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

 

[경인칼럼]거리두기 시대의 집과 생활문화

코로나19 위기로 강요당하는 새 일상 '집콕'자족시설에서 '복합공간'으로 역주행 초래부작용 속… 도시·국가·세계로 동심원 확장대면 중요 문예생태계도 변화 효율 지원을집으로! 코로나19 위기가 강요하고 있는 새로운 일상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포털 사이트 네이버가 집의 내부를 의미하는 메인 로고와 '모두를 위해' 집에 머물러 달라는 재택 슬로건을 게시하기도 했다. 감염확산을 막기 위한 집으로의 피난현상을 국민들은 '집콕'이란 신조어로 부르고 있지만 실은 누구도 원치 않는 가택연금(軟禁)이요, 자발적 '위리안치(圍籬安置)'이다. '숙소'에 불과했던 집이 졸지에 복합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동안 집은 침실로서 휴식공간으로 축소돼 왔다. 전통사회의 집, 특히 농촌사회의 집은 공동의 노동, 식사, 휴식과 놀이, 양육, 탄생과 죽음, 질병의 치유 기능을 갖추고 있는 자족적 공간이었지만 그 같은 기능들은 차츰 공장과 일터, 학교, 병원, 식당과 같은 '사회적 집'으로 '이양'돼 왔다. 집은 더이상 육체의 확장, 삶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수익성이 높은 투자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집이 가지고 있던 본질적 가치는 무시되고 교환가치로만 측정되기 시작한 것, 이러한 현상은 물신사회에서 모든 사물과 인간이 겪어야 하는 운명이라고 할 수 있으나, 부동산 가격 폭등과 전세난과 같은 고질적 사회문제를 초래한 원인이기도 하다.팬데믹 이후의 가족이 모두 집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사회에 양도했던 집의 기능을 회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재택' 생활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온 가족이 한 공간에서 일하고 식사하고 휴식까지 함께 해야 하니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다. 낮에는 비어 있던 집이 사무실로, 온라인 학습장으로, 식당으로, 문화공간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이 같은 공간의 역주행은 마을과 도시, 국가와 세계라는 더 확장된 공간 단위에서도 동심원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재외국민들은 귀국하고, 시민들도 이동을 최소화하고 집과 집 근처로 행동반경을 축소하며 생활한다.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가정으로, 혹은 주부들에게 전가되고 집중되면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코로나19는 문화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대면이 중요한 문화예술의 창작, 제작, 유통, 소비, 향유 등 문화예술생태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인 봉쇄조치, 사회적 거리두기, 격리, 방역지침은 문화시설의 휴관, 공연·전시·축제 등의 취소로 이어져 문화예술활동의 중단과 심대한 위축을 가져왔다. 위기 속에서 기회도 있다. 아동청소년 도서나 투자·재테크 관련 도서에 집중되고 있긴 하나, 도서판매량이 전년도 대비 2배 가까이 증가하고 있다. 재택근무와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장기화되고 있기 때문이다.집에서 여가와 취미생활을 하는 '홈하비(Home Hobby)' 현상도 거리두기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이다. PC방, 노래방, 영화관 등 외부에서 즐기던 문화 소비활동이 집으로 들어왔다. 가정내 취미활동의 증가는 관련 상품 판매량 통계에 의해 확인된다. 집에서 영화관람을 즐길 수 있는 '프로젝터용품'과 영화 'DVD'의 판매량이 급증하고 유화와 드로잉 등 미술용품 신장세도 가파르다. '유화용품' 판매량이 3배 가까이 증가했고, '드로잉용품'과 '조소용품'도 늘고 있다. 사운드바를 포함한 '오디오'와 음악 감상을 위한 '음반'도 증가했다. 대표적 취미 상품인 악기 판매량도 증가하고 있다. 피아노와 트럼펫은 두 배 이상 팔리고 있다. 가정내 취미생활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생활패턴으로 자리잡게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가정내 취미활동과 예술활동은 늘어난 여가시간을 활용하고 코로나 우울증을 극복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이다. 정부나 지자체가 이 같은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한다면 당면한 코로나 위기는 국민들의 문화 향유와 창조 역량을 드높이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2020-12-01 김창수

[경인칼럼]수도권매립지를 떠도는 유령

朴시장의 전략 '대체지 확보'로 생각했는데사전조율도 없이 자체매립지 발표 주객전도예전 김포·영종 해안매립장 계획에서 단서인천 안떠날 진실에 일갈… 자충수? 승부수?지난해 9월 이른바 '투 트랙' 전략을 들고 나올 때부터 아슬아슬했다. 그래도 대체 매립지 확보가 대전제이겠거니 생각했다. 자체 매립지 조성은 압박의 수단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경계가 흐려졌다. 급기야 1년 만에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12일 박남춘 시장이 인천시만의 자체 폐기물매립지 조성과 소각장 증설 계획을 공식발표한 이후의 상황은 익히 아는 바다. 야당은 물론 같은 당 국회의원과 기초지자체장들까지 분노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의원조차 사전조율 없이 후보지를 발표했다고 비난한다. 아무리 봐도 자충수다. 왜 박 시장은 이렇게 스스로를 외통수로 몰아넣는 것일까. 왜 이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에 정치적 명운을 거는 걸까.어쩌면 아주 오래전 신문기사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1987년 9월 19일 동아일보 6면 머리기사다. '정부는 경기도 김포·영종지구에 1백50년 이상 매립 가능한 2천4백만 평 규모의 수도권 대단위 해안매립쓰레기장을 건설키로 했다. 환경청이 18일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거쳐 최종확정한 '수도권 쓰레기광역해안매립계획'에 따르면 1단계로 김포지구의 간척농경지 6백10만평을 사들여 89년부터 쓰레기장으로 사용하고, 2단계로 영종도와 강화군 길상면 사이 공유수면을 92년부터 사용한다는 것.(중략) 영종지구 매립장은 내년에 영종도 앞바다를 쓰레기 매립예정지구로 고시, 92년부터 1백20년 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후략)'.여의도 면적의 6배가 넘는 '6백10만평 김포지구'는 계획대로 진행됐다. 예정지구로 남겨져 있는 제4매립장까지 포함해 1천979만㎡에 달하는 지금의 수도권매립지 전체 규모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반면 김포지구 3배 크기로 1992년부터 2112년까지 120년 사용 계획을 세웠던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 공유수면 '영종지구'는 신공항 건설 추진으로 없던 일이 됐다. 2개 지구를 합해 150년을 사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영구사용'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전체 계획면적의 75%를 차지하는 영종지구의 취소는 이런 원대한(?) 꿈의 소멸로 해석됐다.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유령'이 여전히 수도권매립지를 떠돌고 있음을 확인한 건 지난 2010년을 전후해서다. 2009년 6월 조춘구 당시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사장이 매립지 영구사용의 필요성을 주장하더니 이듬해 7월엔 공사 고위 관계자가 영구사용을 기정사실화 했다.'(전략)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와 서울시 등에 따르면 오는 2016년 매립기간이 종료되는 수도권매립지의 대체 부지 확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인천의 매립지를 사실상 영구 사용하는 방향으로 내부방침이 정해졌다.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관계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3, 4매립장을 사용한 후 1매립장을 순환 사용하는 것도 가능해 최소 100년은 인천 매립지 이전이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쓰레기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데다 대체 매립지를 찾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인천 매립지를 영구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후략)' (머니투데이, 2010년 7월 23일). 그 뒤 2015년 4자 합의 때도, 지난해 대체 매립지 선정 용역의 발표 연기와 '밀봉' 때도, 폐기물 전처리시설 건설과 반입총량제 도입 논란 때도 유령은 어김없이 나타났다.'4자 협의체 합의'와 '대체 매립지 공모'라는 기존의 프레임을 깨뜨리자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제야 그 정체를 확연히 드러낸 매립지의 유령은 100년이고 200년이고 인천 땅을 떠나지 않고 버틸 심산이다. 과연 인천시장이 "그것이 여러분이 외치는 정의고, 공정이냐?"고 일갈할 만하다. 진실과 대면했음에도 말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고, 대비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다. 자충수가 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인천시장으로서 침묵과 방관과 회피를 택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면 모든 궁금증이 풀린다. 또 어찌 알겠는가. 박 시장의 자충수가 대마(大馬) 잡는 승부수로 바뀌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될지./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

2020-11-24 이충환

[경인칼럼]일자리와 주주자본주의

코로나 불황에 취준생 황량 들판 허수아비 인적투자 줄이고 주주가치 극대화 기업 탓1970년대 신자유주의, 이러한 논리에 날개경영인 단기성과 매몰땐 富양극화 더 심화올가을 취업시즌이 끝나가고 있다. 벽두부터 코로나19와 힘겨운 싸움으로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채용할 겨를이라도 있었는지 의문이다. 취업준비생들이 추수 끝난 들판을 지키는 허수아비 신세는 면해야 할 텐데 안타깝다.항간에서는 코로나 백신개발 낭보에 일자리 회복을 기대하는 눈치이나 예단은 금물이다. 기업들의 직원 채용방식이 수시채용으로 전환하는 터에 다른 곳에서 신입사원 연수(?)를 마친 경력직을 선호하고 있는 탓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처럼 기업들이 인적자본 투자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인구감소에도 노동시장의 과잉공급이 화근이다. 한때 전국의 공단도시마다 동네 강아지들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였는데 그 많던 일자리들이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갈수록 위력을 더하는 주주행동주의가 배경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밀튼 프리드만 교수가 1970년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기고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높이는 것'이란 칼럼을 계기로 주주가치 극대화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경제 불황에 따른 기업의 성과 저조로 주주들의 불만이 커진 것이다. 기업경영의 최우선 순위는 주주들의 몫인 배당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경영학에서 주주는 '잔여청구권자'로 규정하고 있다. 상장기업들은 성과분배에서 경영자, 노동자, 공급업체, 채권자, 지주 등 여타 이해관계자들이 우선이고 꼴찌 차례가 배당으로 잔여부분이 없으면 주주들은 헛물만 켠다. 불경기일수록, 기업의 경영실적이 나쁠수록 주주들의 사기가 위축되는 것이다.프리드만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때문에 비용이 상승하는 것도 그릇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는 주주가치 극대화 논리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 대만, 멕시코 등 선발 개도국들에 대한 개방 압력이 점증했는데 선진국들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업장부터 해외이전을 획책했다. 그 와중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매김했으며 생산의 해외 아웃소싱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으로 절정기를 맞이했다.국내에서는 1980년대 중반 민주화에 따른 비용급증을 계기로 전국 공업단지의 공동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세계화론자들은 선진국 기업들의 이윤극대화와 개발도상국들의 일자리 확대를 들어 무한경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했다. 덕분에 지구촌에는 전대미문의 저물가시대를 맞았지만 무한경쟁 이익의 대부분은 극소수 가진 자들에 집중되었을 뿐이다. 세계 곳곳에 장기저성장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금융혁신은 주주가치 극대화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업무 전산화 등을 배경으로 높은 이율의 자유금리상품과 '머니 마켓펀드'(MMF)가 등장한 이래 금융공학은 지속적으로 금융화의 저변확대를 선도했다. 기업들의 경영전략도 변했다. 1968년에 IBM의 톰 왓슨 주니어 회장은 IBM의 3가지 우선순위로 첫째 노동자 존중과 둘째 충실한 고객서비스, 셋째 탁월함 달성 등을 들었지만 2002년 사뮤엘 팔미사노 CEO는 IBM의 주된 목적을 향후 5년 이내에 주당 순이익을 2배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단기간 내에 실적을 끌어올려 최대한 많이 현금을 뽑아내려는 전략이었다.결정적인 것은 기업들이 유보이윤으로 시장에서 자사주를 매입해 지배권을 튼튼히 하는 내용의 자사주 매입이었다. 적대적 M&A 등으로 경영권 방어에 유리하나 주주 입장에선 필요한 때에 거금(?)을 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자사주 매입에는 배당에서처럼 벌금성(?) 세금도 없어 일거양득이다. 전문경영인들도 자사주 매입을 반긴다.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해서 소각하면 발행주식수 감소로 주당순이익(EPS)이 상승해 경영자들의 몫(스톡옵션)이 덩달아 커지는 때문이다.오너와 경영인들이 단기성과주의를 탐하는 한 장기적으로 부(富)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투자성향은 떨어져 일자리가 더 감소하는 법이다. 1981년부터 20년 동안 미국 GE 회장을 역임한 '전설적 경영자' 잭 웰치는 2009년에 '주주가치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아이디어'라 질타했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20-11-17 이한구

