 인천 주안국민학교 인근에서 살아온 구본형(61)씨는 1970년대 중반 주안을 '윤택했던 마을'이라고 표현했다. 구씨는 “주안은 굉장한 시골이었지만, 70년대부터 옛 초가집과 기와집이 헐리고 슬라브지붕으로 된 양옥집이 많이 들어서며 신도시처럼 변했다"며 “당시 우리나라가 윤택했던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주안은 잘사는 동네로 인식이 됐다"고 했다. 이어 “주안공단에 다니던 월급쟁이들이 주택을 사서 주안사거리쪽에 자리를 잡고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했다. 주안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당시(1970년)엔 4반이었던 학급 수는 전학 온 친구들이 점차 많아져서 1976년 졸업 때 6반으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부터 인천에 사는 총 가구 중 남구에 사는 가구 비율은 꾸준히 증가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인천 인구 10명 중 4명이 당시 남구에 거주할 정도로 인구 밀집도가 높아졌다. 새로 유입된 인구는 주안동, 숭의동, 도화동에 밀집했다. 1974년 주안동 190-4번지에 건립된 인천시민회관은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이었다. 2000년에 철거 이전까지 인근 초등학교 상당수는 학예회와 졸업식을 이곳에서 진행했다. 시민 다방과 지하 식당가는 동네 사람들이 선을 보는 장소로 유행하기도 했다. 그 자체로 랜드마크 역할도 했다. 서울로 향하는 주민들은 인천시민회관과 주안사거리에서 직행버스와 택시를 탔다. 주안에는 자연스럽게 중산층 가정이 모여 살았다. 원 대표는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또래에 비해 해외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1970년대 인천 남구에 한국스카우트 미추홀지역대가 설립됐다. 학교 단위로 운영되는 스카우트보다 지역대의 활동이 더 활발했다. 주안에 모여 살던 이웃들은 각 가정에서 비용을 각출해 매주 일요일 버스를 빌려 스카우트 활동을 했다고 했다. 원 대표는 용산 미군 부대에 방문해 미군 자녀들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함께한 경험도 있다. 그는 “탄산음료가 귀했던 시절에 음료 판매트럭에서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음료들이 펼쳐져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금발머리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1년부터 인천에서 스카우트 활동을 해온 최해경(53)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 사무처장은 “당시에 스카우트 활동을 하러 아이들이 미군부대에 들어가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박상도 미추홀지역대 초대 단장이 스카우트 단원들과 함께 용산 미군 부대에 방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1980~1990년대 지역대를 이끌던 단장들은 교사가 아닌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직장인, 자영업자 등 평범한 '스카우트인'이었다"며 “이들은 아이들에게 지역 사회를 이끄는 리더의 자질과 모범적인 사회 구성원의 면모를 스카우트 정신으로 강조했다"고 했다. 원 대표는 1982년 8월엔 전북 무주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 태평양지역 국제 잼버리'에 참가했다. “일주일정도 진행된 야영대회에서 각국을 대표해 참가한 아이들과 함께 텐트를 짓고 마을를 만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수도 시설이 야영지까지 연결돼 있지 않아서 강가에 가서 씻기도 하고 밥 먹은 걸 설거지하고 그랬답니다.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을 처음 본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에 따르면 인천지역 스카우트는 1923년 조선소년군 인천지부를 뿌리로 한다. 이후 1937년 일제에 의해 보이스카우트 운동은 강제해산됐다. 1947년 인천보이스카우트 재건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 말부터 지역 단위의 스카우트 활동과 초·중·고등학교 단위의 스카우트 활동이 활발해졌다. 1985년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 소속 대원은 2만 3천여명에 달했다. 1986년에 경북 경주에서 열린 잼버리 대회에는 인천연맹 소속 대원 300명이 참가했다. 1986년 제물포고에 입학한 원 대표는 반장을 도맡는 우등생면서도 놀기 좋아하는 활발한 학생이었다. 원 대표는 고등학교 3학년 학력고사를 앞둔 여름방학에 두 손목을 다쳤다. 당시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지름길로 창문을 넘나들었다. 그도 여느 날처럼 창문을 넘어 신속하게 나가려다가 떨어지면서 양 손목을 다쳤다. 입시를 100일가량 앞둔 시기에 양 손목에 깁스를 했고, 시험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재수를 했다. 인천 주안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노량진 재수종합학원인 '대성학원'을 다니며 2년 간 수험생할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쯤 인천에서도 단과 학원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재수생들이 다니는 재수종합학원은 인천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노량진의 대성학원에는 제주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의 재수생들이 모였다. ■배낭여행 1.5세대, 세계로 첫발을 내딛다 원 대표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91학번으로 입학했다. 해외에 대한 동경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경영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당시에 대학교에 입학하는 애들이 뭘 알겠어요.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경영학과는 학문의 폭이 넓어 졸업 이후에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기업에 취업을 할 수도 있고, 회계사가 될 수도 있고, 대학생활을 하면서 진로를 결정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가장 자유도가 높은 과를 선택습니다." 국내에서는 1989년 1월 해외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는 정부에서 허가를 받은 외교관, 종합상사의 해외 주재원 등만 해외 출국이 가능했다. 원 대표는 군 제대 후인 1995년 3주간 서유럽으로 첫 배낭여행을 떠났다. 