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아임 프롬 인천·(26)] 개교 70주년 인하대 ‘1회 졸업생’ 남종우 전 인하대 부총장

입력 2024-05-15 17:10 수정 2024-05-15 21:05

1933년 옛 경기 김포 검단면 토박이 집안 출생

1995년 고향 인천 서구 편입, 검단신도시 조성

전쟁통 중학교 다녀…국민방위군 입대하기도

 

이승만 ‘인하대 설립’ 담화 전해듣고 입학 결심

치열하게 공부한 대학 생활 중 낙섬의 추억도

모교 교수 길 택해 학생처장 등 주요 보직 맡아

조중훈 이사장 “의대 설립하라” 부총장직 권유

남종우 전 인하대학교 부총장이 지난 2일 오후 인하대의 상징 비룡탑이 보이는 교정에서 1회 입학생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2024.5.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남종우 전 인하대학교 부총장이 지난 2일 오후 인하대의 상징 비룡탑이 보이는 교정에서 1회 입학생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2024.5.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올해로 개교 70주년을 맞은 인하대학교 이야기를 ‘아임 프롬 인천’에서 지나칠 수 없다. 어떤 인물이 70년 인하대를 상징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학교 측 인사가 “1회 졸업생이 있는데, 여전히 정정하시다”고 귀띔했다. 게다가 인하대 교수로 재직하며 부총장까지 역임하고 정년퇴직했다니, 인터뷰 상대로 더할 나위 없었다.

1933년생 남종우 전 인하대 부총장은 “인물보다 학교를 조명해 달라”는 조건으로 조심스럽게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 지난 2일 오후 인하대 교정에서 만나 학교 이곳저곳을 설명한 남종우 전 부총장은 망백의 나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꼿꼿하고 또렸했다. 보청기도 끼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 자택에서 인하대까지 홀로 오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두어 달에 한 번은 지인들을 만나러 인천에 온다”고 했다.

남 전 부총장은 옛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원당리 의령 남씨 집성촌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고향은 1995년 3월 인천시 서구로 편입됐다. 13대조 할아버지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다고 하는데, 인천 사람보단 검단 사람으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하다. 서구 원당동에 있는 의령 남씨 종중 묘역은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김포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농촌이던 남 전 부총장의 고향 동네는 종중 묘역만 남고 전부 ‘검단신도시’가 조성됐다.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남 전 부총장은 주민등록상 1934년생이다.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먹고살기 힘든 시골에선 어린 아이가 마마(천연두)나 홍역 같은 질병에 걸리면 일찍 죽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형제들 모두 1년씩 늦게 출생 신고를 했습니다. 멀리 있는 면소(면사무소)에 가서 출생 신고를 해놓고 1년도 안 돼 죽으면 또 가서 신고해야 해서 번거로우니까. 내 고향은 아주 시골이었는데, 지금은 인천이 돼 버리고, 조상님 산소들만 남고 전부 아파트 단지가 돼 버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일제강점기 김포초등학교에 입학해 해방 후 수석으로 졸업했다. 초등학교는 2개 반이었다. 남 전 부총장은 수학을 참 좋아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6년제로 개편된 김포농업중학교에 1947년 입학했으나, 한 달도 되지 않아 자퇴했다. 당시 농촌에선 당연시한 농업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건 학업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실상 집안 농사일을 거드느라 중학교 진학조차 포기한 학생이 많았다.

1950년대 옛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의 한 마을과 학교 모습. /출처 : 서구사

1950년대 옛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의 한 마을과 학교 모습. /출처 : 서구사

