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을 만나다

[王을 만나다·22]광릉 (7대 세조·정희왕후)

세조의 기개처럼 쭉쭉뻗은 500년 수령의 전나무숲… 광릉가는 길서 '왕의 길'을 묻다
   

 
[경인일보=글/ 염상균 화성연구회 사무처장]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가 잠든 광릉은 능 자체보다 500년 넘게 세월을 이어온 숲으로 더욱 유명하다. 전에는 '광릉수목원'이라고 부르던 것을 이제는 '국립수목원'으로 바꿔 부르면서 광릉을 찾는 사람보다 수목원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소나무며 참나무와 느티나무, 전나무 등이 길게는 500년여, 짧게는 150년여를 군락지어 마치 원시림처럼 살아간다. 오래 살아온 나무들과 큰 숲이 주는 청신한 기운은 봄을 기다리는 이즈음에도 사람의 발길을 머물게 하기에 충분하다. 광릉의 주변을 지나는 2차선 도로 중간중간에도 중앙분리대처럼 크고 늙은 나무들이 도열해 광릉의 역사를 되짚어 보게 하는 마력도 곁들이게 한다. 오죽했으면 이 길을 (사)한국도로교통협회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았을까?

   

# 국립수목원이 들어선 광릉 숲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자란 전나무들이 생전의 세조임금 기개만 같은데, 동기를 참살하고 조카의 왕위를 빼앗아 뒷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른 세조(1417~1468, 재위 14년)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광릉은 의외로 소박하기만 하다. 나무와 숲이 커서 상대적으로 능역이 작아 보이기도 하지만, 세조의 유언에 따라 능역을 간소하게 한 탓도 크다. 간략한 의례로 백성들의 노동을 줄이기 위해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고, 석실과 석곽도 사용하지 않고 회격(관과 광중(廣中)사이를 석회로 다짐)으로 대신한다. 또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간지 글씨는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긴다. 게다가 능 아래 홍살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에 두었던 판위도 없애고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신도(神道)와 참도(參道)도 생략한다. 그래서 능의 입구부터 소박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 세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둘로 나뉜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같은 산줄기 왼쪽에는 세조의 능, 오른쪽에는 정희왕후의 능을 썼는데 이는 조선왕조 최초로 구현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능이 된다. 광릉의 왕과 왕비 능이 양쪽으로 확실하게 갈라진 것처럼 세조에 대한 후세의 평가 역시 극명하게 대비된다. 단종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나이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밀어내고 즉위한 비정의 작은아버지요, 세조의 측면에서라면 당시의 정치 상황으로 보아 강력한 통치력이 필요했다는 당위성일 것이다. 그러나 약자 쪽에 기울어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때문에 세조가 아무리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고 하더라도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사육신과 단종을 죽인 것 등은 용서할 수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세종 말년과 문종, 단종에 이르도록 왕권보다는 신권이 강화되었던 것을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된 것은 그만큼 세조가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했던 고민의 흔적이다. 여기서 이제는 우리가 보다 이성적인 잣대로 역사 인물들의 잘잘못을 가려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본다. 잘잘못을 제대로 가려야지 무조건 폄하하거나 매도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단종은 불쌍한 죽음을 당했다. 그렇다고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를 무조건적으로 나쁘게만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당시의 정치 여건으로 보아 불가피한 일이었는가에 대한 것부터 업적까지 골고루 논의해야 할 것이다.

   
▲ 정희왕후 능.

# 사흘 연속 혜성이 나타나더니


세조는 1468년 9월 8일에 승하했는데, 그 하루 전에는 백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세자(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자신의 병이 더 이상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는 것을 예견한 것이다. 또 그 전에는 천문이 이상하게 돌아가는지 실록에는 혜성 출현에 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9월 2일과 3일, 4일까지 사흘 동안 연속해서 혜성이 나타나고 또 9월 6일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세조의 죽음을 하늘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정희왕후는 파평윤씨로 영의정을 지낸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슬하에 덕종, 예종 2남과 의숙공주를 두었는데 장남 덕종이 요절하고 차남 예종이 14세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승하하자 덕종의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케 하고,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본인이 직접 나서 7년간의 섭정을 했을 정도로 강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독려했던 일화나 두 차례의 섭정 등에서 보듯이 성종 14년(1483년) 66세로 승하할 때까지 정희왕후의 힘은 생전의 세조만큼이나 기세등등 했다.

   
▲ 광릉은 조선왕조 최초의 동원이강(하나의 정자각 안에 왕과 왕후의 능이 따로 있는 것) 형식의 능이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에 병풍석도 두르지 않고 홍살문과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參道)도 없다.

# 광릉의 원찰 봉선사


광릉의 원찰 봉선사는 광릉에서 2㎞쯤 떨어진 곳에 두었다. 광릉과 국립수목원을 찾는 사람들이 오기에 좋은 절이다. 더구나 이 절은 세조가 승하하고 난 다음해(1469)에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에 의해 지어지고, 그 이름도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 이라는 의미를 담아 봉선사(奉先寺)라 지었으니 광릉과는 한 짝과 같은 존재이다. 주변에는 각종의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즐비해서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봉선사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사위(고명딸인 의숙공주의 남편)와 한명회, 구치관 등이 책임을 맡아 지은 절이라서 왕실 원찰 중에서 으뜸으로 대접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 등 여러 전란 때마다 화를 입은 곳이다. 이 일대가 도성의 외곽으로 춘천과 포천 등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전화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남은 건물들에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아픈 절이기도 하다.

대웅전을 한글 이름으로 바꾸어 '큰법당'으로 붙이고 그 뒤의 계단식 후원이 궁궐의 법식을 따라 조성된 것이어서 반가울 따름이다. 그리고 절이 창건될 때 주성(鑄成)된 봉선사 대종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서 방문객을 즐겁게 한다. 종에 새긴 명문도 뚜렷하여 변송아지(邊松阿之), 강개미치(姜介未致) 등 재미있는 장인들의 이름도 보이므로 당대 문화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이 종은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 종과 같은 시기 동일한 방법으로 조성된 것이어서 희소가치도 크다.

이제 봄이 더 무르익으면 광릉과 주변 숲은 더욱 청신한 기운을 뿜어낼 것이다. 아직은 차가운 날씨의 연속이어서 겨울만 같은데 어느새 숲 속에는 봄기운이 언 땅을 뚫고 올라온다. 역사를 거스를 수 없듯이.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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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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