[경인칼럼]정치양극화 극복,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거여 선거공학적 정책에 친문으로 세력화 야 무능·존재감 상실… 양당제 균형 무너져자제·관용·사과·반성 '정치혁신'이 없다면한국사회도 치유 불능의 분열 몰고 갈 수도절차적 민주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서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예측불가능한 선거결과의 불확실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내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는 대통령선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부 서울지역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이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을 앞서는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서울시장 선거는 민주당이 우세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현재의 정당시스템으로는 시민의 이해를 적절히 조정하고 사회균열을 조율해 낼 수 있는 기능이 작동할 수 없다.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여당의 수적 우세와 무능하고 존재감을 상실한 보수야당이 정립하는 사실상의 양당제에서 정치적 균형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년 4월의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당은 재산세나 주식양도소득세 등 정부 정책조차 선거공학적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정책과 이념의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다. 또한 민주당 의원들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정책에 도전한다는 논리로 검찰의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조작의혹사건 수사를 정치수사·정치행위 프레임으로 설정하고 있다. 여당과 추미애 법무장관이 대검찰청의 특수활동비를 쟁점화하는 행태도 같은 맥락이다. 여당 의원 누구도 친문이라는 이름으로 세력화된 집단적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이러한 정치양극화는 한국사회를 치유불가능한 분열로 몰고 갈 수 있다. 당파적 적대감이 지속되는 한 어느 세력이 선거에 승리하더라도 정치가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회의 원심력만을 부추기게 될 것이다.미국의 바이든 후보가 당선됐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불복으로 인한 미국 내의 심각한 양극화의 골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국제사회의 주도권 회복은 요원한 길이 될 것이다. 바이든 후보가 승리 확정 언론보도 후 당선인 명의의 첫 성명에서 "분노와 거친 수사를 뒤로 하고, 국가로서 하나가 될 때"라며 통합과 화합을 호소한 것은 비단 미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은 한국정치에 그대로 적용된다. 갈등의 관리는 결국 권력수단과 정책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권력집단이 시동을 걸어야 한다. 지금 민주당의 행태들은 권력의 자제와 상대에 대한 관용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전제와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여야 모두 강경 세력의 지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 현실에서도 정당이기주의와 당파성을 완화한다면 강고한 지지층에 대한 설득으로 합리성과 보편성에 기반하는 정치혁신을 이뤄낼 수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법원 판결에도 사과와 반성의 메시지를 내지 않는 국민의힘이나 김경수 경남지사의 댓글조작 사건에 대한 항소심의 유죄판결에 대한 여당 반응이나 시민의 관점에서는 도긴개긴이다. 이러한 매너리즘과 퇴행이 구조화된 정치구조에서 정치양극화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제도화나 행동을 실천에 옮긴다면 그 세력이 다음 대선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대다수의 시민들은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가 지향할 보편적 가치에 동의한다. 그러나 극단의 외피를 쓴 정치가 한국정치의 동력으로 기능하고, 강경 지지층을 의식한 과잉발언이 정치적 영향력 확대의 기제로 작용하는 한 정치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특히 집권세력의 일사불란한 단일대오는 과거 박근혜를 지지했던 강경보수의 이항대립자로서 설정된다.자제와 관용의 덕목을 집권 세력에게 기대할 수 없다면 보수야당이 정치양극화의 악순환을 끊고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합리적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을 보여야 한다. 이 대장정의 시작을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행태에 대한 사과와 반성에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보수야당의 중도로의 클릭이 경북·대구, 이른바 TK의 지지를 잃을 수 있다는 케케묵은 고정관념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양극화의 단절은 물론 야당의 승리도 힘겨워 보인다./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정치학)·객원논설위원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정치학)·객원논설위원

2020-11-10 최창렬

[경인칼럼]철 지난 유행가, 분도론(分道論)

전국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재결합 바람'"의기투합 수도권 넘어서자" 당찬 목소리천년역사 쪼개자는 것은 '실사구시'보다'위인설관' 앞서는 주장… 세상이 달라졌다중국 당나라는 왕도(王都) 주변을 경현(京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눠 통치했다. 이후 경기(京畿)는 수도 인근 지역을 뜻하게 됐다. 고려 현종은 1018년 개성부를 폐지하면서 주변 12현을 '경기'로 구획했다. 천 년 경기의 시발이다. 충청(충주+청주), 전라(전주+나주), 경상(경주+상주), 강원(강릉+원주)이 지명에서 유래한 것과 다른 연유다.의정부지역 국회의원이 '경기도를 남북으로 갈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행정안전위의 경기도 국감장에서다. 북도 설치 관련 여론조사에서 찬성(46%)이 반대(33%)를 앞선다며 "도민의 이익은 도민이 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 도지사는 '현 단계에선 바람직하지 않다'고 발을 뺐다. 직설을 피한 화법(話法)은 여당 의원에 대한 예의와 존중일 것이다.경기 분도는 도세(道勢)가 급성장한 1980년대 후반 주창됐다. 한수(漢水) 이북에 대한 차별과 홀대론이 발원이다. 1992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 후보가 공약으로 내걸면서 급물살을 탔다. 이후 선거철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했으나 30여 년 지나도록 별 진척이 없다. 경제·사회·정치 비용에 상응하는 수익 창출에 회의와 의문이 여전한 때문이다.북부에서 철 지난 유행가를 부르는 사이, 인천에서는 서부 지역을 합치자고 한다. 부천·시흥·김포시를 통합해 500만 명 인구를 가진 제1 광역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발상이다. 분도론에 휩싸인 때에 통합을 실현하지 못하면 도시통합은 영영 불가능하다고 불을 지른다. 분열의 틈새를 파고들어 반사이익을 챙겨보자는 속셈이다.도의 변방 인천은 1980년 '직할시(현 광역시)'로 승격했다. YS의 가신(家臣) 최기선 시장의 주도로 강화군과 김포 일부가 인천으로 강제 편입됐다. 지역민들의 의사를 묻는 변변한 여론조사도 없었다. 강화 출신 기업인은 요즘도 '왜 우리가 인천이냐'고 한다.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서부평야 문전옥답을 내놓으라 억지를 부린다. 그나마 힘없는 야당 인사의 입이란 게 다행스럽다.분도와 통합은 도정 이슈가 못 된다. 수면이 일렁일 뿐 아래는 고요하다. 구체화 될 만한 동력도 보이지 않는다. 당위성과 합목적성이 부족하고 주목도가 낮다. 정작 도(道)와 이 지사의 고민은 '특례시'일 거다.도내에는 인구 50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10곳이다. 국회에서 심의 중인 관련법이 통과할 경우 전체 지자체의 3분의1이 특례시가 된다. 수부 도시 수원뿐 아니라 주요 도시가 몽땅 떨어져 나간다. 도내 인구 1천331만명 중 63%인 834만명이다. 지방세 총액은 14조4천여억원으로, 전체 25조원의 57%를 점한다. 내년 1월 시행되면 경기도는 껍데기만 남은 초라한 신세가 될 처지다.안병용 의정부시장은 특례시 반대론자다. 지방자치의 수평적 개념과 맞지 않아 지자체 간 위화감과 차별을 조성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차별이 특례시와 일반 시·군의 불균형 발전으로 전이될 수 있다. 가평·양평·연천군, 여주·포천시는 급격한 인구 감소로 30년 안에 소멸할 가능성이 높다(참고·경기도 소멸 위험지수). 이들 지역에 재정지원이 줄어드는 건 명을 재촉하는 재앙일 것이다.전국에 재결합 바람이 거세다. 대구와 경북, 전남과 광주, 대전과 세종, 충남이 뜨겁다. 김경수 경남지사는 부산·울산·경남을 묶는 큰 그림을 그리자고 한다. 메가시티를 건설해 수도권을 넘어서자는 당찬 목소리다. 방방곡곡이 이처럼 통합을 외친다. 다시 뭉쳐 덩치를 키우고 힘을 기르자고 의기투합 중이다. 그런데 거꾸로 가자고 한다. 천 년 역사를 쪼개자는 건 실사구시(實事求是)보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 앞서는 주장이다. 해묵은 소리에 인천까지 기웃거린다.한강 이북은 수도권에 접경지, 상수원보호구역이 막아선다. 산악지역이 많고 중첩된 규제로 개발 여건이 열악하다. 독립된 광역지자체가 아니라서 발전이 더디고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니다. 수원 사무실에서 연천군의 건축물대장을 열람하고, 온라인 민원상담을 한다. 세상이 달라졌다./홍정표 논설위원홍정표 논설위원

