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진 칼럼

[홍창진 칼럼]스스로 만족하기

삶의 환경은 선택아닌 찾아오는 것
너무 불행감에 빠져 있지 마세요
화만 내지 말고 가끔 격려도 필요
가정은 누구 탓 할 수 없는 운명체
아이는 부모가 버티면 행복한 존재

2020113001001110000056511
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
한국 사회에서 만족할 만한 삶의 환경은 어느 정도일까요? 일류대를 나와 대기업에서 넉넉한 연봉을 받으면서, 자녀는 둘 정도 키우고, 부모를 비롯해 건사해야 할 군식구가 없으면(거기에 물려받을 유산이라도 조금 있으면) 만족할 만한 수준인가요?

요즘 들어 남편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다는 40대 주부가 있습니다. 초등학생 아이가 둘이 있어서 교육비는 엄청나게 드는데, 집 한 채 없이 전세대란을 면치 못하는 자기 신세가 너무 불안합니다. 남편은 잘 오르지도 않는 박봉을 몇 년째 받으며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나마 업무량도 많아 야근하는 날이 빈번합니다. 퇴근해서는 잠깐 아이와 놀아주고 바로 잠에 곯아떨어지곤 하지요.

남편이 잘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남편 얼굴만 보면 마음 안의 불안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모두 짜증이 되어 튀어나옵니다. 이 나이 먹도록 돈도 못 벌고 뭐했나 싶고, 나는 이렇게 걱정이 태산인데 남편은 무사태평인 것 같아 화가 더 치밀어 오릅니다. 남편 잘못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고 한편으론 남편이 측은하지만, 아이들 교육비에 집 걱정을 하다 보면 어느덧 남편에게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체 못하는 감정 때문에 스스로도 힘들지만 남편에게 자꾸 상처를 주게 되고, 아이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만일 자기 소유의 집이 있고 남편 직장이 월급 많이 주는 대기업이라면 이 주부의 화가 가라앉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궐 같은 집에서 많은 돈을 가진다 한들 또 다른 이유로 화가 날 것이 뻔합니다. 이 주부의 화는 불안한 전세나 남편의 박봉 때문이 아니라,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환경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병든 시부모를 모시는 건 물론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까지 수발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 아닌 사고로 남편이 장애를 입기도 하고 아이가 심각한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불행을 토로하며 사는 건 아닙니다. 내가 처한 환경이 모든 화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삶의 환경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를 찾아와 만나고, 배우자도 그렇게 찾아와 만나고, 자녀도 그렇게 찾아와 만나게 됩니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한 일도 찾아오고 행복한 일도 찾아옵니다. 지금 내 처지는 내 선택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뤄졌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나 자신을 원망할 이유도 남편을 원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도 화를 낼 남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화가 치밀어도 화를 낼 대상이 없는 가정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산에서 도를 닦으며 사는 게 아닌 바에야,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화냈다가 뒤돌아서 좀 미안해 하고, 어느 날은 또 기분 좋은 순간을 맞기도 하고…. 그렇게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이 재미 아닐까요? 그러니, 너무 불행감에 빠져서 우울한 상태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자기 처지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인 이상 욕심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화내고 싸우고 울게 되더라도, 이것이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과정, 누구나 겪는 삶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화만 내지 말고 가끔 격려와 칭찬이라는 깨소금도 가미하면 좋겠습니다. 돈 못 벌어 오는 남편이 짜증 나서 화는 너무 자주 내는데, 가끔 그가 불쌍하고 측은하게 느껴질 때는 속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남편, 요즘 고생이 많아. 힘내!" "우리 식구는 당신 덕에 사는 거야. 몸조심해." 열 번 화를 냈어도 이런 격려 한마디로 우울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처지를 버텨 낼 힘이 생긴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최근 들어 많은 부부들이 이혼을 합니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결국 서로 탓만 하다가 가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운명체입니다. 부부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운명으로 만난 아이는 부모가 그저 버텨주기만 해도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