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특별기고]민족지도자의 산실 114년 역사 송도고… 친일 '누명' 벗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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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보 1933년 11월 1일자 신문에 실린 송도고보의 모습.

'미국인 목사 왓슨' 고려시보 기사 발견
전신 한영서원 1906년 10월 개성서 개교
尹은 초대원장, 설립자로 잘못 알려져
윤재환 의사 등 광복염원 청년들 모여
동창회장 "이제라도 역사 바로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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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룡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지난 10월 3일은 4352주년 개천절이자 송도고등학교 개교 114주년이 된 날이다. 송도고 전신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는 1906년 10월 3일 송악산 아래 산지현(山芝峴)에 있던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의 부속주택을 빌려 한영서원(韓英書院)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후 2년 뒤에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초대 원장에 윤치호, 원감은 왓슨(W. A. Wasson·우리식 이름 왕영덕) 목사가 맡았다.

수차례 학제가 바뀐 후 1917년 3월 20일 '사립송도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고, 1922년 4월 1일 '송도고등보통학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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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고보의 전신인 한영서원.

30여 년 동안 남감리교 선교회와 지역민의 기부로 이루어진 교사(校舍), 부속건물 등 부동산 50만원, 남감리고 선교회 10만원, 윤치호 5만원, 기성회 4만원, 동창회 1만원 총 70만원의 재단금으로 송도고보 재단법인으로 인가된 것이 1936년 8월 15일이었다.

송도고보 재단법인 초대 이사는 전약슬(全約瑟·J. L. Gerdine), 위임세(魏任世·C. N. Weems), 안지선(安至善·L. P. Anderson), 신애도(申愛道·L. H. Snyder), 윤치호, 공성학, 김정호, 양주삼, 이춘호, 우상용, 임용운, 김준옥 이상 12인으로 구성되어 웅장한 교사와 부속 건물을 갖추고, 전국의 영재를 모아 민족지도자를 길러낸 명문학교였다.

지금까지 인천 송도고의 전신인 개성의 송도고보, 그 전신이었던 한영서원 설립자를 윤치호라고 알려졌던 것은 누군가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 판단한다.

필자는 송도고보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백부의 공적을 찾아달라는 윤용택(80) 어른의 호소문을 읽고, 그 사람의 공적을 찾아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송도고보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는 1934년 봄 송도고보 5학년 학생으로 동료와 선후배, 지식인들과 반제국주의 운동을 하다가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돼 50여 일 동안 고초를 겪고 기소유예로 풀려난 후 이듬해 3월 송도고보 16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선인학우회'를 조직하고, 1938년 '재동경 유학생 독립운동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초주검 상태에서 적십자사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가 순국한 도쿄 법정대학 2학년이었던 윤재환(尹載煥) 의사였다.

필자는 윤 의사와 관련된 사건을 살펴보니, 1934년 4월 반제국주의 운동이었던 이른바 '코민테른 레프트회의' 사건에 관련된 이는 약 50명이었는데, 송도고보 졸업생·재학생 10명이 적극 참여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지난해 7월부터 동대문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등에 보고한 문서와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에게 보고한 문서 등을 살펴보면서 이 사건의 전모를 밝혀 윤 의사를 포함, 23명의 공적을 정리하여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한 것은 올해 8월 11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송도고보는 한영서원으로 개교한 이래 민족지도자를 길러낸 산실이었고, 설립자가 미국 남감리교 선교회 소속 목사 왓슨이었으며, 초대 원장은 윤치호였음을 알게 되었다.

한영서원과 송도고보에 관한 기사는 당시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고려시보(高麗時報)' 등에 수백 차례 나온다. 특히 1933년 4월 15일 경기도 개성에서 발간되어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1941년 4월 16일까지 거의 매월 2회 발간되었던 '고려시보'에만 100여 차례 등장한다.