당시 그는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공부에만 매진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유럽으로 떠났다. 영국 런던에 도착해 도시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설렘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1990년대 중반 한국에선 국민소득이 1만불을 돌파했을 시점이었습니다. 유럽 도시에서 느껴지는 경제 수준 격차가 매우 크게 다가왔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해 집으로 향하는데 원래 살던 동네가 갑자기 엄청 가난한 동네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인생 첫 배낭여행 이후 공부에만 전념하겠다는 다짐은 사라졌다. 오히려 다른 선진국을 더 경험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자고 결심이 섰다. 1997년 IMF로 경기 불황이 이어졌지만, 대기업은 대학생들의 해외 탐방을 대규모로 지원했다. 원 대표는 1996년에는 삼성화재가 주최하는 미얀마· 베트남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했고, 1997년에는 삼성그룹과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하는 중국 베이징(Beijing), 서울(Seoul), 도쿄(Tokyo)의 앞글자를 딴 '베세토(BeSeTo)' 해외연수에 참여해 한·중·일 각 국가의 도시를 2주간 탐방했다. 그중에서도 원 대표는 1997년 7월 대우그룹의 해외탐방에 참여했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고 했다. 당시 대우그룹은 '세계 경영'을 목표로 해외 공장을 인수했다. 그는 영국에 있는 대우자동차 디자인 연구소, 대우차가 인수한 폴란드 국영기업, 프랑스에 있는 대우전자 전자레인지 공장을 탐방했다. 그는 “해외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유럽의 엄청난 규모의 공장 앞에 태극기와 대우 마크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에 내가 다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상사맨부터 벤처 캐피털 스타트업까지 대학 졸업이 가까워 오자 원대로 대표는 해외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해 고민했다. 최근에는 어느 기업이든 해외에 현지 법인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 해외에 나가는 기회들이 많지만, 1990년 말까지만 해도 국내 대기업 그룹도 해외 사업은 종합상사에 맡기는 구조였다. 대학생 때 삼성그룹에서 대외활동에 참여한 것이 인연이 돼 1999년 삼성물산 국제업무 파트에서 첫 사회생활을 했다. 그가 처음 속한 곳은 정보통신 사업부였다. IT기기 수입과 수출을 하는 부서였다. 원 대표는 국내 중소기업의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일을 담당했다. 삼성전기 계열사 제품을 유럽 쪽에 판매하고, 위성 방송용 수신기기인 '셋톱 박스'를 러시아 시장에 진출시켰다. 이밖에도 최초의 MP3 플레이어인 '세한 엠피맨', '보이스 팬' 등 당시 중소기업에서 새롭게 출시된 전자 제품들을 두루 취급했다. 1990년 후반에는 개인 컴퓨터와 인터넷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인터넷 관련 기업이 급성장하는 이른바 '닷컴(.com) 붐'이 불었다. 원 대표는 “종합상사에서는 물건을 잘 팔면 된다는 생각으로 10~20% 가격을 깎는 것에 목을 매곤 했다"며 “IT·인터넷 기기 등을 다루던 중소 기업들이 투자를 받아 코스닥 상장을 하고, 회사 매출이 크게 증가하는 걸 지켜보면서 유망 중소 기업에 자금을 대고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에 관심이 생겨 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원 대표는 2000년 상사맨을 그만두고 현재 한국의 1세대 벤처캐피털 전문 기업으로 불리는 KTB 네트워크로 옮겼다. 그간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과 동남아 벤처 기업에 투자를 담당했다. 원 대표는 “당시 금융회사에선 여권 있는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여권은 신혼여행 갈 때나 만든다는 인식이 컸다"며 “2000년 이전까지는 각 기업들은 국내 사업만 해도 괜찮았지만, 점점 국내에도 해외 자본이 유입되고 국내에서도 해외 업체에 투자할 기회도 생기면서 점차 시장이 국제화됐다"고 설명했다. 2000년에 들어서자 중국에서는 알리바바 등이 급부상해 중국으로 해외투자가 집중되는 추세였다. 이에 발 빠르게 동남아 쪽의 투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원 대표는 2006년을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파견을 나갈 기회를 얻었다. 이후 2009년부터 KTB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장을 지냈고, 2013년 현대투자증권(현 KB투자증권)을 거쳐 2016년 벤처기업 컨설팅 스타트업 '윌트 벤처 빌더'를 창업해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창업 후 첫 컨설팅은 싱가포르에서 만난 아내가 이끌어 온 화장품 e-커머스 사업이다. 중국에 아모레퍼시픽, 엘지 등 한국의 대기업 화장품 브랜드들이 진출하기 시작했을 무렵, 싱가포르에서도 한국 화장품에 대한 수요가 커지던 때였다. 그가 한국 제품을 싱가포르 온라인에서 팔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냈고, 아내가 판매할 화장품을 골라 유통하는 'MD' 역할을 하며 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이후에는 한국 기업들과 스킨십을 늘렸다. 국내 기업이 싱가포르나 동남아 진출할 때 자문을 구해서 초기에 스타트업 교육을 하고 있다. 창업자와 동업해 초기 스타트업 컨설팅, 자금 투자(벤처캐피털), 기업 육성·성장(엑셀러레이터)까지 총괄하고 있다. 원 대표는 한국인이 스타트업과 궁합이 잘 맞는다고 했다. 그는 창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고정 관념과 기존의 레거시를 깨부셔야 사업이 성공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려면 수동적이기보단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기질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 사람들의 '반골 기질'이 아이디어의 소스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한국 소비자들은 서비스 기대 수준이 높아, 한국 시장을 경험한 창업자는 해외 시장 진출에 유리하다고 분석한다. 