2020-11-03 홍정표

[경인칼럼]영웅서사와 사회심리

노력없이 일확천금 바라는 심리 경계하듯영웅신화 같은 대이변 기대하는것 비정상암울한 현실 영웅환상 기대 '비극의 맹아'퇴행적 심리이용 또한 '몰역사적 기만행위'위대한 신과 영웅의 이야기인 신화도 생로병사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신화의 대표적인 양식은 영웅의 일대기를 담은 영웅서사(Heroic narratives)이다. 영웅은 비범하게 태어나 성장하며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여 마침내 부족이나 집단의 염원을 성취하는 인물이다. 이 영웅서사는 특수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생성되기 때문에 지역을 넘어 확산되기도 하고, 뼈대만 남아 앙상해지는가 하면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한다.신화는 상상력의 소산이지만 실은 스토리텔링의 산물이다. 고려의 건국영웅신화는 왕건의 선조 6대들의 내력과 자취를 다루고 있는데 대부분 기존의 전래 설화들을 개작한 것이다. 2대조인 작제건 신화의 핵심모티브는 괴물퇴치담, 용녀혼인담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이야기는 인천 백령도 배경의 거타지 설화를 주인공만 작제건으로 바꾼 이야기이다. 조선의 건국신화에 해당하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역시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찬양하기 위해 세종의 여섯 할아버지들의 행적을 중국의 고공단보를 비롯한 건국 영웅들의 고사와 비교하여 찬양하는 서사시이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최초의 책이라는 언어학적 의의가 크고 경천근민(敬天勤民)의 주제의식, 비유와 상징과 같은 문학적 구성요소는 주목할만하나 신성성이나 경이감을 주는 이야기로 회자되지는 않는다.신화는 공동체의 기원과 운명, 혹은 신비로운 자연현상이나 환경을 초월적 존재에 의거하여 설명하려는 고대인의 상상력이 낳은 담론체계이지만, 과학기술이 진보한 근대에서도 '신화적' 이야기는 만들어지며 또 '신봉'되기도 한다. 임경업 장군(1594~1646)은 병자호란 때의 실존 인물이지만 청나라를 치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식량이 떨어지자 가시나무 어살(漁箭)로 조기를 잡는 기적으로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의 어민들에게는 조기잡이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어살은 임경업 장군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실은 가장 오래된 전통 어로방법이다. 그리고 임경업은 친명반청(親明反淸)의 보수적 명분론에서 보면 불세출의 영웅이었으나 당시의 국제정세나 역사의 흐름에는 어두운 군인에 불과했다. 멸망 직전의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겠다는 임경업의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 구상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무모한 명분론으로 평가된다.민간신앙의 경우 주인공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일반인들의 연민도 작용한다. 바리데기 공주나 최영 장군과 같은 무속의 신격들이 그렇다. 또 일반인들의 영웅 대망론에 기댄 사이비 신화도 만들어진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신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폭압과 노동자와 국민의 희생으로 이룬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영웅신화처럼 유통되고 있다.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한 박근혜 정권이 탄생하는 배경도 실은 박정희 신화 위에 지어진 신기루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신화는 없다'라는 자서전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는 박정희 신화와 재벌 기업 현대 신화를 환기함으로써 영웅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들의 '신화적' 이야기는 참혹한 실패담으로 전락하고 그 '영웅'들은 지금 감옥에 있다.신화를 뜻하는 '미스(myth)'란 말은 그리스어 '뮈토스(mythos)'에서 유래했다. '뮈토스'는 논리적 언어인 로고스(logos)와 대립되는 말로서 신성하고 감성적인 담화라는 의미이다. 논리와 이성 앞에서 신화는 퇴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현대의 영웅서사들은 대부분 임경업 장군의 신격화에서처럼 실제 이야기에서 역사적 사실을 제거해버린 것(privation d'Histoire)이다. 노력이나 투자는 하지 않고 대박이나 일확천금을 바라는 심리를 경계해야 하듯이 영웅신화와 같은 신이한 대이변을 기대한다는 것 또한 비정상적인 사회심리이다. 암울한 현실 때문에 영웅을 환상하고 그 출현을 기대하는 대중심리는 비극의 맹아이며, 그런 퇴행적 심리를 이용한 행위 또한 몰역사적인 기만행위이다./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2020-10-27 김창수

[경인칼럼]라면의 기억

학창·군대·기자 시절 맛있게 먹었던 추억배고픔·결핍 채워주는 가장 원초적인 마법인천 어린형제에겐 치유하기 어려운 '악몽'어른들의 잘못 '일생의 트라우마' 어쩔건가해운대에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다녔다. 자주 물난리가 났다. 도시의 배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였다. 만조와 집중호우가 겹치면 시장통과 주변 일대가 물에 잠겼다. 학교에선 수재의연금을 모았다. 우리 반도 성금으로 라면 세 박스를 샀다. 가장 피해가 컸던 아이가 그날 이후 등교하지 않았다. 남은 라면 한 박스를 우리 집 다락에 보관했다. 전기공사업 면허를 따내겠다며 어른들이 밤낮없이 출타 중인 까닭에 혼자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 아무도 급장의 비밀을 몰랐다. 아주 오랫동안, 다락의 그 수재의연금 라면까지 포함해 정말 지겹도록 라면만 먹었다. 맛있는 음식도 질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전학했다. 결혼한 큰누나 집에 얹혀산 지 삼년만이었다. 보광동 비탈진 동네에 어른들이 살고 계셨다. 서울 학생들은 까만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다녔다. 궁리하다 신고 있던 청색 운동화에 검정색 페인트를 칠했다. 덧칠하고 연탄아궁이에서 말리길 서너 달 했더니 끝내 '킹콩' 가죽신이 됐다. 깔깔 놀려대던 친구들과 함께 야채튀김을 얹은 라면을 사 먹었다. 지금의 서울지하철 4호선과 경의중앙선 이촌역 부근이었다. 배를 채운 우리는 삼각지를 지나고 남영동을 거쳐서 남산 소월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라면으로 바꿔먹은 버스회수권의 대가가 너무 컸다. 라면은 우정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했다. 왕십리의 후배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해를 넘겼다. 2·12 총선을 앞두고 DJ가 귀국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국내에선 YS가 신군부정권에 홀로 맞서고 있었다. 휴학 중인 대학생들이 1월에 대거 입영통보를 받았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은 기표한 용지를 일일이 중대장에게 보이고 투표함에 밀어 넣어야 했다. 그곳에서 증기로 익힌 라면을 처음 맛봤다. 밥 찌는 기계에 라면사리를 차곡차곡 세운 식판들을 켜켜이 쌓아 넣고 뜨거운 김으로 쪄냈다. 따로 끓인 스프국물을 찐 사리 위에 끼얹어주었다. 제대 후 몇 번 그 맛을 재현해보려 했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올챙이 기자 시절, 인하대 후문엔 오직 라면 하나로 승부하는 집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천 토박이인 동기가 알려준 라면집은 가히 비교불가였다. 상호가 있긴 있었나. 가파른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탁자 3개가 전부인 식당. 부부가 화염이 사나운 프로판가스 버너에서 연신 라면국물이 끓어 넘치는 양은냄비를 들어냈다. 풀어헤친 계란이라고 해봐야 한 숟갈도 안 되고, 썰어 넣은 파조차도 있는 둥 없는 둥 한데 어떻게 그런 천상의 맛을 낼 수 있었을까. 오래전 안경 맞추러 들렀다가 라면집이 있던 골목을 찾아봤으나 반듯한 새 건물뿐이었다.라면은 가장 원초적이고 공격적인 욕구인 배고픔을 달래고, 결핍을 채워주는 구원의 기억이다. 아무리 어려웠던 날들이었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 빙그레 미소 짓게 만드는 마법의 기억이다. 어디에서 태어났든, 어느 신병훈련소를 거쳤든, 어느 곳에서 직장생활을 했든, 똑같이 적용되는 공평의 기억이다. 라면은 그래서 한국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억이 된다. 그런데 얼마 전 참혹한 일을 겪은 인천의 열 살과 여덟 살 형제에게는 예외의 기억이 될 것 같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치유하기 어려운 트라우마가 될 것 같다.형제는 돌봄이 필요한 위기의 아이들이었다. 한겨울 설거지하는 손이 너무 시려 고무장갑을 사러오고, 깊은 밤이 무서워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형제를 보다 못한 이웃주민들이 여러 차례 신고를 했다. 지자체, 아동보호전문기관, 학교, 법원 모두가 아이들이 처해있는 위기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들 자기 앞에 그어져 있는 경계선 안에서만 움직였을 뿐이다. 그 편의적이고 형식적인 선을 뛰어넘어 형제를 보듬으려는 시도는 아예 없었다. 뒷북치는 정치권이나 총리나 대통령이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어른들의 잘못이 형제에게 추억으로 남아야 할 '라면의 기억'을 악몽으로 만들어버렸다. 일생의 트라우마는 또 어쩔 건가./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

2020-10-20 이충환

[경인칼럼]복비 손질 불가피한데…

복덕방은 주역의 '생기복덕'에서 유래했다풍수지리따라 주거 정해야 복·덕 믿음때문요즘 11억원 아파트 중개수수료만 1천만원집값연동 탓 폭등세… 요금체계 개편 절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다 보니 익숙하던 풍물과 풍습들이 사라져도 놓치기 십상이다. 동네 어귀 혹은 후미진 골목길을 지키던 복덕방이 그중 하나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봉놋방이었으나 외지에서 온 나그네들의 길잡이이자 어두운 밤길을 지키는 든든한 파수꾼이었다. 반투명의 얇은 양면괘지 사이에 먹지를 대고 작성한 부동산 거래계약서는 새털처럼 가벼웠지만 은은한 묵향(墨香)이 한층 가치를 더했다.우리 조상들은 집터와 묏자리를 정하는데 유난히 신경을 많이 썼다. 이사 날짜는 무조건 '손 없는 날'로 정하는데 이날은 사방에 잡귀들이 없어 아무 곳으로 가도 탈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옥을 소개해 주고 구전을 받는 복덕방(福德房)은 주역(周易)의 생기복덕(生氣福德)에서 유래했다. 풍수지리에 따라 주거를 정해야 복(福)과 덕(德)을 얻는다는 믿음의 소치이다.언제 복덕방이 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송종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은 조선일보의 종합잡지 '조광(朝光)' 1937년판을 근거로 구한말에 몰락한 3명의 노인들이 생계유지 목적으로 가옥중개업을 시작한 것이 효시라고 주장했다. 조선후기 서울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택거래가 빈번해지고 이를 계기로 가옥매매를 알선하는 복덕방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던 것이다.최근 부동산 중개수수료가 너무 비싸다는 불만들이 잇따르고 있다. 손님들은 "등기확인에다 집 보여주고, 계약서 날인에 입회하는 것이 고작인데 수수료가 보통 몇 백만원"이라며 소태 씹은 표정이다. 서울에서 11억원짜리 아파트를 매매하면 중개수수료만 1천만원인 것이다. 이 아파트를 2017년에 구입했더라면 중개료는 200만원이었다. 당시 시세는 5억5천만원으로 수수료율이 0.4%였으나 지금은 시세가 급등해 0.9%(9억원 이상)로 높아진 때문이다. 복비가 3년 만에 무려 5배나 폭등한 사례이다. 수수료가 집값에 연동되는 구조인 탓이다.10억원이 넘는다고 큰 평수의 고급 아파트라 판단하면 오산이다. 지난 8월 서울의 아파트 평균 가격은 9억8천500만원으로 10평대 소형아파트의 호가가 5억~6억원인 지역이 대부분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문재인 정부 3년(2017년 5월~2020년 5월) 동안에 서울 전체 집값은 34% 올랐으며 특히 아파트값은 53%나 상승했다고 밝혔다.공인중개사들도 할 말이 많다. 거래 절벽에 규제까지 겹쳐 생존권이 위협받는 처지에 정부가 공인중개사 없이도 부동산을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전세의 월세 전환속도가 빨라지고 전·월세 전환율 하락으로 중개료가 최소 50% 이상 떨어져 채산성도 악화되었다며 선진국 수준으로 요율을 대폭 올리거나 미국, 유럽처럼 중개료 자율화까지 요구하고 나섰다.서울을 기준으로 한 최고 중개요율은 매매 0.9%, 임대차 0.8%로 경쟁국들에 한참 못 미친다. 집값 기준 미국 3.5~6%, 캐나다 3~7%, 영국 2~3.5% 등인데 중개료는 매도인 혼자 부담한다. 프랑스(3~10%)와 독일(3~6%)은 매도인과 매수인 합의로 결정하나 나라마다 중개서비스의 종류나 품질이 달라 단순비교는 곤란하다. 미국은 수수료는 비싸지만 법인 형태의 중개회사가 부동산컨설팅, 세무회계, 법률, 건축 등 원스톱 제공에다 중개물건 하자에 대한 책임에도 철저하다. 회사 직원인 각 분야 전문가들이 분담해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케이스별 소요비용은 한국보다 저렴하다.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중개사고 배상액은 중개업소당 1억원(법인 2억원)이어서 실제상황에서는 조족지혈(?)인데다 중개업체들은 중개물건 하자에 대한 책임도 거의 지지 않는다. 정부의 부동산 거래시스템 개편 방침에 10만6천여개 중개업의 공인중개사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생존권투쟁에 팔을 걷어붙였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가성비 나쁜 요금체계는 중개업소는 물론 내수경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주택 매매와 임대 사이의 수수료 역전(逆轉) 문제까지 불거지는데 공인중개사제 도입 36년 동안에 수수료체계 개편은 2000년과 2015년 두 차례에 불과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20-10-13 이한구

