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21)] “올해 목표도 금메달”…공부하는 스프린터 박다윤

입력 2024-02-28 14:44 수정 2024-03-01 12:39

고교 전국 1위 육상 유망주, 서울대 일반 입학

서울대 최초 육상 전국대회 우승…체육계 깜짝

어릴 적부터 훈련 틈틈이 공부 “부모님과 약속”

“대학 3학년 올해도 선수생활 이어 우승 목표”

 

‘공부하는 운동선수’ 원조는 경인기차통학생

인천 최초 야구단 ‘한용단’으로 민족의식 고취

‘선인왕국’ 인천체고 설립…엘리트 체육 산실

선인체육관서 2012년 청라로 이전, 시설 보완

박다윤

서울대 육상부 박다윤 선수가 지난 21일 오후 인천체육고등학교 육상 트랙에서 달리기 직전 포즈를 하고 있다. 인천체고는 박다윤의 모교다. 2024.02.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공부하는 스프린터’란 수식어가 싫지만은 않다고 했다. 이제껏 없던 유형의 운동선수, 이제껏 없던 유형의 서울대생. 방향이 전혀 달랐던 두 갈래의 길을 하나로 이어 온 박다윤의 노력과 성취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가 이것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2022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제51회 종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대학부 200m 경기에 서울대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박다윤이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자, ‘깜짝 금메달’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박다윤의 실력보단 ‘서울대생 최초 우승’이란 타이틀에 방점을 찍은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한 달 후 전북 익산에서 열린 제77회 전국대학육상선수권대회 200m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제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도 400m 1위, 200m 2위를 기록하며 더는 ‘깜짝’이란 표현이 맞지 않음을 박다윤은 입증했다. 서울대 소속이든 아니든 박다윤은 항상 우승 전력감인 선수다.

대학 2학년인 지난해 10월 전남 목포에서 열린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200m 2위를 차지하며 이 종목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설마 대학 3학년이 돼서도 운동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느냐란 시선에 박다윤은 “올해 목표는 우승뿐 아니라 개인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라고 의지를 다진다.

“저도, 부모님도 대학교에 입학하면 대학 생활에 더 집중하고 운동은 취미 정도로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서 첫 대회에 출전했는데 좋은 성적이 나오니까 저도, 부모님도 계속 운동을 해보자는 쪽으로 기울었어요. 제가 가장 빛날 때는 육상을 할 때인데, 잘하는 걸 굳이 포기하기가 너무 아까웠죠.”

과거의 엘리트 체육인 육성 방향이 꼭 정답은 아닐 수 있다. 박다윤은 전문 지도자의 지도 없이 운영해 동호회에 가까운 서울대 육상부에서 부원들과 매주 2차례 훈련하고, 수업 외 시간을 쪼개 혼자 운동한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곤 서울체육고등학교에서, 주말이나 방학엔 모교인 인천체육고등학교에서 연습하고 있다. 때때로 고교 은사와 대학 조교수·교수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전문 지도자의 지도나 체계적 훈련 시스템 없이도 어떻게 육상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박다윤은 “(연습)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더라”고 단순 명쾌하게 설명했다.

박다윤

박다윤 선수는 지난 21일 인터뷰에서 “후배 운동선수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2024.02.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03년 인천 계양구 태생 ‘Z세대’다. 2000년대 중반 개발이 한창인 계양구 동양택지 쪽으로 이사했다. 동네에 살던 친구보다 새로 이사 온 친구가 더 많았다. 인천당산초등학교 4학년 때 육상부가 생기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체육 선생님이 학교 체육대회 때 좀 뛴다는 아이들 45명 정도 모아서 육상부를 만들었어요. 인천시 대회에 출전했는데, 성적이 괜찮아서 이듬해 코치 선생님이 부임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육상부 활동을 했어요. 인천시 대표로 전국소년체육대회나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체육대회, 교보생명컵 꿈나무체육대회에서 100m, 200m를 주로 뛰었고요. 초등학교 땐 인천에서 제일 잘 뛰었지만, 전국 대회에선 메달을 따진 못했어요. 최고 성적은 4등이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니 어떤 걸 집중해서 시켜야 할지 부모님의 고민이 컸을 것도 같다. 박다윤의 아버지는 기자다. 박다윤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무척 좋아했다. 작가를 꿈꿨을 정도다.

“학교 수업 전 훈련을 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6학년 때 전국소년체육대회를 끝으로 육상부를 그만뒀어요. 어쩔 수 없이 선발돼 나가야 하는 전국대회가 딱 하나 있었는데, 한두 달 운동을 쉬고 뛰니 너무 못 뛴거죠. 저보다 못 뛰던 아이들이 제 앞에 있는 게 싫었어요. 저 아이들을 이기겠다는 생각에 제가 부모님을 설득해서 계속 운동을 하게 됐어요.”