그는 “한국 기업이 제공하는 UI(사용자 환경), UX(사용자 경험) 등 서비스 질이 높다"며 “도전적인 창업자가 단련된 서비스 수준 가지고 해외 시장에서 창업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했다. ■출향 이후 싱가포르에서 본 인천 인천은 이민자의 도시다. 지난해 6월 인천에서는 재외동포청이 문을 열었다. 원 대표는 싱가포르 국적의 아내와 결혼 후 2010년 영주권을 취득했다. 시민권까지 취득하면서 싱가포르 국적이 됐다. 원 대표는 국제 금융과 무역 중심지인 싱가포르가 공항·항만으로 대한민국 관문의 역할을 하는 인천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했다. “인천은 해양도시이면서 물동량이 많은 물류 도시이지만 동시에 인프라가 갖춰진 도심이기도 합니다. 도시에 공항, 카지노가 있는 싱가포르와 유사한 점들이 많습니다." 해외 투자 환경과 국내 기업의 진출을 위해 일하는 컨설턴트로서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원 대표에게 물었다. 그는 “인천을 국내의 역외(off-shore) 특구로 지정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해외 투자자에게 한국 내 여러 규제들로 국내 투자는 까다롭다. 인천에서 국제 기준에 맞춘 회사법, 세금 제도를 적용한다면 국내 자금 유·출입이 훨씬 자유로워지고 국내 투자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양도시이지만 원주민이 많지 않다는 특징도 유사한 지점이다. “인천은 부산 등 다른 항구도시와 달리 원주민이 다수가 아닙니다. 싱가포르도 비슷해요. 싱가포르는 원래 말레이시아의 하나의 주였고, 1965년 독립 이후 싱가포르 국민의 인종은 광저우, 푸지엔 출신 등 중국계가 70%이고, 말레이시아계 10%, 나머지 인도계 등으로 구성된 '다인종·다문화' 국가입니다." 원 대표는 “싱가포르는 인종 갈등과 차별을 줄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민자의 도시 인천도 이를 벤치마킹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학교에서부터 다른 문화를 가진 여러 인종이 어울리는 것을 권장하면서 매해 각자의 조상이 입었던 전통 의상을 입는 행사를 연다. 또 공공주택을 분양할 때도 마을에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등 여러 인종이 공존할 수 있도록 비율을 고려해 선발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원대로 대표에게 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중국 소설가이자 철학가인 루쉰이 했던 '청년들아 날 딛고 오르라'는 말처럼 저도 앞선 분들이 있었기 떄문에 조금 더 빨리 해외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중소기업, 스타트업 해외 진출의 시행착오는 '나 하나로 끝내자'는 마음으로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예비 창업가를 위한 교육도 계획 중이다. 정형화된 교육이 아니라 고등학교·대학교 중퇴자, 중년 재창업, 경력단절여성 등도 참여할 수 있는 교육이다. 그의 이름처럼 창업을 시작한 후배들이 뒤따를 수 있는 '큰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약력 1970년 인천 부평 출생 1983년 인천주안초등학교 졸업 1986년 상인천중학교 졸업 1989년 제물포고 졸업 1998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삼성물산 입사 2000년 KTB네트워크 입사 2006년 KTB네트워크 싱가포르 파견 2009년 KTB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장 2013년 현대투자증권 싱가포르 자산운영사 COO(최고운영책임자) 겸 CFO(최고재무관리자) 2016년 스타트업 '윌트 벤처 빌더' 창업자 겸 대표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선정두 도시 공동추진단 구성 실무협의 송전선로 갈등문제, 시흥서 맡아'진척없던' 배곧대교 건설 본격화인천시와 경기 시흥시가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로 선정됨에 따라 시흥에서 송도로 이어지는 송전선로공사 갈등과 진척이 없는 배곧대교 건설 등 주요 현안 해결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이들 현안은 모두 바이오 특화단지 사업과 맞물려 있어 두 도시가 적극 협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7일 인천시에 따르면 인천과 시흥시는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사업을 위한 공동 추진단을 꾸리기로 했다. 현재 추진단 구성을 위한 실무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여기서 바이오 분야와 관련된 각종 협업사업과 주요 현안이 논의될 계획이다.우선 송도국제도시에 입주해 있는 대형 바이오 기업들의 원활한 전력 수급을 위한 송전선로 구축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한국전력은 2022년 송도국제도시와 시흥을 연결하는 송전선로 공사 설계를 위해 시흥시에 지반조성 사용 도로 및 공원점용 허가를 신청했으나 송전선로 건설에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해당 공사가 진행될 경우 초고압 전선이 인구 밀집지역인 배곧동 지하를 관통하면서 전자파 등으로 인해 배곧 주민의 환경권과 주거권을 크게 침해할 수 있다는 게 시흥시의 불허 이유였다. 그러자 한전이 불허 처분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한전의 손을 들어줬다. 시흥시는 상고 신청은 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한전 측에 송전선로 노선 계획 취소를 요청하고 있다.인천시는 송도국제도시 내 대형 바이오 기업들의 신·증설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송전선로 구축이 늦어질 경우 관련 분야 투자 유치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 시흥시에 협조를 요구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번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선정 과정에서 정부는 전력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관련 인허가 문제를 해소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동안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시흥시가 관련 사업 추진을 위해 주민 설득 작업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인천시 관계자는 "송전선로 문제는 시흥시가 책임지고 주민들을 설득하기로 했다"며 "추진단이 구성되면 이와 관련한 협의가 진행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갯벌 피해 우려 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는 배곧대교 건설을 위한 협의도 본격화할 가능성이 크다.