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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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코끝에 스치는 공기가 차가웠다. 지난 밤에 내린 비로 기온이 성큼 내려갔다. 맨발에 와 닿는 거실 마루의 감촉이 따뜻했다. 새벽에 들어 온 난방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발바닥을 마룻바닥에 붙인 채 베란다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늦가을의 차가운 공기가 세상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생을 화려하게 펼치던 단풍이 지난 밤에 내린 비로 거의 떨어져 내렸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닥에 떨어진 동료를 내려다보는 잎들도 조만간 제 운명을 걸을 것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멍하니 서서 길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보았다. 머리도 몸도 텅 비어 잎맥이 훤히 비치는 마른 낙엽이 된 것 같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주방에 서 있었다. 무얼 하려고 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로 거실로 갔고 베란다 밖으로 하릴없이 눈길을 준 채 시간을 보냈다.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집 안을 서성댔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둔 주전자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커피 물을 언제 올려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스 불을 끄고 행주로 포트를 감싸 쥐고 싱크대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포트에 수돗물을 틀어 끼얹었더니 치익 소리를 내며 수증기가 피어올라 얼굴을 에워쌌다. 까맣게 타버린 포트 바닥을 바라보다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서랍을 열고 봉투를 꺼내 거꾸로 뒤집었다. 봉투 속에 들어있던 엽서가 책상 위로 와르르 쏟아져 방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엽서를 한 장 집어 들었다. 벌써 몇 번이나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한 글이었다.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써내려간 여행지의 감상이었다.

<지중해의 더운 바람이 불면 그리스 산야의 초목은 죄다 말라버린다. 높은 산은 그야말로 황량하기 짝이 없다. 차가운 이성을 가진 고독한 거인처럼 느껴지는 자연이다.>

미서는 여름에 보는 그리스의 산이 고독해 보인다 했다. 지중해의 열풍에 말랐던 초목이 4월에 내리는 한 방울의 비를 시작으로 살아난다고 한다. 천지에 초목과 야생화가 피어나면 또 느낌이 달라지는 산과 들.

자연은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쓸쓸하다거나 황량하게 보는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닐까. 무엇이 미서로 하여금 그리스의 산과 들을 고독하게 느끼도록 만들었을까. 나는 미서의 글씨가 빼곡히 적힌 엽서를 주워들고 게임을 하듯 바닥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늘어놓았던 엽서를 다시 주워들었다. 손아귀에 가득 차면 또 바닥에 놓았다. 몇 무더기의 엽서가 나란히 놓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또 다시 열을 지어 놓이곤 했다. 무심한 손놀림 속에서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미서를 떨쳐내지 못하면 나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지난 밤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의식은 몸집을 불려갈 것이다. 바람을 불어넣는 풍선이 점점 커지다 어느 순간 터져버리는 것처럼 나 또한 그렇게 파멸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바닥에 쌓아올린 엽서 무더기들을 손으로 와락 쓸어버렸다. 엽서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미서의 뺨을 때린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무엇이든 몰두할 일이 필요했다. 미서도 잊고 나도 잊고 전병헌도 생각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작은 방의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거실 한 쪽 구석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빠르게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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