특유의 승부욕이 발동하면서 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집 근처 중학교에는 육상부가 없어 자동차로 40분가량 걸리는 가좌여자중학교에 입학해 육상부에 입단했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겠다고 공부에 집중하길 바랐던 부모님을 설득했다. 학교 코치 선생님이 매일 새벽 자신의 차량으로 박다윤을 통학시킬 정도로 유망한 육상선수였다.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16> 축구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중심으로 꾸린 인천 첫 야구단 ‘한용단’이 활약했던 1920년대 웃터골운동장 전경(현 제물포고 자리). /경인일보 DB

공부하는 운동선수의 원조 격인 일제강점기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가 떠오른다.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명문 학교로 통학하던 학생들이 1915년 무렵 결성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문예부와 함께 1920년 인천 첫 야구단 ‘한용단’(漢勇團)을 꾸려 활발하게 활동했다.

국회의장까지 지낸 인천의 거물 정치인 곽상훈(1896~1980)이 단장을 맡아 서울 배제학당, 중앙고보 등에 다니는 16~17세 학생들로 단원을 구성했다.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경기장(인천공설운동장)에서 지금으로 따지면 실업팀들과 자웅을 겨뤘다. 한용단이 일본인 팀과 맞붙은 경기는 인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일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인천의 수재들이 운동까지 잘하면서 민족의식을 드높여야 했던 시대였다.

신태범(1912~2001) 박사는 향토사 기록 ‘인천 한 세기’에서 한용단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한용단이 유명했던 것은 야구를 잘한다고만 해서가 아니었다. 그간 쌓이고 쌓였던 일본인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한때나마 야구 경기를 통해 발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공연하게 일본인과 맞붙어 싸울 수 있고, 마음 놓고 이것을 응원할 수 있는 기회란 이것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철시를 하다시피 온 시내를 비워 놓고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열병에 들 뜬 것처럼 웃터골로 모여들었다.”

한용단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의 공부하는 운동선수는 다른 의미로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다. 많은 학교 운동부 선수가 박다윤의 길을 꿈꾸기 시작했다.

“예전엔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는 인식이 많았잖아요. 요즘엔 공부도 운동도 둘 다 잘하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해진 것 같아요. 운동선수는 다른 직업에 비해 ‘생명’이 짧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면 더 짧아져요. 운동선수의 삶도 다양한 길을 찾아볼 수 있는 여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후배 운동선수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선택지를 넓힐 수 있는 방법입니다. 공부하는 선수는 운동선수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좋은 타이틀인 것 같아요.”

박다윤은 중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시작한 400m 종목에서 처음으로 전국대회 1위를 했다. 이 때부터 200m와 400m를 주종목으로 굳혔다. 초등부 경기 종목에는 400m가 없었다. 박다윤은 출발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근지구력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400m 종목에서 빛을 발할 것이란 얘기를 들어왔던 터다. 시간이 부족해서 수학학원 정도만 다녔고, 나머지 과목은 아버지가 과외 선생님이 돼 줬다고 한다.

박다윤이 입학한 인천체육고등학교는 1975년 11월 선인학원이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에 설립했다. 1962년 ‘국민체육진흥법’ 제정으로 정부의 체육 진흥 정책이 본격화했다. 당시 국내 최대 사학재단이던 선인학원은 1973년 국내 최초의 체육전문학교인 인천체육전문학교(1981년 인천전문대학으로 통합)를 동양 최대 규모 체육관인 선인체육관과 함께 도화동 ‘선인왕국’ 내에 건립했다.

선인학원은 정부 체육 육성 정책에 발맞춰 인천체육전문학교에 육상부, 농구부, 배구부, 야구부, 탁구부, 레슬링부, 럭비부, 축구부, 정구부, 유도부, 태권도부, 검도부, 사격부, 역도부, 발레부, 펜싱부, 핸드볼부, 수영부, 사이클부 등 운동부를 뒀다. 1976년 말 한국체육대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그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인천체고는 1976년 12개 학급 규모로 제1회 신입생을 받았다.

선인체육관

2013년 8월 발파 해체되기 직전의 선인체육관 전경. /경인일보 DB

‘맘모스 체육관’으로도 불린 선인체육관은 높이 65m짜리 건물 2개와 대형 돔 구조물이 언덕 위에 솟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징가 제트’라는 별칭도 있었다. 1만9천㎡ 땅에 건립된 8천500㎡ 규모 체육관은 어떤 종목의 국제경기를 치를 수 있을 만큼의 시설을 갖췄고, 그만큼 거대했다. 두 개의 건물 중 한쪽은 인천체육전문학교가, 다른 한쪽은 인천체고가 사용했다. 1970~1980년대 홍수환, 장정구, 유명우 등 프로복싱 스타들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 매치가 열린 장소로도 유명했다.

