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

액자 밖으로 걸어 나온 그림 ⑮

"베트남엔 첨이세요."



그녀가 묻는다.

"예, 첨입니다."

"어떠세요?"

"인상 말입니까?"

"네, 인상."

"좋습니다. 특히 호아씨의 환대가 극진해서 더욱 좋습니다."

"전 아무한테나 환대하지 않아요."

박준호에게 초점이 모아진 그녀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막 짜 놓은 이집트 양탄자처럼 부드럽고 진하다. 박준호가 한없이 부드럽고 진한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입을 연다.

"그런 점에서 두 분이 아주 닮은 거 같습니다."

"두 분이라뇨?"

"관장님 말입니다. 똑같이 손님을 환대할 줄 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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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호의 김만상 끌어들이기 작전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를 화두로 삼음으로써 야릇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일신시키기 위함이다. 한데도 호아는 찬물 끼얹기 식의 박준호 작전에 말려드는 것 같지 않다. 김만상을 상기시킴으로써 당연히 표정이 굳어져야 하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밝고 부드럽고 가벼운 표정으로 "관장님은 외출 중이세요"라고 말한다.

"이제 방금 나가셨어요." 그녀는 김만상의 외출을 강조한다. 외출 중이므로 아무 걱정 말라는 투다.

'제기럴.'

박준호는 고개를 흔든다. 이건 호기심이나 야릇함이 아니다. 일종의 낙망이라고나 할까. 그녀에 대한 신선한 기대감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허망함. 만약 지금 그윽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호아가 스카이 홍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박준호는 괜히 호흡을 조절한다. 그리고 이 원색의 열대 꽃이 만발한 쾌적한 실내야말로 스카이 홍 특유의 분위기와 너무 흡사하다고 혼자 고집해마지 않는다. 박준호의 그런 희망사항 감지해 내기라도 하듯 호야가 입을 연다.

"베트남 전쟁 때 난 여섯 살이었어요."

박준호는 그냥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가 계속한다.

"여섯 살 때 사이공에 살았어요. 아니, 탄손누트 공항 근처예요. 우리 집 부근에 한국군 통신 중대가 주둔했어요. 난 늘 그곳에 가서 놀았고, 그래서 한국 병사들 하고 친했어요. 그중에 어느 아저씨는 날 너무 귀여워했어요. 먹을 것도 주고, 장난감도 주고, ……날 목마 태우기도 하고, 꼬옥 안고 내 귀여운 호아야 하며, 내 볼에 뽀뽀를 퍼붓기도 했어요. 그날은 사이공 대통령 관저에 해방전선 깃발이 올라가는 날이었어요. 해방군이 사이공을, 아니, 탄손누트 공항까지 점령했을 때 나는 아저씨를 만나러 달렸어요. 한데 텅 비어 있었어요. 모두 떠나 버렸으므로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 발로 흙을 차며 울었어요. '아저씨, 아저씨, 돌아와요. 돌아와요─'라며".

그녀는 신또르 주스를 한 모금 머금었다 삼키며, 귀익은 국민 성우처럼 감정 넘치는 목소리로 말한다.

"난 처음 당신을 보고 너무 놀랐어요."

"아니, 내가 그때 그 병사하고 닮았다는 말이오?"

박준호가 반문한다.

"그러믄요. 너무 똑같아서…. 내 볼에 뽀뽀했던 그 아저씨가 베트남으로 돌아온 줄 알았어요. 날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녀는 박준호가 차지하고 있는 발코니 흔들의자로 다가온다. 앉겠다는 양해도 없이 무조건 비집고 들어온다. 박준호가 미처 피할 틈도 없다. 실제로 두 사람이 앉기에는 빡빡한 의자다. 엉덩이가 서로 맞비벼져야 한다.

'위빠사나.'

박준호는 혼자 중얼거린다.

'나에게서 모든 욕망을 가져 가소서. 탐욕이, 음욕이, 색정이, 급습하지 못하게 나를 깡그리 비우게 하소서.'

박준호는 눈을 감는다. 맑은 물이 얼음 위를 부드럽게 흐르고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피어 오르는 냉기 때문에 얼음이 호박색으로 변하고, 타이탄 호를 침몰시킨 빙하가 에메랄드빛 바다 수면으로 미끄러지듯 가라앉고, 그 위로 작은 억겹의 포말들이 엘레스톤의 유황기폭처럼, 아니 1월의 폭설처럼 끊임없이 흩날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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