남 전 부총장은 이듬해 당시 명문이던 6년제 인천중학교에 다시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김포에선 그를 포함해 4명이 인천중 시험에 응시했는데, 혼자만 붙었다고 한다. 또다시 학제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개편되면서 1951년 인천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인천중학교의 후신 제물포고등학교는 1954년에 개교했다.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는 일제강점기 때와 똑같이 9월1일에 새 학년이 시작됐어요. (1950년) 6·25사변이 나서 수업이 중단됐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해서 새 학년 초를 다니다 1·4후퇴로 또 수업이 중단됐습니다. 중학교 3년 가운데 수업을 들은 기간은 1년 6개월 정도밖에 안 됐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전국적으로 학제가 바뀌어서 고등학교 3년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중·제고동문회와 인천고동문회 모두 회원으로 가입돼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남 전 부총장의 나이는 만 17세로 징집 대상이었으나, 주민등록상 나이로는 한 살이 어려 징집되지 않았다.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사촌 형은 육군에 징집된 지 한 달여 만에 경기도 가평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남 전 부총장은 연령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예비군 성격의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해 경남 창원에서 3개월 동안 방공호 건설 등에 투입됐다. 국민방위군 활동 공적이 뒤늦게 인정돼 2013년에서야 국가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어린 학생에게도 전쟁이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현 인하대의 전신 인하공과대학은 1954년 4월24일 토요일 개교했다. 이날은 인하대 화학공학과 54학번 남 전 부총장의 입학식이기도 했다.

1954년 개교 당시 인하공과대학 전경. /인하대 제공

1954년 개교 당시 인하공과대학 전경. /인하대 제공

인하공과대학 설립 계획은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6월4일 오전 9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특별 담화문으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담화문은 당시 공보처 보관문서(제248호)로 남아있다. 이승만 대통령 담화문에는 인하공과대학 설립 배경과 목적이 모두 담겼다. 그 내용 일부를 옮겨본다.

‘인하대학은 인천과 하와이 사이에 한국이민선이 처음으로 인천에서 하와이에 간 50년 기념을 목적하고 대학을 인천항구 내에 건설하기로 결정되여서 (중략) 공과대학을 만들어서 마치 미국의 MIT와 같은 미국에 제일 유명한 공과대학을 의미한 것이니 (중략) 이 물질시대에 기계학과 공업 발전에 다른 나라와 경쟁하자는 목적을 가진 것이니….’

“저는 의과대학을 가길 희망했는데, 우리 집이 예과·본과 6년 동안 학비를 마련할 형편이 안 됐습니다. 인천고 허민 선생님이 이승만 대통령 라디오 방송을 듣고 저에게 ‘인하공과대학이 곧 만들어지는데, 왕립대학이니 학비가 싸다’며 진학을 권유했어요. 미국의 MIT 같은 대학을 만든다는 말에 솔깃했지요. 인천고 동기들도 인하공과대학을 많이 지원했습니다. 개교 전이라 입학시험은 서울 돈암동 경동고등학교에서 치렀죠.”

인천과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명명한 인하공과대학은 하와이 한인 동포들이 일제강점기 민족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했던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매각해 마련한 기부금 15만 달러(900만환)를 기초 재원으로 설립됐다. 1902년 12월22일 인천에서 하와이로 떠난 우리나라 ‘1호 해외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기부금을 냈다. 여기에 정부 보조금과 국내 민간 기부금, 유엔 등 해외 원조를 보탰다. 국내 민간 기부금 대부분은 기업, 정부 산하 경제단체, 그리고 전국 공무원 봉급에서 5%씩 각출했다. 사립대학교 모양새를 갖췄지만, 사실상 국가 주도로 설립한 대학이었다.

1954년 인하대 개교 당시 화공과 신입생 단체 사진. 남종우 전 부총장이 사진을 간직해 등장 인물들에게 일일이 번호를 매기고 이름을 적었다. /남종우 제공

1954년 인하대 개교 당시 화공과 신입생 단체 사진. 남종우 전 부총장이 사진을 간직해 등장 인물들에게 일일이 번호를 매기고 이름을 적었다. /남종우 제공

지금의 인하대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개교 당시엔 허허벌판에 건물 3개 동이 전부였다. 학과와 입학 정원은 기계공학과, 조선공학과, 광산공학과, 금속공학과, 화학공학과, 전기공학과 등 6개 학과에 120명씩 총 720명이었다. 한국 최초 이학박사이자 ‘원철스타’로 유명한 천문학자 이원철(1896∼1963)이 초대 학장을 맡았다.

