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철 前 인천연수구청장·객원논설위원 |
정부가 재외동포 정책의 종합적인 조정과 심의를 위해 1996년 재외동포정책위원회를 설치했지만 운영은 형식적이었다. 지금까지 단 19차례 회의가 있었을 뿐이고 2018년 이후에는 단 한 번 개최됐다고 한다. K-문화 확산, 민원 편의, 지원 조건 완화 등 다양화되고 커지는 재외동포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대변하는 지원 전담 조직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게 재외동포들의 공통된 여론이다. 이제 정부의 결단으로 외교부, 법무부, 교육부, 병무청, 국세청 등으로 산재된 지원업무가 일원화되고 재외동포들의 권익 신장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집단 이주 승인으로 해외 이민 인천서 시작
한국 최초 이민자들 피·눈물 서린 역사 현장
재외동포청은 당연히 인천에 설립돼야 한다. 일제강점기 등에 난민처럼 흩어지거나 징용 등으로 인한 강제 이주를 예외로 하고, 정부의 집단 이주 승인에 따른 타국으로의 공식 이민은 인천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가난이나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팔려가다시피 정든 가족, 이웃, 고국산천을 등져야만 했던 동포들의 심정이 얼마나 서럽고 뼈저렸으랴. 이민 선조들이 남기고 간 눈물과 넋두리가 뿌옇게 서려 굳어버린 것이 서글픈 인천 항구의 생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향토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이민의 역사는 눈물의 역사였음이 분명하다.
한국 이민의 시초가 된 날은 1902년 12월22일 월요일이었다. 그날 일본 국적 '겐카이마루'에 승선한 121명을 포함해 1903년까지 9차에 걸쳐 711명이 제물포를 떠나 하와이로 향했다. 1905년 3월29일에는 영국 기함 '일포드(Ilford)'호를 타고 1천33명이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그들 중 300여명이 쿠바로 재이민을 떠났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큰돈을 번 뒤 귀국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는 전답을 고향에 마련한다는 소박한 일념이었다. 그 뜻을 이루고자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사탕수수 백인 농장주의 무자비한 채찍이었고 피를 보는 선인장 가시였다. 그 고생 속에서도 "조국은 더 이상 가난을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며 이민 50주년을 기념해 인천에 인하전문대학을 설립했다. 교명이 인하(仁荷)인 것은 인천 '인'자와 하와이 '하'자를 따온 것이다.
이렇듯 인천은 한국 최초 이민자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기에 재외동포청은 반드시 인천에 설립돼야 한다. 120년 전 제물포부터 비자발적으로 시작된 해외 이민을 한국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른다. 1954년 이민자들의 정성이 모아진 인하전문대학 설립이 1차 귀환이었다면 2차 귀환은 2008년에 문을 연 한국이민사박물관이다. 이민사박물관은 쓸쓸한 겨울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난간을 붙들고 멀어져 가는 그날의 이민자들을 배웅하듯 날마다 인천 앞바다를 바라다보고 있다. 재외동포 종합지원기관인 재외동포청이 인천에 둥지를 튼다면 담대한 디아스포라의 귀환이 완성되는 것이다.
유정복 시장, 유럽총연 지지 선언 이끌어 내
유치땐 업무 적극 지원·선조들 애환 기려야
유정복 인천시장은 지난달 프랑스,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등 4개국을 방문했다. 이번 해외 출장에서 25개국 유럽한인총연합회로부터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 지지선언도 이끌어냈다. 이처럼 역사적, 지리적, 정서적으로 볼 때 인천보다 재외동포청의 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래도 인천시는 방심하지 말고 재외동포와 시민사회의 지지를 하나로 모아 재외동포청 유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유치된다면 업무를 적극 지원하고 이민 선조들의 애환을 기리는 공간도 충분히 마련해 줄 것으로 믿는다. 재외동포들과 시민이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도 적극 개최해야 한다.
/신원철 前 인천연수구청장·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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