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한끼로 퍼트린 '온정의 홀씨'… 화수동 '민들레국수집' 20주년

입력 2023-04-09 19:42 수정 2023-04-09 21:36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4-10 6면

민들레국수 20주년
인천 동구에 있는 '민들레 국수집'이 문을 연 지 20주년을 맞았다. 굶주리고 어렵게 지내는 이들을 위한 이곳은 오롯이 개인이 선의로 건넨 후원금과 물품으로만 운영된다. 서영남(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민들레 국수집 대표와 식구들이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식당을 꾸미고 있다. 2023.4.9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노숙인들이 따뜻한 밥 한 끼를 배불리 먹고 싶으면 찾는 곳이 인천에 있다. 서울, 경기도뿐만 아니라 지하철이 연결된 곳이면 어디서든 찾아오는 소문난 맛집이다. 있는 것을 다 털어 손님들에게 내놔 곳간이 비어도 고마운 어떤 이들이 다시 곳간을 채워주는 기적과 같은 곳. '민들레 국수집'이 바로 그곳이다. 국숫집 주인장에겐 노숙인들이 단골손님이다.

민들레 국수집이 지난 2003년 4월1일 인천 동구 화수동에서 문을 연 지 이달로 꼭 20년이 됐다. 가톨릭 수사(修士)였다는 민들레 국수집 대표 서영남(69)씨는 "환속 후 동구 달동네 거리에서 굶주리고 어렵게 지내는 이들을 돕다 직접 국숫집을 차리기로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서씨는 그해 식탁 하나와 국수 6상자, 국그릇 20개 등 단출한 살림으로 급식소를 차렸다.



지금은 열댓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자신에게 도움받던 이들이 일손을 거드는 국숫집 식구가 되기도 했고, 국수로 시작했던 급식은 언제부턴가 고기반찬이 가득한 따뜻한 밥 한 끼로 바뀌었다. 서씨는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을 뺀 나머지 날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어 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서영남 대표, 수사 환속 후 차려
식탁 하나로 출발 이제 규모 커져
정부 아닌 개인후원만 받기 '신념'


20년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는 이 국숫집만의 철칙이 있다. 아무리 많은 손님이 찾아와도 줄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씨는 "이미 이 사회의 경쟁에서 밀려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여기에서까지 경쟁하듯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며 "우리 국숫집에서는 더 굶주렸거나, 지병이 있거나, 더 어려운 사람이 가장 먼저 밥을 먹는다"고 말했다. 이런 운영 방식에 찾아온 손님들도 군말 없이 순서를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한다.

국숫집은 오롯이 개인이 선의로 건넨 후원금과 물품으로만 운영된다. 정부나 대기업 등의 지원은 남의 돈으로 생색내기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서씨의 도움으로 다시 희망을 찾은 이들도 있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도움을 청했던 한 남성이 있었다. 이혼 후 홀로 생활하다 거리를 떠돌게 됐고, 매일 술을 마시고 남들과 시비 붙기 일쑤였다. 그를 안타깝게 여긴 서씨는 치료도 해주고, 방까지 얻어줬다. 그래도 그 남성은 술을 끊지 못했고, 다른 세입자와 싸우다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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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이웃과 노숙인들에게 온정을 퍼트리는 '민들레 국수집'이 20주년을 기념하며 서영남(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대표와 국숫집 식구들이 식당을 꾸미고 있다. 2023.4.9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그래도 서씨는 매일 같이 그를 돌봤다. 방에서 쫓겨나면 다른 방을 얻어줬다. 그에게 "언제든 도와줄 테니 찾아오라"고 했다. 서씨는 "언젠가 그 친구가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평택의 한 건설 현장에 취직해 국숫집에 필요한 물건도 사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민들레 국수집은 코로나19 여파로 2년 가까이 노숙인 등에게 도시락을 제공하다 지난해 봄에 다시 문을 열었다. 서씨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노숙인들은 물도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더 도와주지 못해 참 안타까웠다"며 "다행히 지금은 상황이 나아져서 다시 손님들과 인사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그의 따뜻한 마음은 국숫집 간판인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동구에 '민들레 진료소' '민들레 도서관' '민들레 어린이 공부방' 등을 만드는 데도 일조했다. 이 공간들은 서씨와 여러 자원봉사자가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쓰이고 있다.

지난 2014년엔 멀리 필리핀에도 민들레 국수집을 차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수사 시절에 필리핀으로 2년간 파견을 떠났는데, 가난하지만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대해준 이들에게 언젠가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멀리 이국땅에도 온정을 베풀게 된 것이다.

노숙인 게스트 하우스 조성 목표


서씨의 남은 꿈은 게스트 하우스를 짓는 것이다. 노숙인들에게 잠시라도 안식처를 주고, 기회가 된다면 함께 지내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경제적 문제 등을 생각하면 게스트 하우스를 짓는 건 정말 꿈 같은 일입니다. 그래도 민들레 국수집처럼 기적이 일어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서씨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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