 

특히 1933년 12월 16일 발간된 '고려시보'에는 한영서원의 개교 과정은 물론이고, 한영서원-사립송도고등보통학교(1917년)-송도고등보통학교(1922년)로 교명이 바뀐 사유와 남감리교 지원 외에 재단법인 설립을 위한 노력 등 학교의 변천사를 전면 특집으로 실렸다. 

 

당시 '고려시보'는 송도고의 설립자가 윤치호가 아닌 왓슨 목사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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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고보 전신인 한영서원의 설립자가 왓슨이라고 나와있는 고려시보의 1933년 12월 16일 기사.

개성 한영서원을 설립하여 그로 인해 선교 활동이 성공적이어서 포교 중심을 서울에서 개성으로 정했다는 1914년 남감리교 선교회 측의 평가에서 보듯이 한영서원의 위치는 이미 그 명성이 전국에 떨쳤고, 만세시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광주학생운동 뒤를 이은 1930년 1월부터 송도고보의 반일시위는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250여 명의 재학생 중, 시위 주도자 6명이 퇴학당하고, 150여 명이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 이른바 '개성격문사건'으로 20여 명이 피체돼 고초를 겪기도 했는데, 조국광복을 염원하던 열혈 청년들이 전국에서 송도고보로 지원하게 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윤재환 의사도 충남 예산 출신으로 공주영명고보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와 관련하여 10여 명이 퇴학당하자 송도고보에 편입했던 것이다.

특히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우리나라 독립군 터전을 말살하게 되자 조국광복의 꿈이 사라질 것을 염려한 지사들은 국내외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주로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송도고보 13회 졸업생 김성원(金成源)과 5학년 재학 중 퇴학당한 김계춘(金桂春), 장식연(張湜連) 지사는 1년여 구류생활을 거치면서 모진 고문 끝에 각각 징역 3년과 2년 6월이 선고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에 앞서 송도고보 출신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한 이는 이재유(李載裕, 1905~1944) 의사였다. 그는 함경남도 삼수군 출신으로 1925년 송도고보 4학년에 재학 중, 민족 차별 철폐를 위해서는 일제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가 퇴학당한 후 일본으로 가서 도쿄 사립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3개월 만에 퇴학당하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갖은 심문을 거쳐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이 선고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2년 12월 21일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하여 언론활동, 노동·농민조합 조직, 독서회를 통한 학생운동 지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1934년 1월 21일 서대문경찰서에 피체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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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고보 출신의 독립운동가.(왼쪽위부터 시계방향) 김성원, 김계춘, 장식연 지사, 이재유 의사.

그의 행동은 당시 개성과 서울에서 '코민테른 레프트회의'에 참여한 송도고보 졸업생·재학생 10여 명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다른 지식인들과 연계했던 것이다

그는 1934년 4월 탈옥했다가 1936년 12월 피체되어 1938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이 선고되어 고초를 겪고 1942년 9월 12일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비전향자라 하여 계속 청주보호교도소에 구금되어 있다가 1944년 10월 26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이재유 의사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필자는 지난 9월 17일 송도고보 출신 포상신청자 10명에 대하여 유튜브 촬영을 위해 송도고등학교(교장 이상원)를 찾았다. 학교 재단 관계자와의 대화에서 "학교 설립자가 윤치호라고 알고 있었는데, 윤치호는 초대 원장이고, 설립자는 왓슨 목사라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고 하며, 놀라워했다.

송도고 정규성 동창회장은 "정말 놀랄 만한 일이다. 지금까지 친일파가 설립한 학교라는 누명을 쓴 세월을 한꺼번에 벗는 느낌이다. 100여 년 전부터 모교에 관한 신문기사가 그렇게 자세히 나와 있다는 것을 몰랐지만, 이제라도 바로잡아야겠다"고 했다. 

 

송도재단인 송도중학교 출신으로 국회의원 시절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던 최용규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이사장은 "영명고보, 이화여고, 정신여고 등 초창기 학교 설립자는 대개 선교사였는데, 모교만 친일파 외부대신 출신 윤치호였다는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해 왔다"며 "만시지탄이나마 모교의 설립자가 바르게 밝혀진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태룡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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