[경인칼럼]한국정치와 나훈아

추미애 장관 아들사건 편들기·공세적 태도文정부 '기회 평등·공정·정의' 공허한 구호분명한 소명의식·신념… 정치에 대한 갈구'나훈아 평범한 말'에 시민들 주목하는 이유가수 나훈아씨가 추석 특집 공연에서 남긴 메시지는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 그저 한껏 멋을 부리려고 한 말이라고 하기에는 짙은 여운을 남겼다. 그가 공연 출연료를 받지 않았다는 점과 KBS에 출연하면서도 그 방송에 하는 쓴소리라고 해석될 수 있는 말, "삶의 모가지를 잡고 끌고 가지 않으면 끌려간다" 등의 메시지는 가슴을 울리는 말들이다. 그의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는 말에도 한국정치의 구태와 퇴행을 성찰하게 하는 감동과 영감이 묻어 나왔다. 일부 정치인들은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僞政者)가 생길 수 없다"는 말에도 아전인수격 해석과 함께 그에 대한 예찬으로 숟가락을 얹기도 했다. 그의 말에 대한 과도한 유추나 해석이 오히려 그의 진의를 왜곡할 수 있겠지만 추미애 장관 아들 휴가 특혜의혹사건과 북한에 의한 공무원 피살 사건 등에서 여권 정치인들이 보여 준 발언과 강퍅한 행태는 나훈아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검찰이 추 장관과 아들 서모씨, 최모 전 보좌관에게 '혐의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했지만 사건을 둘러싼 파장은 가라앉지 않는다. 추미애 장관 아들 관련 사건은 지난해 조국 사태와 맞물리면서 사회정치적으로 정의와 공정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추 장관 측이 받아든 법률적 면죄부와는 별개로 여야의 논란은 국정감사에서 쟁점이 될 게 뻔하다. 추 장관은 인사청문회와 국회에서 아들 휴가와 관련하여 '어떠한 지시나 관여를 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번에 걸쳐 했고, 검찰 수사 결과 보좌관에게 지역대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아들에게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본인도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전화번호를 알려준 게 지시가 아니라는 추 장관의 말은 상식 영역에서 판단하면 될 문제다. 이번 사건에서 추 장관이 애초에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임했다면 사안이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지배적이었다.추 장관은 자신의 거짓에 대해서 사과와 해명을 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측에 공세적이다. 야당이 국정감사에서 다시 이 문제를 쟁점화하고 특검 도입을 주장한들 경로 의존성에 비추어 볼 때 결국 이 사안은 정치적 공방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여야는 이 사건을 정치공학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은 이 사건의 승패를 정권의 레임덕 여부까지 연결시키고, 야권은 반대 논리로 여권을 밀어붙이려 한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정의, 공정은 한낱 이들의 입장을 수호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그러나 이 사건을 대하는 추 장관의 태도(attitude)마저 묻히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사건이나 현상을 보는 태도나 자세에서 출발한다. 태도는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주고 민의에 접근할 수 있는 중대한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안에서 민주당 일부 의원들의 과도한 편들기나 무리한 비유 등과 추 장관의 공세적 태도는 시민 일반의 인식과는 괴리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웠던 정의와 공정,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는 공허한 구호가 되었다.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 어디엔가 위치하는 것이 정치지만 결국 정치를 움직이는 현실동력은 마키아벨리의 권력정치이다. 그러나 1인1표의 민주주의 원리는 최종적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서 움직이게 하는 행위에 기반한다. 가슴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정치는 직업정치인의 탐욕만을 충족시키는 매표행위와 중우정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정치인은 왜 정치를 하는지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한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라스웰의 저서 '정치학: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획득하는가'에 언급된 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은 있어야 한다. 소명의식과 신념이 부재한 정치가 어떠한 결과로 귀결되는지는 한국정치가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의와 당당함에서 멋도 나오고 낭만도 나온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갈구가 가수 나훈아씨의 평범한 말에 시민들이 주목하는 이유이다. 당리당략을 위해서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몰염치는 나훈아씨의 메시지에 대한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또 다시 도졌다. 언제 한국정치는 품격을 찾을 수 있을까./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정치학)·객원논설위원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정치학)·객원논설위원

2020-10-06 최창렬

[경인칼럼]'관(官)업(業)이 한통속'

수도권 재개발·재건축은 메이저사 각축장그러나 요즘은 '중견건설사 편법'에 딴세상비결은 수십개 자회사 동원 '벌떼 입찰' 탓정부 알면서 허점대책… '3기'에 재연 조짐수원·성남 등 수도권 재개발·재건축 현장은 삼성·현대 등 메이저 건설사들의 각축장이다. 대기업 브랜드는 정비조합과 조합원들이 선호한다. 반면 화성 동탄2지구와 고양 향동지구 등 택지개발지구는 딴 세상이다. 대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중흥·호반·반도 등 중견 건설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동탄2신도시에는 B건설사의 아파트 단지가 유난히 많다. B단지가 10개나 된다. 고양시 향동지구는 5개 민영아파트 단지 가운데 3곳(60%)이 H사의 아파트다. 주택 건설사가 수천 개나 되는데, 이상하지 않은가.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택지개발지구의 공동주택용지를 공급하는 방식은 대략 3가지다. 첫째는 최고가 입찰이다. 해당 필지에 가장 높은 가격을 써낸 업체를 선정하는 것이다. 토지가격이 높으니 분양가가 높게 책정되는 것은 필연이다. 정부는 서민들에게 주택을 싸게 공급하겠다는 취지에서 벗어난다며 부정적 시각이다. 다음은 설계 공모다. 땅 크기와 주변 환경, 지역 특성을 반영한 설계 작품을 심사해 선정한다. 시비가 잦고, 특혜 의혹이 제기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마지막은 추첨이다. 일정 자격을 갖춘 업체들이 제한 없이 응모하게 한 뒤 제비뽑기로 임자를 정한다. 어떤 결과라도 시비를 피할 수 있다. LH가 선택한 방법이다.최고가 입찰제는 아파트 분양가 상승을 주도한다. 특정 기업이 많은 사업지를 가져가면 국민 선택권이 제한된다. LH는 공정성과 다양성을 고려하면 추첨제가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특정 업체들의 독식은 더 심화한다. 쏠림을 방지하자는데 몇몇 업체만 잔칫상을 받는다. 비결은 수십 개 자회사를 동원하는 '벌떼 입찰'에 있다.예를 들어 경쟁률 100대 1인 동탄의 공동주택부지가 있다. 특정 건설사가 자회사 40개를 입찰에 참가시켰다면 실제 경쟁률은 2.5대 1로 낮아진다. 타사보다 당첨 확률이 40배나 높아지는 셈이다. 그러니 수백 대 1의 경쟁률도 이들 회사에는 그저 한자릿수 이하의 낮은 수준에 그치고 만다.경실련은 지난해 흥미로운 자료를 공개했다. 2008~2019년 LH가 분양한 아파트 용지의 낙찰 현황이다. 이 기간 중흥건설(자회사 47개), 호반건설(44개), 우미건설(22개), 반도건설(18개), 제일풍경채(11개) 등 5개 건설사에 돌아간 필지가 142개다. 전체(473개)의 30.0%를 차지한다. 대한주택건설협회에 등록된 건설사 수는 7천827개다. 전체 건설사의 0.6%가 신도시·공공택지지구 아파트 용지 3분의 1을 독식한 거다.동탄에서 래미안을, 향동지구에서 힐스테이트 단지를 볼 수 없는 건 정상이 아니다. 주민들의 브랜드 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대기업은 '소비자 이미지'를 우려해 벌떼 입찰을 꺼린다. 중소 업체는 자회사를 거느릴 처지가 못 된다. 공공택지를 분양받으려는 건설법인은 자본금 3억~5억원과 토목·건축 기술자 3명 이상을 고용해야 한다. 제도적 허점과 업계의 심리를 파고든 상술이 비정상 궤도를 정상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비판여론이 거세자 정부가 대책을 내놓았다. 택지 전매 허용범위와 요건을 축소하고 특별설계 공모 방식을 확대한다는 게 요지다. 하지만 입찰 자격을 3년간 실적 300호에서 700호로 강화한다는 조항은 슬그머니 없앴다. 입찰 건설사에 대한 신용평가등급 요구도 하지 않는다. 자회사를 통한 편법 수주를 묵인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업계의 반응이 싸늘한 이유다.정부는 수도권 3기 신도시 건설에 조바심을 낸다. 세금 폭탄과 투기 때려잡기에서 공급확대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남양주·하남·과천·부천에 들어서는 신도시 보상금만 30조원에 달한다. 건설업계가 흥분할 초대형 토건 장이 서게 됐다.지금 상황이라면 '그들만의 리그'가 재현할 개연성이 높다. 국토부와 LH가 모를 리 없다. 지역 업체들은 벌써 '부아가 치밀게 생겼다'고 푸념한다. 사후약방문은 미련한 방책이다. 그런데도 모른 체 한다면 '관·업이 한통속'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홍정표 논설위원홍정표 논설위원

