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철 칼럼

[윤상철 칼럼] 정명(正名), 제자리 찾기

윤상철_-_기명칼럼필진.jpg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유가의 '정명(正名)'사상은 원래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즉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회과학의 관점을 취한다면, 어떤 이름이나 직함이 그에 상응하는 의무와 책임 혹은 기능적 역할을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탈근대사회 혹은 탈진실사회로 오면 다분히 규범적이고 기능주의적이고 정당성 있는(legitimate) 이름은 사라지고 만다.

과거에 우리 사회가 극심한 정치사회적 위기에 처하면, 권위주의 정권과 야권의 지도자들이 정치적, 종교적 사회원로들을 만나면서 그 해결의 출구를 찾았다. 그 원로들은 정치적 파벌을 초월한 품격과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 그러한 원로들은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이제 그 원로들을 찾지 않는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뒷배경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원로로 삼는다. 그 원로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려는 책략만 돋보인다. '6인회', '7인회', '원탁회의' 등은 실재하는지조차 모호하였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경직되고 단편적인 사회를 훨씬 자유롭고 복잡하게 변화시킨다. 더 많은 집단들과 개인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만큼 문제도 다층적이고 그 해법도 섬세해야 한다. 그만큼 더 많은 전문가들이 필요하고 그 전문가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 역시 높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전문가들이 정치적 포퓰리스트들의 병풍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나아가 스스로 포퓰리스트가 되고 있다. 당연히 그들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정책적 합리성을 결여한 정치적 선택들에 대해서 전문가들도, 정부관료들도 더 이상 맞서지 않는다.



사회운동은 어떠한가? 환경운동가들은 환경문제에 대해 과학적 분석보다는 위기담론으로 대처하여 스스로의 성가를 높이려는 아마추어들인 경우가 많다. 지구가 소빙하기로 접어들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연구는 돌이켜보지 않고 지구온난화와 탄소중립만을 외친다. 저렴한 전기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기후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발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여성운동과 여성가족부가 성폭력피해자와 여성인권유린 사태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를 보면,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나 여성가족부의 존폐가 거론될 만하다. 이른바 신사회운동이란 자본가·노동자 계급균열이나 민주·반민주 세력 균열에서 은폐되거나 무시되는 다른 사회적 균열들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적 사회균열에 휩쓸리지 않고 언제나 스스로를 드러내야 함에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체제에서 지역주민이나 특정 사회집단을 대표하여 국가의 방향을 정하고 정책을 집행한다. 국민을 대표하여 그들로부터 권한을 제한적으로 위임받아 행사한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인들은 국민들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더욱 중시한다. 심지어 검증되지도 않은 이념지향적 정책을 추구하기도 한다. 정당은 정강과 정책을 통해 국가운영의 대강을 국민들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내부의 세력균형과 강력한 정치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예측 불가능한 정치와 정책이 발생한다.

주권자인 국민들은 어떠한가? 민주주의의 다수결은 교양있는 시민들의 집단 지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중시된다. 그러나 국민들은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공동체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정치인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명확한 원칙과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국가운영의 원리와 목표에 대해서 충분한 교양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아무런 교양이나 지식 없이 정치인들에 의해 이리저리 선동되어 국가와 집단, 마침내는 자신을 망치는 그러한 시민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법치주의는 점차 붕괴하고 있다. 법 적용의 형평성은 차별적 법 집행에 의해 사라지고 있다. 다수결의 횡포 속에서 정파와 집단의 특수 이익을 보장하는 비민주적 악법들이 마구 만들어지고 있다. 법의 적용자이자 사회의 심판자들이 정파적 논리에 의해 구성되고 작동하면서 법치주의와 공공성은 흔들리고 있다. 정치적 지배자들은 사법적 판단을 공공연히 앞장서서 부정한다. 그러나 법치주의 없이 민주주의는 존속하기 어렵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법적 판단에 대해서 법률 자체를 부정한다면 법치주의도 민주주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사안들은 권위주의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정명(正名)이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허명을 믿으며 살아가는, 그야말로 탈진실의 사회이다. 그럼에도 정명이 지배하는 영역이 이 사회를 든든히 받치고 있기에 그나마 지탱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은 시민들이 여전히 거세게 정명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네 이름대로 하라.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