배곧대교는 민간자본 1천904억원을 들여 송도국제도시와 배곧신도시 사이에 길이 1.89㎞, 왕복 4차로의 해상교량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환경단체들은 대교가 송도습지보호지역을 통과하게 돼 갯벌 훼손이 불가피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환경부도 '배곧대교 전략환경영향평가'에 대해 부동의 결정을 내려 사업 자체가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인천시와 시흥시는 송도국제도시와 시흥 배곧지구를 연결하는 배곧대교 건설이 두 경제자유구역의 투자 유치와 정주환경개선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고 적극 협력한다는 방침이다.한편 정부는 '인천-시흥 바이오 클러스터'를 세계 1위 바이오 메가클러스터로 조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들 지역을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로 최근 지정했다. 인천은 바이오의약품 제조 역량을 2032년 214만5천ℓ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시흥시는 배곧경제자유구역에 있는 서울대를 주축으로 바이오 분야 연구개발 시설을 키워 인천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전략이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인천시와 경기 시흥시가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로 선정됨에 따라 시흥에서 송도로 이어지는 송전선로 공사 갈등과 진척이 없는 배곧대교 건설 등 주요 현안 해결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송도 바이오클러스터 전경. /인천경제청 제공
누나들따라 인천에 터잡은 목소리 천재 배칠수입니다 부평산단 등에 먼저 정착한 형제들"크게 될 애" 막내 동생 인천으로 불러와미술·운동 소질… 예고 좌절후 방황도1999년 '슈퍼보이스 탤런트' 대상 데뷔인터넷 방송서 '배캠' 패러디로 유명세유명인 50명가량 음성 모사 '연습 벌레'17년 만에 라디오 경인방송 DJ '컴백'"잘돼야 배철수 형님 나올수 있습니다""올웨이즈(Always) 인천, 배칠수입니다."지난달 27일부터 경인방송(90.7㎒) 라디오 오후 4~6시 프로그램 'Always 인천'의 진행을 맡아 중저음의 편안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이같이 오프닝 멘트를 전하는 DJ 배칠수. 본명 이형민보다 예명 배칠수가 대중에게 더 익숙하므로 '아임 프롬 인천' 스물아홉 번째 초대 손님으로 그를 방송인 배칠수라 소개하려 한다.'배칠수가 인천 출신이었어?'라고 되묻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1972년 전남 무안에서 칠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배칠수는 스스로 '인천 출신'이라 지칭하지 않지만, 자신이 '인천 사람'이라고 분명히 얘기한다.그는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먼저 왔던 형제들 손에 이끌려 열살 무렵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인천이 배칠수처럼 많은 이주민의 보금자리로 꾸려진 도시임을 그의 이야기로 새삼 깨닫는다.지난 10일 인천 미추홀구 경인방송 사옥 6층 스튜디오에서 만난 배칠수는 "인천 친구들에게 '내가 일을 다 그만두면 꼭 돌아올게'라고 얘기했던 것을 비롯해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 다시 인천에서 방송을 시작했다"며 "숭의동 자택에서 차로 8분 거리라 가까워서 참 좋다"고 말했다.■ 누나들 손 잡고 인천 올라온 시골 소년배칠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무안에서 그를 자식처럼 키우던 누나들은 하나둘씩 인천으로 떠나 모여 살고 있었다. 누나들은 영특한 소년 배칠수를 두고 "크게 될 애를 고향에 두면 베린다('버린다' 방언)"며 인천으로 불러들였다.당시 배칠수 누나들은 1969년 조성된 수출공단 4단지(부평국가산업단지)나 1973년 들어선 수출공단 5·6단지(주안국가산업단지)에서 일하며 부평구와 계양구 등지에서 살았다. 자취하거나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인천 올라와서 처음 산 동네는 갈산동(부평구)이었고, 효성동(계양구) 갔다가, 청천동(부평구) 갔다가, 작전동(계양구), 병방동(계양구), 다시 부평으로 왔다가, 주안(미추홀구), 제물포(미추홀구), 가좌동(서구)까지 안 살아본 동네가 없네요. 그땐 형님과 누나들도 살기 빠듯한데 한 집에서 오래 머물기 어려웠어요. 형제들 집에서 돌아가며 살았죠."류제헌 한국교원대 교수 등이 2010년 8월 '인천학연구' 제13호에 게재한 논문 '인천시 아이덴티티 형성의 인구·문화적 요인'을 보면, 타 지방에서 인천으로의 대규모 이주와 인구 구성 변화는 3개 단계에 걸쳐 나타났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1950년대 초반 일어난 황해도 출신 실향민의 피란 또는 집단 이주다. 타 지방에서 가장 먼저 인천으로 대거 이동한 황해도민들은 동구 만석동·송현동, 중구 북성동·송월동·답동 등지에 많이 정착했다. 대표적인 동네가 동구 송현동 수도국산 달동네다. 당시 인천은 전국에서 황해도 출신 피란민이 가장 많이 모인 지역이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갈 길이 막힌 고향이 가까워서다. 황해도민들은 배다리 중앙시장, 용현시장 같은 상권을 개척하고 발전시켰다.1950년대 황해도민들의 이주가 비자발적이었다면, 이어진 1960~1980년대 충남 출신자들의 대규모 유입은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자발적 이주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인천에 공업단지가 조성됐다. 특히 당진, 서산, 태안 등 해로를 통해 인천과의 왕래가 원활한 지역에서 이주가 많았다. 이들은 대성목재, 대한중공업(현대제철) 등 대형 제조업체와 인접한 중구, 동구 등지에 주로 살다가 인천시의 성장에 따라 미추홀구(주안), 남동구 쪽으로 이동했다.배칠수 가족 사례인 호남 지역 출신자의 대규모 인천 이주는 주안·부평수출공단과 남동공업단지(남동국가산업단지)가 활발하게 가동한 1980~1990년대에 주로 이뤄졌다. 충남 출신 이주민과 달리 호남 이주민들은 육로로 서울을 거쳐 인천으로 왔다. 서울 외곽에 인접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지역으로 진입하기 상대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그들의 일터 또한 배칠수의 누나들처럼 대부분 부평구와 계양구 공업 지역이었다.■ 예체능 소질 보인 학창 시절, 잠깐 방황도인천에 정착했으나 집안 사정상 초등학교는 고향에서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예체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미술에도 소질이 있었고 운동도 잘했다. 