비리 문제가 심각했던 선인학원이 시립화한 1994년 2월 인천체고 설립자도 인천시교육감으로 변경됐다. 인천체고는 2012년 8월 청라국제도시로 학교 건물과 각종 훈련 시설을 신축해 이전했다. 비나 눈이 와도 박다윤이 마음껏 훈련할 수 있었던 전천후 육상 트랙도 이때 만들었다. 선인체육관은 인천체고가 이전한 다음해 8월 도화도시개발사업 추진을 위해 발파 해체됐다. 그 자리엔 현재 대형 주상복합이 들어섰다.

현재 인천체고는 육상, 체조, 수영, 세팍타크로, 핀수영, 사격, 역도, 유도, 태권도, 복싱, 자전거, 레슬링, 조정, 근대5종, 양궁, 펜싱 등 종목을 특기로 둔 학생 270여 명이 재학 중이다. 박다윤은 인천체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인천체고는 모든 학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박다윤은 낯선 기숙사 생활과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잠시 슬럼프를 겪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가장 기록이 좋았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 느꼈어요. 운동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던 시기였죠. 슬럼프가 오래 가진 않았어요. 부모님, 선생님, 선배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평소 하던 대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묵묵히 운동을 하다 보니 극복이 되더라고요. 1학년 때 마지막 경기가 전국체육대회였는데, 결국 400m에서 동메달을 따고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고등학교 2, 3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되며 승승장구했다. 학업 성적도 학교 전체에서 최상위권이었다. 체고 학생들은 오전과 오후 수업·훈련을 마치면 저녁 시간은 여유가 있어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다는데, 박다윤은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했다. 수업시간에도 눈에 불을 켰고, 특히 노트 필기를 엄청 열심히 했다고 했다. 필기 내용을 열심히 읽는 게 공부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고3 수험생 박다윤은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대회에 문제집과 책을 싸서 들고 다녔다.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지만, 승부욕으로 버텼다.

박다윤

인천체고에서 훈련하고 있는 박다윤 선수 모습. /박다윤 제공

인천체고에서 추억도 많다. 기숙사에서 선생님 몰래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태권도 띠와 유도 띠를 엮어 빨래통에 묶고, 길게 늘어뜨려 1층으로 내리면 배달 기사가 빨래통에 음식을 넣어 줬다. 박다윤은 “새벽 두세 시에 몰래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며 “선생님들도 눈치를 채면서도 가끔 눈감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애초 서울대가 목표였던 건 아니다.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거나 실업팀에 입단할 기회는 박다윤에게 얼마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제10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400m 1위, 1천600m 계주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육상 유망주였다. 체육특기자 대입 전형이 없는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일반 수시전형으로 도전하고 합격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솔직히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이니 갈 수만 있다면 누구나 가고 싶잖아요. 내신도 좋았고 충분히 도전할 수 있는 전형이라고 생각해서 도전했어요. 일반 전형이었지만, 대회 입상 실적이나 국가대표 상비군 경력이 ‘스펙’이라면 ‘스펙’이 될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서울대 이름을 달고 전국대회에서 1등을 해보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평생 육상선수를 할 순 없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올해에도 전국대회 금메달이 목표인 박다윤은 올해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 생각이다. 다만 기회가 닿는다면 대학 재학 중이라도 실업팀에 입단해 1~2년 정도 선수 생활을 더 유지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계획조차 또 달라질 수 있는, 아직은 이른 나이의 성장 중인 선수이자 대학생이다. 요즘 박다윤이 꾸는 꿈은 스포츠 미디어 분야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운동하느라 공부하느라 바쁘고 평범하게 지내서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네요. 쭉 살아온 고향이라 그런지 너무 익숙하고 편안해요. 제겐 그런 동네예요.”

<인터뷰 공감> 박다윤 서울대 스프린터

인천체고 재학 시절인 2021년 제102회 전국체육대회 여고부 1천600m 계주에서 우승한 박다윤(왼쪽에서 2번째)과 인천 선수들./ 박다윤 제공

■ 약력

2003년 인천 출생

2016년 인천당산초 졸업

2019년 인천가좌여중 졸업

2022년 인천체고 졸업

2022년 서울대 체육교육과 입학

■ 주요 대회 성적

2018년 제47회 전국소년체육대회 400m 2위

2019년 제100회 전국체육대회 400m 3위

2021년 제102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1천600m 계주 1위

2022년 제51회 전국종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200m 1위

2022년 제103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200m 2위

2023년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200m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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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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