학생들이 캠퍼스의 낭만을 생각하기엔 공업입국(工業立國)이란 인하대 설립 목적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무지막지하게 공부해야 했다.

“아이고, 1학년 때부터 40학점(당시 학칙상 36학점)을 못 따거나 과목 평균 60점(100점 만점)에 미달하면 무조건 퇴학 조치했어요. 그러니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죠. 성적이 안 좋으면 방학 중에 나머지 공부도 했습니다. 제 기억엔 1회 입학생 중 15명이 제적 처분됐고, 화공과도 2명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름이면 화공과 동기들과 버스 타고 낙섬 해변에 가서 수영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 일대는 1960·70년대 도시 개발 등으로 완전히 매립되기 전까지 바닷가였고, 낙섬(원도)이란 조그만 무인도도 있었다. 주민들이 해수욕과 낚시를 즐기던 낙섬에서 인하공과대학 학생들도 1학기 종강 후 단체로 야유회를 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참외를 하나씩 나눠줬다고 한다. 남 전 부총장은 그때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바닷가는 현재 ‘낙섬사거리’란 지명으로만 남아있는 도로의 어디쯤이었을 것 같다.

1954년 인하공과대학 1학년 1학기 종강 이후 전교생이 낙섬 해변에서 가진 야유회 모습. 당시 사진을 촬영한 장소는 매립돼 더는 해변이 아니다.  /남종우 제공

1954년 인하공과대학 1학년 1학기 종강 이후 전교생이 낙섬 해변에서 가진 야유회 모습. 당시 사진을 촬영한 장소는 매립돼 더는 해변이 아니다. /남종우 제공

남 전 부총장은 졸업 후에도 학교에 남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입학식과 졸업식에 모두 참석했다. 남 전 부총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1회 졸업식 축사에서 “거북선도 만들고 젯트비행기도 만들며 남이 못하는 것을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나서야 된다”고 한 격려를 깊이 새겼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남 전 부총장은 인하공과대학 화공과 전임강사로 활동하다 1966년 일본 정부 초청으로 도쿄공업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1970년 박사 학위를 취득해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 사이 인하공과대학은 한진그룹 창립자 조중훈(1920~2002) 회장이 인수해 인하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71년 종합대학 ‘인하대학교’로 전환했다.

“이승만 박사가 하야하고, 1960년대 초부터 인하공과대학이 힘을 못 쓰기 시작하니까 많은 교수가 한양대학교로 이직했습니다. 조중훈 이사장이 인하대를 인수하면서 위상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 현 인하대 본관 기공식을 하는 등 건물이 점점 늘어갔고, 교수 처우를 개선하니까 실력 있는 교수들이 다시 왔습니다. 박사가 별로 없는 시절이라서 서울의 대학들이 저한테도 스카우트 제의를 많이 했는데, 인하대 봉급이 훨씬 높아서 갈 필요가 없었죠. 제가 1회 졸업생인데 어딜 가겠습니까. 아무튼 조중훈 이사장이 인하대를 인수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학교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큽니다.”

남 전 부총장은 인하대에서 출판부장, 학생처장 등 보직도 두루 맡았다. 1983년 12월 초 조중훈 이사장이 남 전 부총장을 불렀다.

“그때 학생처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사장 비서실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라고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갔더니 조중훈 이사장이 거기 있었어요. 조 이사장과 비서실장, 저 셋이서 헬리콥터를 타고 전라도 광주로 내려갔단 말이죠. 박정희 대통령이 광주에서 꼭 들렀다던 한정식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는데 조 이사장이 저에게 ‘내년부터 부총장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부총장을 맡아서 의과대학을 신설하라고요. 식사를 마치고 조 이사장의 벤츠 600 차량을 함께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남 전 부총장은 조금 난감했다. 당시 부총장은 인천중학교 은사인 조병화(1921~2003) 교수였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의 자리로 간다는 부담이 컸다고 한다. 이사장 요청이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1984년 1월1일자로 부총장으로 부임하는 동시에 인하의과대학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았다. 그해 10월 인하대 의과대학이 의예과 1개 학과로 출범했고, 1986년 11월 의학과가 설치됐다.