2020-09-22 홍정표

[경인칼럼]BTS가 전하는 위안과 교훈

다이너마이트 '빌보드 차트' 1위는 대이변美 대학들 '성공신화 분석' 연구·강의 봇물이들의 노래에는 주제·가사 보편적 호소력진정성으로 무장 '세대 고민' 희망 메시지방탄소년단(BTS)의 신곡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마침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이 뉴스는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뉴스만큼이나 극적이지만, 이번에도 코로나19 때문에, 또 어수선한 국내 정치 때문에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가수가 팝의 본고장인 미국의 빌보드 '핫100차트'에서 1위에 오른 것은 음악사는 물론 문화사적으로도 대이변이다. 그동안 보아와 싸이, 소녀시대와 엑소, 2NE1과 같은 케이팝 그룹이 세계 팝시장을 향한 루트를 꾸준히 개척해 왔다지만, 무명의 케이팝 그룹이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영미권을 평정하고 세계 팝의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다이너마이트' 뮤직비디오 공개 24시간만에 조회수 1억 뷰를 기록할 정도로 BTS 팬덤은 확고한 세계적 문화현상이다. BTS 성공신화를 분석하는 BTS 연구도 봇물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과 펜실베이니아대학 사회학과에서는 BTS를 연구프로젝트로 추진하고 있으며, UC버클리에는 방탄소년단 강의가 개설되었다. 한국에서도 문화콘텐츠 분석 차원의 연구가 주로 이어지고 있으나 '보유국'에서의 반응치고는 의외로 침착하다.BTS는 케이팝을 완성하며 케이팝을 넘어서는 임계점에 서 있다. 칼군무라 불리는 고난이도 안무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춤솜씨는 케이팝의 무기이자 BTS의 강점이다. BTS는 이 칼군무에 이야기를 결합시켰다. 노래의 메시지를 몸의 언어로 전달하되 서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퍼포먼스를 유기적으로 일체화한 것이다. 퍼포먼스 외에도 팬들과의 소통방식도 주목할만하다. 방탄소년단의 일곱 멤버들은 연예기획사가 길러낸 '팩토리 아이돌(factory idol)'이 아니다. 예술적 기량과 자율성을 지닌 멤버들이 자신의 다양성으로 그룹의 정체성(identity)에 참여하는 방식은 기존의 케이팝보다 진화한 것이다.BTS의 노래가 보편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주제와 가사의 사회성이다. 개인의 사랑이나 이별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룹의 이름대로 세대가 처한 고민과 고통과 정면으로 맞선다. '얌마 니꿈이 뭐니'로 시작되는 그들의 데뷔곡 'No More Dream'은 우리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정작 꿈 없이 살면서 틀에 박힌 꿈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기성세대, 그리고 꿈꾸는 법도 잊어버리고 솔직하지도 못한 '소년들', 그들의 위축된 자아를 고무한다. 제2집의 노래 '리플렉션(Reflection)'도 절망에 처한 동시대의 수많은 청춘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는 진정한 사랑도, 자유와 행복도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노래이다.BTS의 진짜 무기는 진정성(authenticity)이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멤버들이 대부분 직접 만든 것이다. 자신들의 생활에서 겪은 감정을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한 노래가 가진 진솔함이 주는 공감력은 크다. '잘 구워진 항아리' 보다 생생한 삶의 노래가 주는 감응력, 기획사가 길러낸 공연기계가 아닌 자율적 아티스트, 신비주의로 과장된 스타가 아니라 친근한 벗이다. 멤버들은 일상과 연습 영상 혹은 자신의 생각을 영상으로 만들어 팬들에게 수시로 제공한다. '아미(ARMY)'와 이들을 잇는 절대적 유대감은 진정성에 기초한 것이다. '노 모어 드림(No More Dream)'으로 입시지옥 경쟁에 내몰려 위축된 청소년을 위무하던 무명의 '일곱 소년'이 이제 새노래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코로나로 위축된 세계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희망을 잃지 말자'는 것이라면, 유례없는 불신과 갈등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가 그들의 성공신화에서 발견해야 할 가치는 '진정성'이다./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 논설위원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 논설위원

2020-09-15 김창수

[경인칼럼]이재명의 언어

여론조사서 1~2위 오르내리는 대선주자시원하고 통쾌한 발언 '사이다' 칭송에도품거나 아우르는 데에는 도무지 쓸모없어국민지지 얻기 위해 통합·치유의 말 써야이즈음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언어에 주목한다.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대권 주자 순위 1∼2위를 오르내리는 까닭에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는 청량한 느낌이 있다. 톡, 쏘는 맛이다. 지지자들이 "사이다"라고 칭송하는 이유가 된다. 대중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내서 시원하게 긁어준다. 그 어느 정치인보다도 대중과의 공감 능력이 뛰어난 언어선택이고 탁월한 말솜씨다.내가 기억하는 그의 첫 언어는 '모라토리움'이다. 파산을 의미하는 이 말을 기가 막히게 생생한 행정현장의 언어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다. "판교특별회계에서 LH와 국토해양부 등에 5천200억원을 내야 하지만 현재 성남시 재정으로는 이를 단기간에 갚을 능력이 안 돼 지급유예를 선언한다." 2010년 7월12일 성남시장에 취임한 지 불과 보름도 안 된 시점에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3년6개월 만에 모라토리움의 성공적 종식을 선언한 이후 "대한민국은 못해도 성남은 합니다!"가 그의 캐치프레이즈가 됐다.그의 두 번째 언어는 '구속'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혼란이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던 2016년 11월2일 자신의 SNS를 통해 "이젠 국정 난맥에 따른 자진사퇴 요구가 아니라 탄핵을 해야 할 때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구속하라"고 주장했다. 이어 21일에는 "박근혜 퇴로 보장 안된다. 퇴진 후 반드시 구속 처벌해야"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계속해서 박 대통령의 구속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를 계기로 '박근혜 구속'이 촛불광장의 구호가 됐다. 그 누구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던 '구속'이라는 위험한 단어가 그를 대권주자 반열에 뛰어오르게 한 구름판이 된 것이다.세 번째 언어는 '전쟁'이다. 내가 알기로 그는 이 위기의 단어를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쓰는 정치인이다. "오늘은 첫 번째 전투에서 졌지만 거대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건 그냥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좋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우리가 뭘 준비해야 하는지를 작은 전투를 통해 배웠습니다. 더 큰 제대로 된 전쟁을 준비합시다." 2017년 4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패배연설을 통해 지지자들에게 한 말이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전쟁이 끝났다. 병사들은 돌아가 농사 잘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8일 도지사직을 건 첫 재판을 앞두곤 SNS에 '토건비리와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글을 올리면서 "대한민국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부동산 불로소득"이라고 짚었다. 신천지 교인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던 지난 2월25일엔 도청직원들을 이끌고 과천시의 신천지 총회본부로 돌격했다. 그리곤 "지금은 전쟁상황"이라며 신천지 측에 신도 명단을 요구해 기어코 넘겨받았다.이재명의 언어는 현장의 언어이고, 광장의 언어이며, 전장의 언어이다. 선언의 언어고, 촉구의 언어이며, 결행의 언어이다. 그의 언어는 언제나 직선이다. 에두르지 않는다. 시원하고 통쾌하고 거침이 없다. 하지만 직선은 가르고, 나누고, 구획하는 데에는 그 쓰임새가 유효하지만 품고, 아우르고, 합병하는 일에는 도무지 쓸모가 없다. 그의 언어가 때때로 낯설고, 거칠고, 사납고, 심지어 무서운, 그래서 불편하고 불안하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이재명의 언어가 바뀌길 기대한다. 직선의 언어에 곡선의 언어가 보태지길 희망한다. 흥행하고 있는 '사이다 맛' 언어만으로는 죽어도 그 짜릿한 탄산의 쾌감을 포기할 수 없는 충성스런 고객들만 붙잡고 있게 될 뿐이다. 2002년 16대 대선을 포함한 네 차례 대선에서 진보성향의 대통령은 최고 49%의 득표율에 그쳤다. 과반을 이루지 못했다. 당내 경선까지는 몰라도 본선에서 국민 과반의 지지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언어가 바뀌어야 한다. 통합과 포용과 위무와 치유의 언어를 써야 한다. 지금처럼 갈라지고 나눠져 진영놀음에 골똘하고 있는 암담한 현실을 고민한다면 더욱 그렇다. 대권주자 이재명 스스로 언어의 전환을 고민하기 시작해야 할 때다./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

2020-09-08 이충환

[경인칼럼]빚투 열풍

정부 부동산 대책에 2040세대 '대출 러시'주가 폭락하자 개인투자자는 묻지마 매수주식 열기 신용융자 잔고 '역대 최고 16조'400년전 '네덜란드 튤립광풍' 떠올라 공포네덜란드의 상징인 튤립 원산지는 남동유럽과 중앙아시아로 16세기 후반 페르시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 전역에 퍼졌다. 이색적이고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귀족과 부자들을 매혹시켰던 것이다.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의 하를럼과 자위트홀란트주의 레이던 근처에서 대량으로 재배되었다. 오늘날 매년 봄이 되면 전 세계 관광객들이 '유럽의 정원'인 암스테르담의 큐켄호프에서 천국의 꽃밭 같은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정신줄을 놓곤 한다.튤립이 네덜란드의 국화(國花)로 자리매김한 배경에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한몫 거들었다. 수요가 증가하면서 꽃값이 상승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부나방처럼 화훼시장에 몰려들었다. 전 재산을 팔아 텃밭 한 조각을 사서 구근(球根)을 키우는 사람들이 생기는 등 꽃값이 계속 오르는 동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돈을 벌었다. 투기자본이 가세하면서 튤립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 1637년에 유명한 셈페르 아우구스투스종 구근 1개 값이 1만 길더를 기록했다. 당시 웬만한 주택 한 채 가격이었다.천정부지의 튤립 값에 실망한 사람들이 한 둘씩 시장에서 발을 빼기 시작하면서 1637년 2월 이후 구근 값이 점차 떨어졌다. 투매가 시작되었지만 구매자는 없었다. 막차를 탔던 사람들부터 파산하기 시작하면서 단기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홈리스로 전락했다. 투기는 인생역전을 노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꿈을 먹고 자랐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유럽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튤립광기(tulipmania)'라 부른다.'빚투족', '동학개미', '병정개미' 등 생경한 용어들이 자주 눈에 띈다. '빚투'는 '미투(me too)'에 빗댄 '나도 빚을 냈다'는 의미이다.정부의 잇따른 부동산대책이 화근이다. 고강도 주택담보 대출억제가 효력을 발하기 전에 서둘러 마이홈을 마련하려는 2040세대 중심의 대출러시가 빚투의 물꼬를 텄다. 신종코로나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설상가상이었다. 지난 3월 기관과 외국인 투매로 국내 주식가격이 폭락하자 개인투자자들이 매수해 '바이 코리아' 재연 우려를 불식하면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비유해 '동학개미'란 신조어가 등장했다.올 들어 개인은 국내 증시에서 47조2천182억원을 순매수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이 26조3천29억원, 기관이 20조9천425억원을 팔아치운 것을 감안하면 국내증시는 개인투자자들이 견인한 셈이다.소셜미디어에서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례들이 빈발하면서 요즘 청년들은 은행통장보다 주식계좌를 먼저 만든다. "돈을 벌 데는 주식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군대에서도 주식열풍이 불어 '병정개미'들도 양산되고 있다. 내무반 곳곳에서 병사들이 스마트폰의 주가흐름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작금의 기술진보가 고용흡수력을 떨어뜨리는데다 그나마 나쁜 일자리가 대부분이어서 밀레니얼들의 미래가 가늠되지 않는 것이다. 지난달 8·15 광화문시위를 계기로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면서 취업은커녕 알바 자리마저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빚으로 주식을 단기매매해서 용돈이라도 벌자는 심리도 작용했다.덕분에 돈을 빌려서 주식을 사는 신용거래 융자가 급격하게 늘었다. 신용융자 잔고가 금년 3월 6조4천억원에서 8월18일에는 역대최고인 16조원을 돌파했다. 최근 들어 빚투 증가속도는 5G급으로 빨라져 묻지마 주식 '빚투' 차입금이 1주일에 1조원씩 불어나고 있다. 증권사들은 코스피 예상 밴드 최상단을 2500선까지 올려 잡고 있어 향후 개미들의 주식투자 증가는 불문가지이다.국내증시는 실물경기가 바닥인 상황에서 유동성의 힘만으로 버티는 실정인데 급등락이 심한 주식을 빚으로 매매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올해 6월말 기준 가계신용잔액은 3월말보다 25조9천억원이 불어나 가계부채 총액이 1천637조3천억원으로 사상최대이며 1분기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은 98.5%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위험 수위(80%)를 큰 폭으로 초과했다.그러나 정부 또한 국가부채 확대에 열중하는 등 대한민국 전체가 빚잔치 중이라 별로 주목되지 않는 인상이다. 400년 전의 튤립광풍을 떠올리면 오금이 저린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20-09-01 이한구