중학생 배칠수는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여러 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방황하는 시기도 있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살아야 했던 배칠수의 학창 시절은 조금 힘들기도 했다."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얘길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예술고 진학을 못하면서 인생의 큰 좌절이라도 겪은 것처럼 잠깐 공부를 놓고 말썽도 피우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주안이나 동인천 등지에 있는 나이트클럽이나 디스코텍(디스코클럽) 같은 곳에도 가봤는데, 이제는 다 공소시효가 지난 얘기입니다.(웃음)"고교생 배칠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형과 누나들에게 배운 것처럼 항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리는 기념품 제조 공장에서 잠시 일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특수에 힘입어 정부가 수도권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기념품 제조 산업을 한창 육성하던 시절이다."하와이로 수출할 기념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어요. 'MAUI'(하와이 마우이섬)라고 쓰인 야자수 모양 기념품 같은 것을 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수출한 모양이더라고요. 공장을 그만두고 학교에 다시 나가면서 공중전화 청소 아르바이트도 하고, 밤에는 학원을 다니면서 대입 시험 준비를 했어요."그는 1991년 인천 동구 송림동에 있는 대헌공업전문대학 사회체육과에 진학했다. 지금의 인천재능대학교다.■ 성대모사 달인, 라디오 DJ가 되다1993년 대학을 졸업한 배칠수는 보디빌더로 활동했고, 1997년 매형과 함께 계양구 계산동에 헬스클럽을 차리기도 했다. 수영선수인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방송인 데뷔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맥 라이언, 임청하 등 해외 스타의 더빙을 전담했던 성우 귄희덕씨가 창설한 1999년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 출전하면서다."아내가 신문에서 대회 공고를 보고 상금이 100만원이라며 저 대신 참가 신청을 했어요. 준비 없이 예선 대회장에 갔다가 다른 참가자들이 진지하게 준비하는 걸 보고, 저도 그 자리에서 상황을 짜고 목소리 연기를 해서 예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대회 주최 측에서 따로 연락이 왔어요. 대상 후보군이니 제대로 준비해 본선에 출전해달라고요. 제 성대모사가 동네에서 부린 잔재주인 줄만 알았더니 괜찮은 수준이었나봐요. 대상을 받았습니다."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승한 그해부터 각종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는 2000년 9월부터 지금의 팟캐스트 격인 인터넷 방송국 '렛츠캐스트'에서 MBC 라디오 인기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패러디한 '배칠수의 음악텐트'를 진행하며 유명세를 탔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한 2000년대 초반 태동한 인터넷 방송의 대표 주자가 됐다. 본명 이형민으로 활동하던 그가 '배칠수'란 예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때다. '패러디' '엽기' 같은 문화 코드가 유행하던 시대였다."인터넷 방송이 막 태동하면서 자본이 모이고, 괜찮은 라디오 작가들이 인터넷으로 진출하던 시기였어요. 친한 작가 형이 저와 함께 기획해보자며 제안한 인터넷 방송이 '배칠수의 음악텐트'였습니다. 진짜 배철수 형님이 '너 진짜 신기한 애다'라며 연락했고, 그때부터 배철수 형님과 친하게 지냈죠."성대모사의 달인. 그를 20년 넘게 라디오 DJ로 활약하게 한 원동력이다. 역대 대통령들과 거물 정치인들 모사는 기본이고 배철수, 최양락, 손석희 같은 방송인에 차범근, 이승엽, 허재 등 스포츠 스타, 황수관이나 앙드레김 같은 문화계 인사까지 성대모사를 할 수 있는 인물이 50명쯤 된다고 한다. 성대모사로 유명한 방송인 가운데서도 어마어마한 연습량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다큐멘터리나 TV 프로그램 내레이션으로도 배칠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정치 풍자를 하려면 가장 먼저 대통령이 돼야 하잖아요. 대통령이 바뀌면 그것부터 연습하는 거죠. 지금의 대통령만 보더라도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바뀌잖아요. '오늘은 이 인물이 이런 기분일 거야' 같은 미묘한 심경 변화를 집중력 있게 캐치해야 합니다. 제가 성대모사한 인물 중에 가장 애정이 있는 사람은 한참 열정적으로 활동한 시기에 목소리를 연기했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인 것 같습니다."■ 17년 만에 라디오로 다시 만나는 인천 시민경인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DJ를 맡은 건 2007년 '안녕하세요 배칠수입니다' 이후 17년 만이다. 청취자가 보내는 사연에서 나오는 장소 대부분이 잘 아는 곳이라 동네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는 인천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계양산을 꼽았다."계양산 꼭대기에선 인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죠. 어린 시절 계양산 정상에선 세상이 정말 선명하게 보였는데, 요새 올라가서 보면 많이 탁해지긴 했네요. 그래도 인천 하면 저는 계양산을 꼽겠습니다."'아임 프롬 인천'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제작하는 경인일보 콘텐츠영상팀 PD가 성대모사를 주문했을 땐 그의 평생 장기 '배철수'의 목소리로 유감없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홍보했다."배철수입니다. 제가 직접 가서 좀 얘기해 드려야 하는데, 목소리만 보냅니다. 배칠수의 Always 인천, 이거 끝나면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이어지는데요. 많이 청취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잘돼야 진짜 배철수도 한 번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계양산방송인 배칠수의 누나들이 일했던 인천 수출산업공업단지 조성 공사 기공식. /출처 인천시사기사 전문 온라인