지난 2일 인하대학교에서 만난 남종우 전 인하대 부총장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인하대를 인수한 이후부터 학교가 위상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24.5.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2일 인하대학교에서 만난 남종우 전 인하대 부총장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인하대를 인수한 이후부터 학교가 위상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24.5.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남 전 부총장이 의예과를 신설할 때 운동선수를 스카우트하듯 전국에서 성적 우수 학생을 직접 유치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학생처장을 맡았을 때 가장 중요한 업무가 운동선수를 스카우트하는 것이었어요. 그때는 어느 대학이나 다 수준이 비슷했어요. 유명한 고교 선수를 학교로 데려오려면 그만한 인센티브가 있어야 했습니다. 한번은 제물포고에 좋은 투수가 있다고 해서 인하대 야구부로 진학하기로 당시 제물포고 교장과 얘기를 다 끝냈는데, 글쎄 그 선수가 갑자기 고려대로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 교장과 전화로 굉장히 싸웠어요. 의과대학도 ‘공부 선수’를 스카우트하자는 아이디어를 제가 냈습니다. 전국에서 1등을 하는 학생을 찾아다닌 끝에 첫해에 5명을 뽑았어요. 제가 부총장 임기를 마친 뒤 더는 ‘공부 선수’를 스카우트하진 않은 걸로 압니다.”

남 전 부총장은 1999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학교를 지켰다. 남 전 부총장은 현재도 인하대 명예교수이므로 학교 역사 70년을 함께하고 있는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학자로서 성과에 대해 질문했을 땐 겸손하게 답변했으나, 남 전 부총장은 한국 화학공학 분야 학문 기초를 다지고 관련 학회 활동을 강화한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한국공업화학회라는 학회가 지금 회원이 5천600명 정도입니다. 예전엔 몇몇 교수가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는 바람에 회원도 적고 세가 약했어요. 제가 1998년 학회장을 맡으면서 기업 연구소 등에서도 회장을 할 수 있게끔 정관을 바꿨어요. 회원이 늘고 재정도 튼튼해지고 학회 활동도 활발해졌습니다. 행정이 서툰 학계에선 이런 일도 큰 업적입니다. (웃음) 인하대에 관해선 앞으로도 1회 졸업생으로서만 할 수 있는 얘기, 다소 쓴소리도 많이 할 겁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답했다. “잠을 푹 자야 합니다. 그리고 뼈가 튼튼해야 하는데, 자기 전에 우유 한 컵을 꼭 마십니다. 화학자가 하는 말이니 믿어보세요.”

■약력
1933년 경기 김포군 원당리(현 인천 서구 원당동) 출생
1947년 김포초등학교 졸업
1947년 김포농업중학교 입학·자퇴
1951년 인천중학교 졸업
1954년 인천고등학교 졸업
1958년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 1회 화공과 졸업
1962년 인하공과대학 화공과 전임강사
1966년 일본 문무성 초청 유학
1970년 도쿄공업대학 공학박사 졸업
1972년 인하대학교 화공과 교수
1978년 인하대학교 출판부장
1980년 도쿄공업대학 전자화학공학과 객원교수
1982년 인하대학교 학생처장
1984년 인하대학교 부총장(3회 연임)
1984년 인하대학교 인하의과대학설립추진위원장
1984년 인하대학교 전산화추진위원장
1999년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학회 경력
1988년 한국부식학회 창립위원·제2대 회장
1998년 한국공업화학회 제5대 회장
1999년 한국화학관련학회연합 창립준비위원장·초대 부회장
2024년 한국공업화학회 제4대 명예회장
■기타
1989년 한국장학회 장학위원
1994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창립회원
1999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2001년 인중·제고 길영희 교장기념사업회 제4대 회장
2013년 국가유공자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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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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