[경인칼럼]미래통합당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강령과 정강·정책 5·18민주화운동 등 적시보수당으로 상상어려운 변화… 지지율 상승약자·소수배려 일관성·朴 탄핵 반대 사과진전된 역사인식 정립만이 진정성 얻을것 지난 총선의 대참패 이후 미래통합당은 강령과 정강·정책에 기본소득을 명시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적시하는 등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5·18 민주 묘역에서 무릎 꿇고 울먹이며 사과했다. 통합당 계열의 보수정당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들이다. 통합당의 지지율 상승은 이러한 현상들을 반영한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들이 통합당의 근본적 인식 전환으로 뿌리내릴 수 있느냐에 있다.한국정치에서 친일과 반공 등에 기반한 이념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 균열 중 핵심적 부분은 역시 이러한 역사인식의 차이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한국현대사에서의 진영간의 근본적 인식의 간극을 좁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의 영역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오에 가까운 대척이 종식되지 않으면 공동체의 발전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따라서 역사 갈등 해소를 주도하는 정당에게 궁극적으로 시민들은 지지를 보낼 것이다. 지난 광복절에 김원웅 광복회장의 말에는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의 표현 방식은 현상과 실체로 존재하는 대척세력을 존중함이 없이 적대를 발산했기 때문에 역사인식의 진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갈등만을 증폭시켰다. 이를 겨냥해서 진영내의 정체성을 통한 입지강화를 의식했다면 이는 더욱 비판받을 일이다.정치영역에서의 역사에 관한 칼날같은 대립은 시민사회의 분열로 이어진다. 그러나 상대의 주장을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정치언어들이 중도에 위치한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정치세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그들 스스로 포획된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이를 통합당이 주도한다면 중도층은 진화된 통합당에 주목할 것이다. 중도층은 더 이상 소극적 방관자가 아니라, 정치지형을 바꾸는 적극적 참여자로 변모하고 있다. 최근의 더불어민주당과 통합당의 지지율 변동은 이를 실감나게 한다.통합당이 친일과 반공에서 진전된 역사인식을 보이고, 제주 4·3항쟁과 여순 사건 등에서도 당시의 국가폭력에서 비롯된 양민학살 등을 직시하고 새로운 인식을 보일 때 통합당은 이념을 초월하는 진정한 합리적 세력으로 설 수 있다.통합당이 여권을 좌파와 독재세력, 사회주의 세력으로 치부할수록 정치적 입지는 쪼그라든다. 전통적 지지층을 의식해서 과감한 역사인식 변화를 추동하지 못한다면 이는 전략적 사고의 부재다. 전통적 지지층을 박근혜 정권을 떠받쳤던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본다면 이 존재의 정치적 효능감 부재는 탄핵과 지난 대선에서 입증됐다. 관건은 역사와 현실에 부합하는 정치적 언설을 누가 적시에 발신하느냐에 달려있다.자유한국당의 좌파 타령과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세력과 손잡은 결과는 총선에서의 참패다. 총선 이후 이러한 것들을 불식하고 변화의 단초를 보이면서 지지율은 반등했다. 물론 민주당의 오만으로 비칠 수 있는 국회 입법과정과 부동산 정책 실패에서 오는 반사이익의 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결국은 통합당에 대한 기대가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간과해선 안된다.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과 그렇지 않은 국민들이 존재한다. 통합당에는 유력한 대선후보가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 후보가 될 것이다. 한국대선의 특성상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단일후보가 출마한다면 인물보다는 정당이 압도적 영향을 발휘한다.통합당이 변해야 한국정치가 바뀐다. 무력한 야당은 권력의 오만을 부추기는 공범이다. 통합당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를 배려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발신하고 진전된 역사인식을 보일 때 최근의 움직임들이 진정성을 보일 수 있다. 5·18 특별법과 진상조사에 앞장서고 망언의 당사자들에 대해 추상같이 대해야 한다. 박근혜 탄핵에 대해 반성하고, 탄핵을 반대한 것에 대해서도 사과함으로써 진정으로 '탄핵의 강'을 건널 때 변혁은 진정성을 얻는다. 통합당은 이를 할 수 있을까. 긍정적 변화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통합당에는 수구의 망령들이 어른거린다./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정치학)·객원논설위원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정치학)·객원논설위원

2020-08-25 최창렬

[경인칼럼]수도 이전, 수도권 규제는?

천도론은 부동산정책 실패 출구 전략 깔려균형 발전 수도권 옥죄는 10중족쇄 수정법그래도 인구 전국 절반 넘어서 규제의 역설수도 옮겨도 집중 지속땐 새법 덧씌울건가수원(水原)은 정조의 도시다.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양주에서 이장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은 이 무렵 축조됐다. 팔달산 아래 터를 잡아 궁을 지었다. 백성들의 이주를 권했다. 2년 뒤 63가구가 719가구로 늘었다. 생업 기반을 갖춘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다. 한강 배다리를 건넌 정조는 수원행궁에 머물며 제례와 행사를 치렀다. 귀경길, 지지대(遲遲臺)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화성 천도(遷都)를 꾀한다는 괴이한 말이 돌았다. 노론 벽파는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고, 한양 궁궐은 그의 숨통을 조였다. 정조는 천도를 말하지 않았다. 역사의 짐작일 뿐이다. 행적으로 미뤄 의지는 강했던 듯하다. 재위 25년, 정조가 요절했다. 독살이라 했으나 사인은 풀리지 않았다. 천도는 잊혔다.여당 대표가 수도이전 카드를 꺼냈다. 대한민국 수부 도시를 세종으로 옮기자는 거다. 행정수도 건설과 공공기관 이전만으론 부족하다고 한다. 당 대표와 동료 의원이 그를 거든다. 서울은 '천박한 도시'가 됐다. 아파트값이나 들먹이는 속물들의 집합체다. 서둘러 명군(名君)의 땅으로 옮겨야 한다. 민주당은 수도 이전을 위한 특별 기구를 설치했다. 일사천리다.천도론은 정치적 득실이 바탕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를 반전할 출구 전략이다. 세금 폭탄이 불발했고, 공급 정책도 힘을 못 쓴다. 실기(失期)한 때문이다. '집값이 안정되고 있다'는 말은 기대치가 더 반영된 수사다. 23차례 땜빵 보수에 정책은 만신창이가 됐다. 국민은 정부 말을 믿지 않는다. 경질된 청와대 수석은 마지막 회의장에 없었다. 내부 균열에 담장 밖까지 시끄럽다. '권력은 짧고, 부동산은 길다'고 수군거린다.서울·경기·인천은 수도권 공동체다. 서울이 노른자라면, 경·인은 흰자위다. 보완과 완충의 관계다. 함께 국가 발전을 견인했고, 선진국 진입의 주역이 됐다. 맏형을 위해 동생은 힘을 보탰고,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들 때 밀어주고, 때론 가림막이 됐다. 1천만 시민의 식수는 광주 땅 팔당이고, 쓰레기는 인천이 받아낸다. 분당과 평촌, 일산 신도시는 80년대 후반 건설됐다. 폭증하는 강남의 주택 수요를 땜질하려는 고육책이다.역대 정부는 40년 넘게 중첩된 규제로 수도권을 옥죄었다. 1982년 말 제정된 수도권정비계획법이 핵심이다. '군사시설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 '팔당특별대책지역' '농지법' '산업집적 활성화 및 공장 설립에 관한 법률' '군사시설보호법' '조세특례제한법' '지방세법' 등 10여 개 규제법령이 적용된다. 그런데도 산업과 인력 집중은 더 심화했다. 수도권 인구가 전국 절반을 넘어섰다. 규제의 역설이다.정치권력은 16년 전 사법부의 수도이전 불가 결정을 부정하려 한다. 관습과 전통에 대한 거부다. 힘없는 자들의 대의와 명분은 무력 앞에 초라해진다. 서울이 수도여야 한다는 주장과 외침은 무기력하고 공허하다. 천도는 살아있는 권력의 의지에 달렸다. 정부 여당은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다.600년을 넘게 버틴 고도(古都)는 늙고 허약하다. 배산임수는 철 지난 풍수지리다. 물산의 이동수단이 다양한 지금, 콘크리트 제방 한강의 매력은 무엇인가. 성장 발전성에도 의문은 커진다. 매년 인구가 줄고 있다. 균형발전과 분산은 당위성이 충분하다. '균형발전과 수도권 집중 완화를 위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는 여당 대표 말은 틀린 게 없다.수도 이전의 동력은 힘의 크기다. 헌법 개정, 헌재 판결도 여권 의지대로 움직일 것이다. 이미 행정수도가 건설된 마당이다. 국회와 청와대를 옮기는 건 별 어려울 게 없다.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못할 게 없다. 정작 걱정은 다른 데 있다. 수도를 이전하고도 '수도권 규제'는 남겨둘 것이란 예감에서다.수도를 옮기고, 수도권 집중 현상이 해소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조이고, 여의치 않으면 새 규제를 덧씌울 건가. 그 결과 분산과 균형발전이 아니라 활기를 잃고, 국력이 쇠락한다면 어찌 되는가. 그건 공망(共亡)일 것이다./홍정표 논설위원홍정표 논설위원

