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어도 ⑧
아무렴, 샤워부터 하라는 전화를 하다니…너무 노골적이잖아? 그럼에도 박준호는 내숭을 떨며 놀란 시늉을 한다. 그리고 “전 샤워하러 온 게 아닌데요”라고 촌뜨기처럼 또박또박 반문한다.
“이곳 공기는 습기가 많은 편이거든요. 특히 여름엔 정도가 심해서 하루에 두 번 이상 샤워를 안 하면 찜찜해서 견디기 어려워요.”
그녀가 무대 배우의 팬터마임처럼 샤워하는 시늉을 진지하게 구현해 마지않는다. 박준호도 으쓱 어깨를 들었다가 내려놓은 뒤에 입을 연다.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괜찮아요?”
“물으세요.”
“여긴, 뭐하는 데죠? 시루코 여사님의….”
“아하!”
그녀가 대번에 감 잡았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뭘 궁금해하는지 알 것 같아요. 여긴요, 시루코 여사님의 개인 여름 별장이에요. 난 시루코 여사님이 오실 때만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구요.”
박준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한 번 더 묻는다.
“이곳을 관리하신다구요?”
“그래요. 파트타임으로 관리를 맡고 있어요.”
“일본 사람인가요?”
“맞아요.”
그녀가 그렇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묻지 않은 설명까지 덧붙인다.
“일본에서 온 유학생이에요. 브라이튼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구요.”
“그렇군요.”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는 식으로 시선을 걷는 박준호에게 이번에는 그녀가 질문을 한다.
“나도 뭐 하나 묻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박준호가 서슴없이 대답한다.
“학생이죠?”
“네, 학생이에요.”
“일본 학생은 아닌 것 같고…혹시 베이징에서 왔나요?”
“아닌데요.”
“그럼….”
뭔가 호기심으로 가득 찼으면서도 의식적으로 절제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진즉 터득한 터였으므로,
“중국도 대만도 아니구요. 한국학생이에요. 여름방학 아르바이트 일감을 맡았어요. 물론 여사님은 고용자고, 나는 피고용자고…이제 됐습니까?”
흡사 자진 출두한 피의자처럼 그녀의 다음 질문 요지까지 줄줄 늘어놓는다.
“됐어요. 미안해요.”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다. 박준호는 비로소 방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실내는 생각보다 소박하다. 그냥 원룸이다. 우윳빛 유리로 막혀진 샤워장이 있고, 간편한 싱크대가 있고, 커피를 끓이는 포트가 있고, 스카치 위스키 몇 병과 유리잔이 놓여진 바가 있고, 네 사람용 사슴가죽 소파가 있고, 작은 책상이 있고, 그리고 방 안의 다른 가구들에 비해 유별나게 커 보이는 푹신한 침대가 있을 뿐이다. 한데도 왠지 여자가 쓰던 방 같지가 않다. 남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실제로 거울 앞에 놓인 화장품 세트도 여자용이 아니다.
면도 후에 쓰는 스킨로션, 면도용 거품 스프레이, 그리고 남성 얼굴이 그려진 향수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침대머리 물건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모형의 파이프가 다섯 개씩이나 누워 있고, 파이프 담배 케이스와 크리스털 유리 재떨이도 깨끗이 씻겨져 준비되어 있다.
벽 쪽 장식장에 놓인 1920년대 라이카 카메라 따위 역시 여자 취향의 콜렉션이 아니다.
아무렴, 샤워부터 하라는 전화를 하다니…너무 노골적이잖아? 그럼에도 박준호는 내숭을 떨며 놀란 시늉을 한다. 그리고 “전 샤워하러 온 게 아닌데요”라고 촌뜨기처럼 또박또박 반문한다.
“이곳 공기는 습기가 많은 편이거든요. 특히 여름엔 정도가 심해서 하루에 두 번 이상 샤워를 안 하면 찜찜해서 견디기 어려워요.”
그녀가 무대 배우의 팬터마임처럼 샤워하는 시늉을 진지하게 구현해 마지않는다. 박준호도 으쓱 어깨를 들었다가 내려놓은 뒤에 입을 연다.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괜찮아요?”
“물으세요.”
“여긴, 뭐하는 데죠? 시루코 여사님의….”
“아하!”
그녀가 대번에 감 잡았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뭘 궁금해하는지 알 것 같아요. 여긴요, 시루코 여사님의 개인 여름 별장이에요. 난 시루코 여사님이 오실 때만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구요.”
박준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한 번 더 묻는다.
“이곳을 관리하신다구요?”
“그래요. 파트타임으로 관리를 맡고 있어요.”
“일본 사람인가요?”
“맞아요.”
그녀가 그렇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묻지 않은 설명까지 덧붙인다.
“일본에서 온 유학생이에요. 브라이튼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구요.”
“그렇군요.”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는 식으로 시선을 걷는 박준호에게 이번에는 그녀가 질문을 한다.
“나도 뭐 하나 묻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박준호가 서슴없이 대답한다.
“학생이죠?”
“네, 학생이에요.”
“일본 학생은 아닌 것 같고…혹시 베이징에서 왔나요?”
“아닌데요.”
“그럼….”
뭔가 호기심으로 가득 찼으면서도 의식적으로 절제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진즉 터득한 터였으므로,
“중국도 대만도 아니구요. 한국학생이에요. 여름방학 아르바이트 일감을 맡았어요. 물론 여사님은 고용자고, 나는 피고용자고…이제 됐습니까?”
흡사 자진 출두한 피의자처럼 그녀의 다음 질문 요지까지 줄줄 늘어놓는다.
“됐어요. 미안해요.”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다. 박준호는 비로소 방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실내는 생각보다 소박하다. 그냥 원룸이다. 우윳빛 유리로 막혀진 샤워장이 있고, 간편한 싱크대가 있고, 커피를 끓이는 포트가 있고, 스카치 위스키 몇 병과 유리잔이 놓여진 바가 있고, 네 사람용 사슴가죽 소파가 있고, 작은 책상이 있고, 그리고 방 안의 다른 가구들에 비해 유별나게 커 보이는 푹신한 침대가 있을 뿐이다. 한데도 왠지 여자가 쓰던 방 같지가 않다. 남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실제로 거울 앞에 놓인 화장품 세트도 여자용이 아니다.
면도 후에 쓰는 스킨로션, 면도용 거품 스프레이, 그리고 남성 얼굴이 그려진 향수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침대머리 물건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모형의 파이프가 다섯 개씩이나 누워 있고, 파이프 담배 케이스와 크리스털 유리 재떨이도 깨끗이 씻겨져 준비되어 있다.
벽 쪽 장식장에 놓인 1920년대 라이카 카메라 따위 역시 여자 취향의 콜렉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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