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개화·식민지·분단 모두 맨앞에서 경험… 인천은 한국 근대를 응축"

입력 2023-12-06 20:56 수정 2024-02-11 21:49
지면 아이콘 지면 2023-12-07 11면
서울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연구실에서 만난 이경재 교수. 많이 읽고 많이 쓰기로 유명한 그의 연구실에는 책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아임 프롬 인천·(15)] 미쓰비시 줄사택 살던 개구쟁이 이경재입니다


부평 '삼릉' 줄사택서 초교 1년까지 거주
"성인된 후에야 역사 숨쉬는 공간 깨달아"

세일고 시절 '명지대 고교 문예대회' 1등
국문학 전공… 학자·평론가로 왕성 활동

인천을 다룬 소설 강경애 '인간문제' 꼽아
"삼대·탁류 등과 어깨 나란히 할수 있어"
"삶을 고민…" 넷플릭스 시대 소설 의미





'유튜브' '넷플릭스' '웹툰'처럼 영상·이미지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도 '문학'은 그보다 더 큰 힘을 갖는다고 믿는 문학평론가 이경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I'm from 인천' 15번째 주인공이다.

이경재 교수와 인터뷰하면서 그가 '인천 밖에서 인천을 들여다보는 인천사람'이란 'I'm from 인천' 기획 취지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란 생각을 굳혔다.

이 교수는 한국 문학의 '공간과 장소'를 탐구하는 데 천착해 왔다. 이 교수의 고향 인천 또한 주요 탐구 대상이었는데, 그가 평론가·연구자로서 인천이란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서른살이 다 돼서다.

이 교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인천이 한국 문학과 근현대사에서 이토록 중요한 공간인지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문학에서 찾은 인천이 "한국적 모던을 대표하는 도시"라며 "나의 비평과 문학에 있어 인천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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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줄사택.

이경재 교수는 1976년 4월 인천 북구(현 부평구) 부평2동 '삼릉'(三菱·미쓰비시)이라 불리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삼릉은 일본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한자어로, 미쓰비시의 로고인 '3개의 마름모(다이아몬드)'를 뜻한다. 1942년 일본군 군수공장 역할을 한 미쓰비시제강 인천제작소가 부평2동 일대에 자리하면서 지명으로 굳었다.

이 교수가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던 집은 미쓰비시제강의 전신 히로나카상공 부평공장이 1930년대 말 지어 나중에 미쓰비시가 인수한 노동자 집단주택인 이른바 '미쓰비시 줄사택'이다. 일본 기업에서 건설한 사택 중 보기 드문 한옥사택이다. 미쓰비시 줄사택 일부는 현재까지도 보존돼 부평구가 국가등록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삼릉이란 지명의 의미를 성인이 돼서 알았습니다. 그 전까진 제가 살았던 곳을 평면으로만 접했다면, 그 의미를 알게 된 후 입체로서 접하게 된 느낌입니다. 내가 나고 자란 그런 곳이 한국 현대사의 본질적 일이라 할 수 있는 역사가 숨쉬는 공간이라는 걸 깨닫고는 고향이 더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이경재 세일고
세일고 시절 이경재(오른쪽) 교수. /이경재 교수 제공

이경재 교수는 부평남초, 부평서중을 거쳐 산곡동 세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문학소년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두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이문열의 장편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를 읽고 있었어요. 그때까지도 나는 기껏해야 김동리의 '역마'(1948)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1936)을 읽었는데, 친구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최신 소설을 읽어 충격을 받았죠. 친구한테 그 소설을 빌렸는데, 정말 밤을 새워 읽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문열, 이청준, 이문구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읽었습니다."

이경재 교수 교지
이경재 교수가 명지대 주최 문예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단편소설 '불꽃 속의 양떼'가 실린 세일고 교지 '철마혈'. /이경재 교수 제공

본격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기 시작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명지대학교가 주최한 고등학생 문예대회에 낸 단편소설로 1등을 차지했다. '불꽃 속의 양떼'란 제목의 소설인데, 세일고 교지 '철마혈'에도 실렸다. 이 교수가 다니던 시절 세일고는 학생들의 학내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학교였다.

고등학교 3학년 수학능력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1993년 11월11일 세일고는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자 사흘간 '휴업(휴교)령'을 내렸다. 학생들은 전날 오전 학교 운동장에 모여 학교 측이 학생회장을 임의로 추천해 임명한 것이 무효라면서 학생회칙에 보장된 직선제를 보장하라며 5시간 농성을 벌였는데, 이에 따른 학교 측의 조치였다.