2020-08-18 홍정표

[경인칼럼]위기의 시대에 읽는 영웅서사

얼마전 '이순신 관련 북콘서트' 는 성찰자리 이광수·이은상 책은 정견 투사·우상화 비평그의 참모습은 인품·지도력 갖춘 軍전략가공동체 운명과 동일… 비범하나 신은 아냐지난 7월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열린 북콘서트 '이순신을 찾아서'는 역사적 영웅의 서사화에 대한 소중한 성찰의 자리였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증유의 위기 속이라 영웅 서사에 대한 논의가 더 뜻깊었다. '이순신을 찾아서'는 문학평론가 최원식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이순신 서사학이다. 이 책은 단재 신채호 구보 박태원을 비롯한 춘원 이광수, 환산 이윤재, 노산 이은상, 김지하, 김탁환, 김훈 등의 국내 작가들이 남긴 다양한 이순신 서사 텍스트를 평가한 비평서이다. 최원식 교수는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은 조선의 백성과 관료는 물론 군주도 시기심과 야심 때문에 충무공을 오해하고 방해하는 우매함 혹은 악의 화신으로 과장하였으며, 이순신은 부패한 관료들 틈에서 홀로 고투하는 인물로 단순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광수의 '이순신'은 결국 조선 망국의 필연성과 춘원 자신이 '민족개조론'에서 친일로 나간 '외로운' 선택을 방증하는 아전인수형 전기소설로 떨어졌다. 저자는 또 노산 이은상의 경우 이순신을 거룩한 우상으로 조작하고 조작된 우상은 다시 박정희를 영웅화하는 서사물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영웅을 이상화하고 신격화하는 것은 사실을 단순화함으로써 오히려 역사적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안이한 글쓰기이다. 이순신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유성룡의 천거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불리한 전세에서 조선수군으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지상 육군의 배후를 위협함으로써 일본군의 수륙병진전략을 타격하여 전세를 반전시켰다. 조정의 반대와 온갖 난관에도 제해권장악 전략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 냉정한 군사전략가였다. 한편 이순신은 "군율을 분명히 하고 사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따랐다"(明紀律 愛士卒 人皆樂附)는 실록의 기록처럼 병사와 백성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한 인간적인 군사지도자였다. 궤멸된 수군의 전투력을 단시일에 복원하고 병사들이 목숨을 던져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은 그의 따뜻한 인품과 지도력 때문이었다.그런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이순신의 다른 위기관리능력을 제시했다. 이순신은 군수물자를 스스로 해결하여 전투력을 높이는 한편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통제사라는 지위만 부여하고 전쟁물자를 지원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소금을 구울 수 있도록 해변의 땅을 요구하여 조정의 허락을 얻었다. 큰솥을 걸어 구어낸 소금으로 수만섬의 군량미를 스스로 비축했다. 왜군의 노략질과 조선군의 군량미 징수에 지친 삼남지방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고 피폐한 경제에도 적잖이 기여한 것으로 평가했다.또 이순신은 전장에 있으면서도 복잡한 조정과 외교적 갈등을 고려하면서 현실을 타개하는 신중하고 세심한 정치가였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서도 공인(工人)을 모아 부채 등을 만들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의아해 했지만, 사사로이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방해를 두려워해서였다. 이익은 '두예와 이순신'이란 글에서 촉박한 전란의 와중에 부채를 만들어야 했던 안팎의 사정을 생각하면 천고에까지 지사들의 눈물을 떨어뜨리게 한다고 거듭 탄식했다.역사적 영웅들은 서사시의 주인공처럼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과 동일시되거나 강하게 연관된 존재이다. 그런데 역사적 영웅에다 작가의 정견을 투사해 넣은 이광수, 박정희 영웅화 도구로 이순신을 우상화한 이은상의 경우는 이순신과 서사의 픽션을 그저 빌려왔을 뿐이다. 이순신 서사는 아직도 미완인 셈이다. 위기의 시대는 영웅을 대망한다. 영웅은 비범하지만 그렇다고 초인이나 신이 아니다. 전쟁 영웅 이순신이 오히려 병사들과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따뜻한 소통형 지도자였으며 병사들의 지혜와 지지에 힘입어 위기를 반전시킨 영웅이라는 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이겠다./김창수 인하대 겸임교수·객원 논설위원김창수 인하대 겸임교수·객원 논설위원

2020-08-11 김창수

[경인칼럼]아무도 다시 질문하지 않았다

복서 알리 복귀전 첫패배 기자 고약한 질문독설인터뷰 유명 팔라치·토머스 언론 전설얼마전 與 대표 욕설에 언론사 해명성기사'기자가 질문을 안하면 대통령도 왕이 된다'1971년 3월8일 미국 뉴욕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세기의 복싱 대결이 펼쳐졌다. 챔피언 조 프레이저와 도전자 무하마드 알리의 헤비급 세계타이틀전. 4년 전 베트남전쟁 징집을 거부해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시민권까지 제한받았던 알리에게 이날 시합이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3년이 넘는 긴 재판에서 마침내 무죄선고를 받은 뒤 치르는 복귀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판정패. 생애 첫 패배이기도 했다. 영혼이 쏙 빠져나간 듯 탈진하고 상심한 상태로 라커룸으로 향하는 알리를 기자들이 뒤쫓았다. 그리곤 집요하게 묻는다. "이긴다 해놓고 실컷 두들겨 맞았군요.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고약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알리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오리아나 팔라치는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전 세계 주요 권력자들을 인터뷰한 이탈리아 언론인이다. 상대를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리는 질문과 독설로 유명했다. 1972년 키신저 당시 미 대통령 안보보좌관으로부터 "베트남 전쟁은 실패한 전쟁"이라는 놀라운 '자백'을 받아냈다. 1979년 이란혁명을 이끈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와의 인터뷰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진행됐다. 6시간에 걸쳐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벌였는데 팔라치는 '현존하는 이란의 신'에게 "당신은 독재자가 아닙니까?"라며 대놓고 물었다. 리비아 최고권력자 카다피와의 인터뷰에선 "대령님이 하는 걸 봐선 스스로를 신으로 착각하는 줄 알았네요"라고 비틀었다. "가난한 국민들의 참상을 볼 때 어떤 느낌입니까?"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에게 날린 직격탄이다.지난 2013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헬렌 토머스는 백악관 기자실의 '전설' 또는 '고정자산'으로 불렸다. 50년 긴 세월 동안 케네디부터 오바마까지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10명의 미국 대통령이 그녀의 까칠하고 배려라곤 없는 질문을 받아내야만 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베트남 전쟁을 끝낼 비책이 뭡니까?" (닉슨), "미국이 그라나다를 침공할 수 있는 권리가 도대체 뭡니까?" (레이건), "당신이 말을 에둘러 한다는 평판이 있는데 결정을 잘 못 내리기 때문입니까?" (클린턴), "그동안 정부가 밝힌 이라크전쟁의 원인은 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가 뭡니까?" (아들 부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언제 철군할 겁니까? 왜 계속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까?" (오바마).얼마 전 서울시장의 장례식장에서 어느 기자가 집권여당 대표에게 질문을 했다가 우리 정서상 가장 심한 욕설을 들었다. '기자는 쓰레기'라는 뜻의 단어가 이미 보통명사가 된 마당에 이보다 더한 치욕이 어디 있으랴마는 욕설을 내뱉은 당사자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공인 중의 한 명인 여당 대표인만큼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더 아연실색케 한 것은 기자가 소속돼 있는 언론사의 태도다. "의도를 갖고 고인을 모욕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질문은 아닌데 어제부터 여러 상황에 비춰 유족 측이나 당에서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언론에 누적된 감정이 그 질문을 계기로 촉발된 거 같은데 추모일색으로 흘러가는 건 문제가 아니냐고 기사를 썼으니 참고하시라"(미디어오늘, 7월10일)고 했단다. 언론이 언제부터 이렇게 너그러웠던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던가.이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는 언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또 정치적 지향이 어떠한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이 입증한다. 언론과 정치가 놓여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극단적 이분법도 유난스럽지 않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손가락질 해대도 언론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똑바로 쳐다보고 제대로 질문하기다. 질문하지 않는 언론이야말로 '기레기'고 사회악이다. 대통령에게 뼈아픈 질문을 주저치 않는 헬렌 토머스에게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은 없다.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도 왕이 된다." 그날 언론이 '후레자식'이 된 현장의 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정말 걱정스러웠던 것은 이후 아무도 다시 질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언론의 끝을 보는가 싶었다./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 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 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

2020-08-04 이충환

[경인칼럼]20년째 일자리타령만 되풀이하니

'청년실업 출구 안보인다' 2001년 신문 제목 강산이 2번, 정권이 5번이나 바뀌었는데도기업경기동향조사·고용 상황 여전히 최악산업 정책 재탕·3탕에 나쁜일자리 양산 탓'청년실업 출구가 안 보인다.'2001년 11월5일자 모 주요일간지의 청년실업 특집기사 제목이다. 20~29세 청년취업자수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의 477만명에서 2001년의 412만명으로, 불과 4년 만에 65만명이 감소한 것이다. 20, 30대도 감원시킨다며 충격이라는 반응이다.강산이 두 번 변한 지금은 어떨까?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달 28일 매출액 600대 기업 대상의 기업경기실사지수(Business Survey Index) 조사에서 올해 2분기(4~6월) 고용실적 BSI는 평균 80.6으로 전년도 2분기(97.6) 대비 무려 17.0p나 감소했다. 기업경기동향조사를 시작한 1980년 이래로 역대 최저이다. 실업자 수는 2000년 이후 3월 기준으로는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고용상황도 최악이다.코로나19 쇼크가 가세한 탓이나 결정적인 것은 중진국 함정이다.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 초기에는 순조롭게 성장하다 중진국 수준에 도달하면 성장률이 장기간 정체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세계은행이 2006년 '아시아경제발전보고서'에서 처음 제기했다. 정부주도의 압축성장에 따른 고비용, 저효율문제를 시장메커니즘을 통한 해소에 주저하다간 어김없이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중진국 함정'에 빠져 경제가 퇴보하는 국가들이 대부분이다.한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경제성장률이 눈에 띄게 둔화되었지만 민주화열풍에 도취된 절대다수 경제주체들이 시장경제 전환이란 수술을 거부하다가 1998년에 국제금융자본의 융단폭격을 맞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리주의에 근거한 '시장의 법칙'을 거부하고 성공한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 오늘날 EU(유럽연합)의 경쟁력 둔화는 시장경제와의 힘겨루기에서 판정패를 의미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도 미국에서 시장의 힘을 맹신하는 WASP(앵글로색슨계 백인 크리스천)의 승리인 것이다.한국의 경우 시장법칙을 거부하다 혹독한 대가를 치른 후부터 고용문제가 사회적 현안으로 급부상했다. 유권자들은 국내 민주주의 역사상 최초로 '경제대통령' 운운하는 대선 후보에 표를 몰아주었다. 공자의 적자(嫡子)인 중국인들도 부러워했던 소중화(小中華)의 나라에서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위기 극복 방안으로 벤처기업을 적극 육성하는 정책을 펼쳤다. 과감한 규제 개혁과 조세 지원이 이어졌다. 스톡옵션 제도가 처음 등장했고, 기술거래소가 열려 벤처기업의 숨통을 틔워줬다. 게임업체도 병역특례 대상 기업에 포함됐다. 벤처투자자금을 쉽게 회수하도록 코스닥 시장 활성화도 뒤따랐다. 벤처 생태계가 모습을 갖추며 네이버, 카카오, 엔씨소프트 등이 다크호스로 등장했다. 한국이 IT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였다.그러나 그뿐이었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은 산업경쟁력을 키우는 것인데 형평을 강조했던 노무현 정부는 글로벌리제이션과 몇 합을 겨루다 국가경쟁력만 떨어뜨렸으며 이명박정부는 '녹색성장' 어젠다로 혈세를 퍼부어댔지만 온실가스는 더 증가했다. 그 와중에서 정부는 효과가 더딘 산업정책 대신 임시직과 알바 등 나쁜 일자리만 양산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양질의 일자리를 늘린다며 공공부문 채용을 점차 확대했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 간판을 내걸었지만 무슨 사업을 추진했는지 별로 기억에 없다.문재인 정부의 산업정책은 이전 정부의 재탕, 3탕이다. 벤처정책은 2000년 당시와 가장 닮았으며 신재생에너지정책은 이명박 정부 녹색성장의 '시즌2'인 것이다.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6일 발표한 '그린 뉴딜'대책에서 2025년까지 총 73조원을 투입해서 재생에너지 발전용량을 지난해 12.7 기가와트(GW)에서 42.7GW로 늘리고 전기차 113만대, 수소차 20만대를 생산해서 일자리 66만개를 창출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친환경차 대비 고용흡수력이 월등한 내연기관 자동차산업의 연착륙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지속가능성은 더욱 의문이다.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부가 갈아놓은 밭을 갈아엎고 새 작물을 심는다고 법석이니 나라곳간만 거덜 낸채 앵무새처럼 일자리 타령만 되풀이하는 것이다./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2020-07-28 이한구

