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서 차출 밤낮으로 일해"… 일제때 인천 조병창 '새 증언'

김태양 기자

발행일 2019-08-23 제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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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한푼 못받고 후유증 병 걸려
영장나와 끌려갔다 고생·탈출등
강제동원노동자 12명 이야기 발표
"국내 연구 '미흡' 기록작업 시급"


일제강점기 인천 조병창에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의 증언이 새롭게 나왔다. 인천 조병창 강제동원 과정부터 탈출까지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어 일제강점기 국내 강제동원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1928년도에 태어난 변모 할아버지는 1944년 3월 말 경기 여주에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영장'이 나왔다.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

변 할아버지는 부평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인솔자를 따라 부평 조병창으로 갔다. 부평 조병창에서 부품 검사를 하고 이상이 없으면 탄창에 쇠도장을 찍어 주는 일을 했다. 변 할아버지는 출근해서 점심 먹는 시간을 빼고 온종일 쇠도장 찍는 일만 했다.

월급을 받은 기억은 한 번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 할아버지는 통제된 조병창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탈출을 결심하고 한밤에 발길이 떨어지는 대로 도망갔다.

헌병의 눈을 피해 산길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한 변 할아버지는 누이의 시댁에서 몸을 숨겨 생활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1929년도에 태어난 윤모 할아버지는 국민학교 5학년 재학 중이던 1944년 충남 공주에서 부평 조병창으로 강제동원됐다. 어느 날 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 놓고 공부 잘하는 학생 2명을 뽑아 다른 곳으로 공부시키러 보낸다고 했다.

부반장이었던 윤 할아버지는 자신보다 한 살 많은 반장과 함께 차출됐다. 조병창에서 칼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공장은 밤낮으로 쉴 틈 없이 돌아갔지만, 윤 할아버지 역시 월급, 여비를 받은 적은 없었다. 윤 할아버지는 해방된 후에야 조병창을 나와 공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년 4개월간의 조병창 생활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병뿐이었다. 조병창에서 칼 검사를 하면서 옻이 올라 얼굴이 부어올랐는데, 해방 이후에도 부어오른 얼굴이 빠지지 않고 몇 달 지나서는 눈썹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한센병에 걸렸다.

인천 조병창은 일제가 전쟁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1939년부터 부평 일대에 건립했다. 한반도 최대규모 군수기지였다. 인천 조병창 강제동원은 충남, 전북, 강원, 경북 등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강제 동원 방식도 다양했다. 주로 '모집'과 '징용' 형식으로 강제동원했고, 학교에서는 차출이 이뤄지기도 했다.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노동을 착취당했다.

일본의 강제동원 역사를 연구해 온 인천대 이상의 초빙교수는 22일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등이 주최한 '일제 말기의 강제동원과 부평의 조병창 사람들' 역사포럼에서 인천 조병창에 강제동원된 노동자 12명의 구술을 정리해 발표했다.

이상의 인천대 교수는 "국내 강제동원 역사를 다룸에 있어 당사자들의 구술은 매우 소중한 가치가 있다"며 "국외 강제동원에 비해 국내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 늦은 만큼 정부·지자체 등이 나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에 남기는 작업을 서둘러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양기자 ks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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