"199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데모해서 휴교령을 내렸다는 얘길 믿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수능시험을 앞두고. 당시 학생들 대다수가 복도로 나와 학교에 항의하고 농성에 참여했습니다. '민주 세일'이라고, 세일고는 과거부터 폭력 교사 물러나라고 집회를 하는 등 학생운동 전통이 있었어요. 깨어 있는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

이 교수는 1994년 3월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전 면접시험에서 이 교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국문학과를 지망했다"고 말했는데, 면접관으로 참여한 교수가 "소설가가 되려면 막노동판에 가거나 전쟁터에 가서 체험해야지 국문과를 왜 오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조남현 이경재
이경재 교수를 문학의 세계로 인도한 조남현(왼쪽)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이경재 교수 제공

한국현대소설 연구를 본격적인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조남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인천 출신이기도 하다.

이경재 교수는 조남현 교수의 지도로 서울대 대학원에서 현대문학 전공으로 석·박사 과정을 거쳤다. 국문학자 겸 비평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조남현 교수 추천으로 인천문인협회가 발간하는 계간지 '학산문학' 편집위원을 맡으면서 고향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조남현 교수님이 전화해 중·고등학교 동기인 김윤식 시인이 인천문인협회 회장이라면서 '학산문학'을 소개했습니다. 김윤식 시인을 2006년 여름 인천역 인근에서 처음 만났는데, 너무 자애롭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치는 분이었어요. 그길로 2012년까지 '학산문학' 편집위원을 맡으며 인천과 문학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제 비평과 문학의 중요한 주제는 작품에 나타난 공간에 대한 탐구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계기는 '학산문학'에서의 경험입니다."

2009년 10월29~30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AALA) 문학포럼과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AALA 문학심포지엄'을 이경재 교수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꼽는다.

"팔레스타인 대표 문인이자 여성 작가인 사하르 칼리파부터 생전의 박완서 선생님까지 전 세계 문인들이 인천에 모여서 백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 중심이 아닌 진정한 세계문학의 방향성을 토론한 자리였습니다. 그 대단한 문인들이 신포동 밤거리에서 같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낭만을 누렸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국제도시 인천에서 열린 'AALA 문학심포지엄'은 이듬해 4월 인천문화재단이 '제1회 AALA 문학포럼'으로 정식 개최했다. 해마다 열린 AALA 문학포럼은 25개국 120여명의 문학인들이 다녀갔으나, 2013년 행사를 끝으로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이경재 교수 어린시절
부평 삼릉 미쓰비시 줄사택에 살던 시절의 이경재 교수. /이경재 교수 제공

이 교수는 현재 학계와 문단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국문학자이자 평론가로 꼽힌다.

"인천처럼 한국적 근대의 특징을 응축한 도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근대를 대표하는 몇 가지 큰 사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교적 중화질서 속에 살다가 서구 근대 문명을 향해 우리를 활짝 열어젖히는 개화의 과정, 두 번째는 식민지 경험, 이어진 분단과 전쟁,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입니다. 그 모든 일을 정면으로 다 경험한 도시는 대한민국에 인천밖에 없거나 인천만한 곳은 없습니다. 근현대 한국문학을 이해함에 있어 인천을 괄호로 치고 하는 논의는 성립하기 힘듭니다."

이 교수는 인천을 다룬 단 한 편의 소설을 꼽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강경애의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를 꼽았다.

"1930년대는 한국 근대 문학이 완성된 시기로 보는데, 이때 최고 걸작으로 염상섭의 '삼대'(1931), 채만식의 '탁류'(1937), 한설야의 '황혼'(1936)을 꼽습니다. 저는 '인간문제'가 앞서 나열한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면에서는 더 뛰어난 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앞선 작품들과 달리 '인간문제'는 농촌과 도시를 한데 다 그리고 있고, 여성주의적 문제의식도 있습니다. 특히 1930년대 인천의 모습을 '인간문제'처럼 정밀하게 그린 소설이 없습니다."

이경재 교수

소설을 읽는 것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나 영화를 더 많이 보는 시대다. 이 교수는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는 요즘 제자들이 이 교수에게 자주하는 질문이라고 한다.

큐알코드
기사 전문 온라인
"소설은 무언가를 알려줍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인식적 기능이죠.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2020)를 통해 일제강점기 인천에서 이뤄졌던 노동자들의 지하투쟁과 철도사를 알게 됩니다.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를 읽으면 전후 인천항과 인천차이나타운 풍경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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