[경인칼럼]진영(陣營)에서 연대(連帶)로

지구촌 좌우 이념은 정체성으로 대체 뚜렷한국사회 혼돈 천박 자본주의 질서 재생산박원순 죽음놓고도 대립 중첩된 갈등 반영포스트 코로나시대 진영 초월한 연대 절실정체성 개념은 1950년대에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에 의해 대중화되었고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문화정치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체성은 내적 자아의 가치나 존엄을 외부로부터 구분짓기 위한 개념이다. 정체성 정치는 민주화나 사회적 변혁을 위한 투쟁 등의 정치투쟁들의 상당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20세기 서구 정치에서는 주로 경제 이슈를 중심으로 좌우의 스펙트럼이 형성됐다. 좌파는 더 확실한 평등을 요구하고, 우파는 더 많은 자유를 요구했다. 물론 재분배와 사회보장을 지향하는 좌파와 정부의 크기를 줄여 경제적 간섭을 최소화하고 민간 영역을 늘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우파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다.그러나 세계적으로 좌우의 이념적 차별성은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스펙트럼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좌파는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성소수자, 이민자, 여성, 히스패닉, 난민 등 다양한 소외집단을 보호하는 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우파는 인종, 민족, 종교 등에 연결된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쪽에 초점을 맞춘다.한국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도 복잡하게 분화하고 있다. 동성애, 젠더, 세대 등이 주요한 갈등으로 부각되면서 기존의 전통적 갈등축과 중첩되면서 사회는 지향과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 경제와 안보의 전통적 대립은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 등의 전통적 갈등과도 여전히 중첩되어 있다. 친일과 반공도 쟁점축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이슈는 무엇인가. 사회의 갈등축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 보수와 진보의 경쟁인가. 자유와 평등의 충돌인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질서는 계층에 관계없이 무한경쟁과 물질에 포획된 천박한 자본주의 질서를 재생산하고 있다.다원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시민지성을 통해 공론이 형성되어 사회의 가치관으로 정립된다면 소수는 소수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집단과 위상에 따른 정체성이 사회적 갈등의 증폭을 결과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지난 21대 총선이 끝나고 국회는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7·10대책이라 불리는 고강도의 부동산 대책이 발표됐으나 소기의 정책성과를 거둔다고 낙관할 수 없다. 법무부와 검찰의 대립이 일단락됐다고는 하지만 친여권 인사나 청와대 관련 수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출범과 관련하여 갈등 요인은 상존한다.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립도 진영논리와 한국사회의 중첩된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내년 4·7 보궐선거는 대선 전초전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고 대선의 보수·진보의 갈등이 1년 앞당겨진 정치현실에서 다시 정치공학이 난무할 것이다.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변화에 대한 대책은 내실이 외관을 따라가지 못한다. 진영간, 세대간, 경제 계급간 갈등이 내재화된 데다가 젠더와 정체성 정치가 또 다른 적대의 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이 내면화하고 일상화된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기 어렵고 지속가능한 발전도 불가능하다.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전방위적 대립, 각 층위 마다 얽혀있는 갈등구조를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가 정치의 핵심 의제가 되어야 한다.선거민주주의를 가장한 정당의 집단이기주의는 어느 진영이 승리하든 시민들의 삶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의제와 이슈들을 해결할 능력을 제시하지 못한다. 한국정치가 고민해야 할 지점은 '일하는 국회법'이라는 허구가 아니라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에 대한 인문학적이고 철학적 성찰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수준에 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다.대격변과 무질서는 아니지만 사회적 가치와 합의의 모색의 부재에서 한국사회는 지향을 상실하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이라는 말이 얼마나 시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사회는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을 보호해야 하지만 동시에 숙고와 합의를 통해 공동의 가치를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 진영과 정체성을 뛰어넘는 연대와 유대가 절실하다./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정치학)·객원논설위원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정치학)·객원논설위원

2020-07-14 최창렬

[경인칼럼]광명·시흥 '눈물의 10년'

MB정부때 지정한 매머드급 보금자리지구변죽만 울리다 지정 철회후 특별관리 번복주민만 골탕… 6·17 부동산 대책 낙제점속정부 추가대책엔 '새공공택지에 포함' 마땅'6·17 부동산 대책'은 낙제점을 받았다.서울과 수도권은 상승세가 여전하고, 전세는 매물을 감췄다. 국민들 마음은 탈탈 털렸다. '내 집 마련의 사다리를 걷어찼다'는 불만이 폭발했다. 30·40대도 등을 돌렸다. 여권의 든든한 지원군이 변심한 것이다. 민심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청와대는 사과했고, 여당 대표가 두 차례 고개를 숙였다. 전문가들은 현 정부가 21차례나 대책을 내놨는데 약발은 없었다고 비판한다. 국토부는 단편 빼면 종편은 4번뿐이라고 부득부득 우긴다. 효과 검증이 실없는 차수 논쟁으로 번졌다.역대 정부의 '부동산 때려잡기'는 두 갈래다. 중과세와 규제 강화가 한 묶음인 수요 억제책과 공급 확대 방안이다. 조세와 규제는 상황에 따라 조였다 풀었다 해도 뒤탈은 별 게 아니다. 반면 공급의 변환은 후유증이 심각하다. 보상이 따르는 공공 개발은 덤이 분명하나, 바뀐 정부가 변죽을 울리거나 늘어지면 재앙(災殃)이 된다. 광명·시흥이 그렇다.이명박 정부는 2010년 광명시와 시흥시 일원 17.4㎢를 묶어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정했다. 함께 지정된 4개 지구와는 비교 불가한 매머드 체급이다. 분당신도시(19.6㎢) 버금가는 면적에 사업비가 23조9천억원(2010년 기준)이다. 국토부 행동대장인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시행자로 낙점됐다. 주민들은 들떴고, 지역은 요동쳤다. 장밋빛 전망이 나돌았고, 조용하던 마을이 북적였다.요란 법석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텝이 꼬였고, 나가야 할 진도는 제자리였다. 거래는 묶였고, 토지와 건물 보상은 기약이 없다. 정권이 바뀌면서 '보금자리가 애물단지 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꿈은 악몽이 됐다. 불안과 불만이 폭발 지경이었다. 보상을 염두에 두고 돈을 끌어다 쓴 주민은 피눈물을 흘렸다. 정부는 4년이 지난 2014년 지구 지정을 철회했다. 재원이 부족하고 사업성이 나빠졌다고 발뺌했다. 수도권에 새 정부 신상인 기업형 임대주택(뉴스테이)이 유행할 즈음이었다. 전(前) 정부 상품을 용도폐기한 거다.지구 해제 뒤 광명·시흥지구는 2015년 특별관리지역으로 다시 묶였다. 10년이 지나면 효력을 잃게 되나, 그 사이 환지방식으로 도시개발사업이 가능하다. 이번에도 LH는 딴청이었다.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개발'을 제시했다. '주민 스스로'는 역부족이다. 또 5년이 지났다. 주민들은 공동대책위를 만들었다. 14개 마을별로 각개 전투를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출발이 앞선 동네는 진척이 빠르다. 정비사업 계획안을 내놨다.광명시와 경기도, 국토부는 엇박자 행보다. 시는 개별 사업이 난개발을 초래한다며 난색이다. 주민들이 어깨동무해야 빨리 갈 수 있다고 설득한다. 도는 어정쩡하다. 결정권한이 없다며 선을 긋는다. 관리계획 변경 권한을 쥔 국토부 눈치를 본다. 중앙정부는 팔짱을 풀지 않는다. 지자체가 알아서 추진하라는 거다. 주민 주도로 개발사업이 가능하도록 약속했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한다. 주민들만 죽을 맛이다.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은 국정의 최대 현안'이라고 했다. 관련 부처에는 보완책을 주문했다. 징벌적 조세와 공급 확대에 방점을 찍었다.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정부는 새 대책을 서두른다. 7월 중 국회 통과가 타임 라인이다. 다주택자·임대법인의 등록세와 보유세 양도세 중과 방안이 유력해 보인다. 재건축·재개발 활성화와 함께 수도권 4기 신도시가 거론된다.광명·시흥지구는 후보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사통팔달 교통 인프라에 서울 구로와 마주해 접근성이 뛰어나다. 길 하나 건너면 서울이고 강남이다. 강남 대체재에 목마른 무주택자들을 유인할 수 있다. 고양 하남은 경쟁이 되지 않는다. 지역을 쪼개도 분당 절반의 주거물량이 확보된다. 지친 주민과 지역이 막아설 이유가 없을 것이다.정부의 22차 부동산 대책안이 조만간 공개된다. 새 공공택지는 광명·시흥이어야 마땅하다. 이만한 입지와 조건이 없다. 주민들의 '10년 눈물'을 그치게 할 처방이다. 일석이조다./홍정표 논설위원홍정표 논설위원

2020-07-07 홍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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