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는 가을의 전령사이다. 드문드문 길가에 서둘러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보면 정말 가을이 멀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흥렬의 '코스모스를 노래함',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을 들으면서 가을의 정취와 분위기속에 흠뻑 젖어 들 수 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걸으며, 가을의 새아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내게 어떤 꽃을 제일 좋아하느냐 물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코스모스라고 답한다. 장미나 백합처럼 빼어난 자태와 방향을 짙게 풍기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해맑은 가을을 수놓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 불 때마다 가엽게 흔들리는 모습은 부끄러움을 타는 청순한 시악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 김영철 / 건국대 국문과 교수 |
대학 1학년 때 가을, 친구 몇 명과 단풍 구경차 무주 구천동으로 여행을 했다. 구천동 길, 포장도 안 된 시골길에 버스가 달리면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나곤 했는데, 마침 하학 길에 줄을 서서 가던 학동들이 버스를 보고 일제히 손을 흔들었다. 버스 창문으로 보이던 그 고사리 같은 손들이 길가에 핀 코스모스와 뒤섞여, 아름다운 또 한 송이의 코스모스로 피어나고 있었다. 구천동 코스모스 꽃길에 피어나던 아름다운 풍경, 내게는 잊혀지지 않는 가을날의 동화로 남아 있다. 귀경길 서울역에서 장발로 단속되어 파출소 신세를 지는 봉변을 당하여, 나 역시 1970년대 군사문화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였다. 그 장발 사건은 가을의 코스모스 동화 속에 묻어있는 한 줌 옥에 티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아련한 젊은 날의 아름다운 초상화로 남아 있다.
청년교수로 봉직했던 대구대 문천지에도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났다. 투르게네프 언덕에도, 은자의 숲에도 코스모스 물결이 넘실거렸다. 예쁜 여학생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정녕 가을의 시악시처럼 졸업사진을 찍곤 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정말 내가 저렇게 우아한 학생들을 가르쳤나 의아할 정도로 고운 자태였다. 그들이 마련해 준 졸업 선물은 한 폭의 풍경화였는데, 졸업생 한명 한명이 문천지 풍경을 하나씩 그려 놓은 것이었다. 푸른 하늘로 떠 가는 흰구름, 그 허공을 맴도는 고추 잠자리, 들국화 한 송이, 그리고 가녀린 코스모스. 마네 모네의 그림보다 아름다운 수채화였다. 그보다 더 값진 졸업선물을 받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나는 그 곳을 떠나고 말았다. 떠날 때 마련해 준 환송회 자리에서 코스모스 한 다발을 건네 주며 남긴 어느 여학생의 한마디, '가을이네요, 그리고 선생님은 떠나시네요'. 아직도 가슴 아픈 그 말이 귓전에 맴도는 것 같다. 참으로 내 생애 가장 슬픈 결별이었다. 그때 그 이별의 배경을 이룬 것도 코스모스였다. 그리하여 코스모스 일화들은 내게 아름다운 전설이 되었다.
시인 이형기가 노래했듯이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피는 꽃' 코스모스는 연신 부딪쳐 오는, 물결치는 그리움인 것이다. 올 가을 코스모스와 함께 이 세상 모두가 사랑의 그리움으로 물결치기를 기대해 본다. 그래서 가을은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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