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

[풍경이 있는 에세이]옛날 엄마 뱃속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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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살 아이에게 만삭영상 보여주니
"같이 놀고싶어 빨리 나갔으면 했어"
이제 여섯살 되니 제법 말대꾸도
진실인지 농담인지 알 도리 없는 말
어쨌거나 나에게는 예쁜 위로였다

에세이 김서령1
김서령 소설가
트래버스의 동화책 <메리 포핀스>에는 아기 쌍둥이가 나온다. 존과 바바라. 아기들은 참새와도 이야기하고 나비, 두더지와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발을 입에 물고서 양말을 벗을 수도 있다며 존이 참새에게 자랑을 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너무나 사랑스럽다. 아기들이 더 이상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게 되는 건, 사람의 언어를 배우면서부터다. 아기들은 사람의 말을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더는 새와 두더지와 나비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건 좀 슬픈 장면이었다.

아기들이 훌쩍 자라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면 꽤나 그럴듯하게 대답을 한다고들 했다. 그럴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는 방식을 다 배우기 이전, 아직 세상에 닿지 않았던 시절을 기억할 수도 있지. 다 배우면 그제야 잊겠지. 존과 바바라가 그랬듯. 그래서 나도 아기가 마저 자라기 전 꼭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다섯 살이 되어 제법 말을 하기 시작해 나는 동영상 하나를 보여 주었다. 만삭 무렵 태동이 한창인 내 배를 찍어둔 영상이었다. 아이는 쿨렁쿨렁 혼자 움직이는 엄마의 부른 배를 눈이 동그래져선 쳐다보았다. "웃기지? 네가 엄마 뱃속에서 축구를 한 거야. 그래서 이리로 뛰고 또 저리로 뛰고 그래서 엄마 배가 이렇게 막 움직이는 거야." 아이는 몇 번이나 들여다보더니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거 축구하는 거 아니야. 심심해서 화가 났고, 그래서 엄마를 내가 때린 거야!" "그랬던 거야?" 나도 신이 났다. 어떤 이야기든 듣고 싶었다. 많이 심심했느냐고, 춥지는 않았냐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더냐고 물었다. 아이는 따박따박 대답했다. "심심할 때도 있었어. 그러면 엄마를 막 간지럽혔어. 그러면 엄마가 막 웃었어. 엄마 뱃속은 따뜻한데. 하지만 엄마랑 놀고 싶어서 빨리 나가고 싶었어." 오래전 잊었던 아이의 태동이 떠올라 나는 웃었다. 여름이었고 몸이 무거워 만날 소파에 널브러졌던 날들이었는데. "무섭진 않았어? 깜깜했겠다."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깜깜했어. 엄마 배꼽으로 노란 불빛이 들어왔는데?" 맙소사. 이렇게 예쁜 단어들이라니. 엄마의, 배꼽으로, 노란, 불빛이, 스며들었다니. 그 말이 하도 예뻐 나는 폴짝폴짝 뛰었다. 물어보길 참말 잘했다고, 다섯 살 아이의 이 말은 두고두고 나에게 생의 커다란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아이는 여섯 살이 되었다. 또래보다 키도 크고 말도 많고 머리숱도 내 세 배는 될 참이다. 물론 말대꾸도 하루에 열댓 번. 요즘은 부루마불 게임에 한참 재미를 들였다. 유치원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부루마불만 했으면 좋겠다고 한숨도 쉴 줄 안다. 그날도 나와 둘이 앉아 부루마불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 받침 없는 한글을 조금씩 읽을 줄 알아서 보드게임 속 세계 도시의 이름을 더듬더듬 읽어내린다. 마드리드…… 엄마 여기 가봤어? 이스탄불, 이건 너무 어려워. 그러다가 하와이에 가 닿았다. "엄마는 하와이에 가봤어?" 나는 끄덕였다. 아이가 다시 묻는다. "누구랑?" "아빠랑." "나는 왜 안 데려갔어?" "넌 그때 엄마 뱃속에 있었지. 그러니까 같이 간 거나 똑같아." "하지만 난 뱃속에 있어서 바다도 못 봤잖아!" "배꼽으로 봤을 거야." 내 말에 아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 배꼽은 막혀 있거든?" "꽉 막혀 있진 않아. 노란 불빛도 스며들 수 있잖아." 나는 그 말을 하며 또 행복한 미소를 지었는데. "엄마, 그때 내가 배꼽으로 노란 불빛이 들어왔다고 한 거, 그거 엄마 놀라게 해줄라고 한 말이거든." 다시 맙소사. 이게 무슨 소리람. 야아아아, 내가 소리를 쳤고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냉큼 달아났다.

다섯 살의 말은 진실이었고 여섯 살, 지금의 말이 농담인지 아니면 애초 다섯 살의 말이 농담의 시작이었는지는 알 도리 없다. 어쨌거나 그 시절의 나에게 예쁜 위로 하나 던져주었으니 혼내지는 않기로 한다.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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