17년만에 경인방송 컴백전국 라디오방송 진행하던 시절 인천사연 많이 소개인천출신 아니지만 나는 '인천 사람'IT 열풍과 함께 '패러디' '엽기' 같은 단어가 대중문화 코드로 주목받던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방송과 지상파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정치·시사 풍자 코미디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물론 노무현, 이회창, 정몽준 같은 2002년 대선 주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 아이러니하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펼쳐지자 대중은 '가짜'를 '진짜'처럼 들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누군가는 불편하기도 했다.그 중심에는 성대모사의 달인, 방송인 배칠수(52·본명 이형민·사진)가 있었다. 50명 넘는 인물의 성대모사를 할 수 있는 배칠수는 주로 라디오에서 활약했다. 이른바 MZ세대에게는 중독성 있는 CM송 '배칠수의 꽃배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배칠수를 설명하는 여러 열쇳말 중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 '인천'이다. 1972년 전남 무안에서 칠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배칠수는 열살 무렵 가족과 함께 인천에 정착했다. 가족이 한꺼번에 인천으로 올라온 게 아니라 형과 다섯 누나들이 일자리를 찾아 차례로 고향을 떠났다. 부모를 일찍 여읜 배칠수는 당시 지방에서 인천에 온 이주민들의 삶이 그랬듯 형제들과 어렵지만 꿋꿋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을 겪은 배칠수는 자신을 누구보다도 '인천 사람'이라고 말한다.1999년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데뷔한 배칠수는 25년 동안 종횡무진 방송가를 누볐다. 지난달 27일부터 인천에 자리한 수도권 라디오 방송사 '경인방송'의 새 프로그램 'Always 인천' 진행을 맡아 인천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 2007년 경인방송에서 잠시 프로그램을 진행한 이후 17년 만이다. 배칠수는 "전국 라디오 방송을 진행할 때 인천 사연을 많이 소개했는데, 어느 청취자로부터 자기 동네 얘기만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며 "인천으로 돌아오니 확실히 듣는 분들의 수는 적지만, 그게 오히려 더 동네 같은 따뜻한 느낌이 들어 좋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아임 프롬 인천·(29)] "가장 아끼는 성대모사는 배철수 형님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올웨이즈(Always) 인천, 배칠수입니다." 지난달 27일부터 경인방송(90.7㎒) 라디오 오후 4~6시 프로그램 'Always 인천'의 진행을 맡아 중저음의 편안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이같이 오프닝 멘트를 전하는 DJ 배칠수. 본명 이형민보다 예명 배칠수가 대중에게 더 익숙하므로 '아임 프롬 인천' 스물아홉 번째 초대 손님으로 그를 방송인 배칠수라 소개하려 한다. '배칠수가 인천 출신이었어?'라고 되묻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1972년 전남 무안에서 칠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배칠수는 스스로 '인천 출신'이라 지칭하지 않지만, 자신이 '인천 사람'이라고 분명히 얘기한다. 그는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먼저 왔던 형제들 손에 이끌려 열살 무렵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방송인으로 데뷔한 이후 서울을 주무대로 활동했으나, 줄곧 인천을 보금자리로 삼았다. 인천이 배칠수처럼 많은 이주민의 보금자리로 꾸려진 도시임을 그의 이야기로 새삼 깨닫는다. 지난 10일 인천 미추홀구 경인방송 사옥 6층 스튜디오에서 만난 배칠수는 “인천 친구들에게 '내가 일을 다 그만두면 꼭 돌아올게'라고 얘기했던 것을 비롯해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 다시 인천에서 방송을 시작했다"며 “숭의동 자택에서 차로 8분 거리라 가까워서 참 좋다"고 말했다. ■누나들 손 잡고 인천 올라온 시골 소년 배칠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늦둥이 막내를 출산한 후 좀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무안에서 그를 자식처럼 키우던 누나들은 하나둘씩 인천으로 떠나 모여 살고 있었다. 누나들은 영특한 소년 배칠수를 두고 “크게 될 애를 고향에 두면 베린다('버린다' 방언)"며 인천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배칠수 누나들은 1969년 조성된 수출공단 4단지(부평국가산업단지)나 1973년 들어선 수출공단 5·6단지(주안국가산업단지)에서 일하며 부평구와 계양구 등지에서 살았다. 자취하거나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인천 올라와서 처음 산 동네는 갈산동(부평구)이었고, 효성동(계양구) 갔다가, 청천동(부평구) 갔다가, 작전동(계양구), 병방동(계양구), 다시 부평으로 왔다가, 주안(미추홀구), 제물포(미추홀구), 가좌동(서구)까지 안 살아본 동네가 없네요. 그땐 형님과 누나들도 살기 빠듯한데 한 집에서 오래 머물기 어려웠어요. 형제들 집에서 돌아가며 살았죠." 그가 인천으로 이주한 1980년대는 지금의 대도시 인천을 구성하고 있는 인구가 대규모 이주하는 막바지였다. 물론 최근 신도시 조성 등 대단지 아파트 입주에 따른 집단 이주가 있긴 하지만, 과거 지방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모습과는 성격이 다르다. 류제헌 한국교원대 교수 등이 2010년 8월 '인천학연구' 제13호에 게재한 논문 '인천시 아이덴티티 형성의 인구·문화적 요인'을 보면, 타 지방에서 인천으로의 대규모 이주와 인구 구성 변화는 3개 단계에 걸쳐 나타났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1950년대 초반 일어난 황해도 출신 실향민의 피란 또는 집단 이주다. 타 지방에서 가장 먼저 인천으로 대거 이동한 황해도민들은 동구 만석동·송현동, 중구 북성동·송월동·답동 등지에 많이 정착했다. 대표적인 동네가 동구 송현동 수도국산 달동네다. 당시 인천은 전국에서 황해도 출신 피란민이 가장 많이 모인 지역이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갈 길이 막힌 고향이 가까워서다. 황해도민들은 배다리 중앙시장, 용현시장 같은 상권을 개척하고 발전시켰다. 1950년대 황해도민들의 이주가 비자발적이었다면, 이어진 1960~1980년대 충남 출신자들의 대규모 유입은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자발적 이주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인천에 공업단지가 조성됐다. 특히 당진, 서산, 태안 등 해로를 통해 인천과의 왕래가 원활한 지역에서 이주가 많았다. 이들은 대성목재, 대한중공업(현대제철) 등 대형 제조업체와 인접한 중구, 동구 등지에 주로 살다가 인천시의 성장에 따라 미추홀구(주안), 남동구 쪽으로 이동했다. 배칠수 가족 사례인 호남 지역 출신자의 대규모 인천 이주는 주안·부평수출공단과 남동공업단지(남동국가산업단지)가 활발하게 가동한 1980~1990년대에 주로 이뤄졌다. 충남 출신 이주민과 달리 호남 이주민들은 육로로 서울을 거쳐 인천으로 왔다. 서울 외곽에 인접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지역으로 진입하기 상대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또 앞서 황해도 출신과 충남 출신 주민이 중구, 동구, 미추홀구에 먼저 정착했으므로 호남 출신 주민들이 정착하기에 부평구와 계양구 등지가 무난했을 것이라고 류제헌 교수는 분석했다. 그들의 일터 또한 배칠수의 누나들처럼 대부분 부평구와 계양구 공업 지역이었다. 인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토박이가 적다'는 말의 인구사회학적 분석이다. 이러한 인천의 인구 구성은 현재까지도 지역별 향우회 활동, 지역 정치 지형 등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체능 소질 보인 학창 시절, 방황도 했지만… 인천에 정착했으나 집안 사정상 초등학교는 고향에서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예체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미술에도 소질이 있었고 운동도 잘했다. 교실에선 늘 레크리에이션을 담당할 정도로 끼가 많은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성적도 좋았다. 중학생 배칠수는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여러 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방황하는 시기도 있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살아야 했던 배칠수의 학창 시절은 조금 힘들기도 했다.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얘길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미술대회에 나가면 누나들이 무엇이라도 사서 먹으라고 용돈을 주니까 그 맛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죠. 그런데 예술고 진학을 못하면서 인생의 큰 좌절이라도 겪은 것처럼 잠깐 공부를 놓고 말썽도 피우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주안이나 동인천 등지에 있는 나이트클럽이나 디스코텍(디스코클럽) 같은 곳에도 가봤는데, 이제는 다 공소시효가 지난 얘기입니다.(웃음)" 지금 시대 기준으로 불량 청소년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도 할 말은 있다. 청소년이 건전하게 여가를 보낼 장소와 수단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한 시대였다. 어른의 잘못도 컸다. 청소년들이 출입할 수 없는 디스코텍 등 유흥업소 가운데 일부 업소는 청소년 출입을 눈감았다. 서울과 인천 등지 번화가에선 아예 10대 전용으로 바꾼 불법 디스코텍이 성업해 사회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오죽하면 정부 차원에서 서울, 인천, 광주, 전주 등에 청소년을 위한 디스코장을 조성해 운영할 정도였다. 1991년 2월21일자 한겨레신문을 보면, 인천 서구 가좌동에 있던 인천 근로청소년 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전용 디스코장을 운영했다. 이곳에선 술 대신 청량음료를 줬으며, 어두컴컴한 성인 디스코텍보다 조명을 밝게 켰다. 어른은 '청소년의 보호자'만 출입할 수 있는 청소년만의 공간이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이 청소년 전용 디스코장에서 만난 한 청소년은 “요즈음은 토끼춤이 인기가 있어요. 껑충껑충 뛰면서 두 팔을 앞뒤로 흔드는 춤이죠. 이렇게 마음껏 흔들고 나면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셔요"라고 말했다. 고교생 배칠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형과 누나들에게 배운 것처럼 항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리는 기념품 제조 공장에서 잠시 일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특수에 힘입어 정부가 수도권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기념품 제조 산업을 한창 육성하던 시절이다. “하와이로 수출할 기념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어요. 'MAUI'(하와이 마우이섬)라고 쓰인 야자수 모양 기념품 같은 것을 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수출한 모양이더라고요. 학교에 나가기 싫어서 취업했는데, 이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제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구나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공장을 그만두고 학교에 다시 나가면서 공중전화 청소 아르바이트도 하고, 밤에는 학원을 다니면서 대입 시험 준비를 했어요. 그렇게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는 1991년 인천 동구 송림동에 있는 대헌공업전문대학 사회체육과에 진학했다. 지금의 인천재능대학교다. 인천재능대는 1970년 대헌전자공업전문학교로 설립돼 개교 초기 전자과, 전기과, 무선통신과를 운영해 기술자를 양성했다. 1974년 대헌공업전문학교로 교명을 개편하고 점차 학과를 증설해 1991년 전자과·정보통신과·전자통신과·전자계산과 등 공학계열 7개 학과, 경영과와 유아교육과, 사진과·사회체육과·생활음악과 등 예체능계열 3개 학과를 포함해 총 12개 학과 1천200명 재학생을 둔 규모 있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1997년 (주)재능교육 박성훈 대표이사가 학교법인을 인수해 재능대학 시대를 열었고, 2011년 인천재능대학교라는 '인천'을 붙인 교명으로 개편했다. 현재는 AI(인공지능), 웰니스, 호스피탈리티경영, 예술디자인, 미래창업학부 등 계열에서 27개 학과를 운영하며 5천명 이상이 재학 중인 인천의 대표 전문대학으로 입지를 다졌다. ■성대모사 달인, 라디오 DJ가 되다 1993년 대학을 졸업한 배칠수는 보디빌더로 활동했고, 1997년 매형과 함께 계양구 계산동에 헬스클럽을 차리기도 했다. 수영선수인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헬스클럽은 성업했다. 방송인 데뷔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잉그리드 버그만, 맥 라이언, 임청하 등 해외 스타의 더빙을 전담했던 성우 귄희덕씨가 창설한 1999년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 출전하면서다. “아내가 신문에서 대회 공고를 보고 상금이 100만원이라며 저 대신 참가 신청을 했어요. 제 목소리가 좋고 다른 사람 흉내도 잘 냈거든요. 헬스클럽 운영으로 바빠 대회에 나가기 싫었는데, 참가비가 꽤 되더라고요. 준비 없이 예선 대회장에 갔다가 다른 참가자들이 진지하게 준비하는 걸 보고, 저도 그 자리에서 상황을 짜고 목소리 연기를 해서 예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대회 주최 측에서 따로 연락이 왔어요. 대상 후보군이니 제대로 준비해 본선에 출전해달라고요. 제 성대모사가 동네에서 부린 잔재주인 줄만 알았더니 괜찮은 수준이었나봐요. 대상을 받았습니다."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승한 그해부터 각종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는 2000년 9월부터 지금의 팟캐스트 격인 인터넷 방송국 '렛츠캐스트'에서 MBC 라디오 인기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패러디한 '배칠수의 음악텐트'를 진행하며 유명세를 탔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한 2000년대 초반 태동한 인터넷 방송의 대표 주자가 됐다. 본명 이형민으로 활동하던 그가 '배칠수'란 예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때다. '패러디' '엽기' 같은 문화 코드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인터넷 방송이 막 태동하면서 자본이 모이고, 괜찮은 라디오 작가들이 인터넷으로 진출하던 시기였어요. 친한 작가 형이 저와 함께 기획해보자며 제안한 인터넷 방송이 '배칠수의 음악텐트'였습니다. 진짜 배철수 형님이 '너 진짜 신기한 애다'라며 연락했고, 그때부터 배철수 형님과 친하게 지냈죠. 이를 계기로 진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철수와 칠수'라는 코너로 오랫동안 출연했습니다." 성대모사의 달인. 그를 20년 넘게 라디오 DJ로 활약하게 한 원동력이다. 역대 대통령들과 거물 정치인들 모사는 기본이고 배철수, 최양락, 손석희 같은 방송인에 차범근, 이승엽, 허재 등 스포츠 스타, 황수관이나 앙드레김 같은 문화계 인사까지 성대모사를 할 수 있는 인물이 50명쯤 된다고 한다. 단순히 목소리를 따라하는 수준이 아니라 시사 풍자의 영역으로 현실에 접목한다. 성대모사로 유명한 방송인 가운데서도 어마어마한 연습량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다큐멘터리나 TV 프로그램 내레이션으로도 배칠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정치·시사 풍자를 다루는, 그것도 한 인물을 복사기처럼 똑같이 표현하는 방송인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방송 활동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0년 이상씩 진행하던 프로그램들에서 덜컥 하차하게 됐을 때다. 지금까지도 시원하게 말하지 못할 민감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정치 풍자를 하려면 가장 먼저 대통령이 돼야 하잖아요. 대통령이 바뀌면 그것부터 연습하는 거죠. 목소리를 먼저 만드는 건 아니고, 반대로 라디오에서 하는 콩트나 상황극 시나리오가 주어지면 그 내용에 맞춰 인물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와중에 제가 그 사람의 심정이 돼 보려고 항상 노력해야 하죠. 지금의 대통령만 보더라도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바뀌잖아요. '오늘은 이 인물이 이런 기분일 거야' 같은 미묘한 심경 변화를 집중력 있게 캐치해야 합니다. 제가 성대모사한 인물 중에 가장 애정이 있는 사람은 한참 열정적으로 활동한 시기에 목소리를 연기했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인 것 같습니다." ■17년 만에 라디오로 다시 만나는 인천 시민들 경인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DJ를 맡은 건 2007년 '안녕하세요 배칠수입니다' 이후 17년 만이다. 청취자가 보내는 사연에서 나오는 장소 대부분이 잘 아는 곳이라 동네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라고 한다. 반평생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 배칠수는 라디오란 매체에 대해 “우리가 일을 하거나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옆에서 비교적 들을 만한 이야기를 중얼중얼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일상에서 흔히 지나치는 소리이면서도 한번 정도 귀를 기울여 보면 들을 만한 이야기나 노래가 나오는 그런 매체가 배칠수의 라디오다. 좋은 이야기와 노래를 부담 없이 들려주는 가까운 친구 같은 DJ가 되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인천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계양산을 꼽았다. “어렸을 때 많이 올라갔어요. 계양산 꼭대기에선 인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죠. 어린 시절 계양산 정상에선 세상이 정말 선명하게 보였는데, 요새 올라가서 보면 많이 탁해지긴 했네요. 그래도 인천 하면 저는 계양산을 꼽겠습니다." '아임 프롬 인천'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제작하는 경인일보 콘텐츠영상팀 PD가 성대모사를 주문했을 땐 그의 평생 장기 '배철수'의 목소리로 유감없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홍보했다. “배철수입니다. 제가 직접 가서 좀 얘기해 드려야 하는데, 목소리만 보냅니다. 배칠수의 Always 인천, 이거 끝나면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이어지는데요. 많이 청취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잘돼야 진짜 배철수도 한 번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 약력 1972년 전남 무안 출생 1985년 해제초등학교 졸업 1988년 부평서중학교 졸업 1991년 세일고등학교 졸업 1993년 인천재능대학교 사회체육과 졸업 1999년 슈퍼 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 대상 2003년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시트콤부문 신인상 2003년 SBS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2005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특별상 2010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2017년 제29회 한국PD대상 라디오 진행자부문 출연자상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