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근 칼럼

[전호근 칼럼] 중학교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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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서울에서도 부촌인 동네에 있었는데 학교 주변에 학교보다 큰 집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바라다보이는 어느 집에 건물과 건물 사이로 구름다리가 걸쳐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대도시의 학교생활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때 만난 선생님들은 학생을 가르치려는 열정이나 교사로서의 자부심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 일인지 학생들이 잘 따르지 않았다.

3학년이 되어서 만난 기술 과목 신언규 선생님은 담임이기도 하셨는데, 내가 여러모로 존경했던 분이다. 당시 나는 라디오 키트 조립에 열심이었는데 모르는 게 있으면 여쭈었고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라디오의 작동 원리까지 친절하고 명쾌하게 일러주셨다. 선생님을 더욱 존경하게 된 계기가 있다. 언젠가 가정환경 조사 시간에 한 친구가 부모의 직업을 말하지 못하고 쭈뼛거리자 선생님은 이렇게 물었다.

"아버님이 노동자이신가요?"



"…예."

"감추거나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선생님은 이때만은 평소와 다르게 존댓말을 쓰면서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말도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고 노동자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으며 일하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도 그때 비로소 알았다. 


2학년때 서울의 부촌으로 전학왔다
가장 나쁜기억중 하나는 점심시간
도시락 반강제 빼앗아 먹던 친구탓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학교 주변에는 폭력 서클이 많았고 어쩌다 그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몇 대 맞을 각오를 해야 했으며 실제로 그런 순간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럼에도 나름의 선은 있었다. 주먹 쓰는 아이들은 공부하는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학교는 주먹 쓰는 아이들과 공부하는 아이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는 공부하는 쪽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폭력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지만 그렇다고 공부하는 아이들과 친했던 것은 아니다. 전에 있던 학교에서는 여럿이 함께 공부하며 시험 관련 정보도 공유했지만 서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친하다고 여기던 반 친구에게 시험과 관련된 내용을 물었는데 그 친구는 경쟁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정색을 하며 거절했다. 충격이 꽤 컸다.

가장 나쁜 기억 중 하나는 점심시간이다. 자기들이 싸온 도시락은 1교시가 끝나면 먹어버리고 점심시간에는 젓가락만 들고 다니며 남들의 도시락을 반강제로 빼앗아 먹던 친구들이 있었다. 도시락뿐이 아니었다. 어쩌다 매점에서 라면이라도 먹을라치면 그 친구들이 나타나 한 젓가락씩 먹는 바람에 나는 그릇에 남은 국물만 먹기 일쑤였다. 그들이 미웠다.

친한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웠던 친구 용범이와 가까이 지냈는데 한번은 내가 여름방학 때 우리 집에 같이 놀러 가자고 초대한 적이 있다. 나는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했는데 그 사실을 안 친구의 어머님이 나를 집으로 부르셨다. 서울에 와서 남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은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꽤 설렜다.

대부분 산동네에 산다는 데 몰랐다
가난을 읽어낼만큼 성숙하지 못해


어느 토요일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나는 친구를 따라 친구의 집으로 갔다. 산동네였다. 골목을 돌고 돌면서 많이 놀랐다. 도무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곳에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는데 번듯하게 네모진 집이 거의 없는데다 대부분 지붕도 온전치 않았다. 학교는 부촌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곳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부분 산동네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내 친구가 왜 어른스러운지, 다른 친구들이 왜 그토록 거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우리는 어머님께서 차려주신 하이라이스를 먹었다. 어머님의 따뜻한 환대와 함께한 그날의 식사는 그때까지 내가 먹어본 가장 훌륭한 점심이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친구들의 거친 모습에서 그들을 그렇게 만든 가난을 읽어낼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나의 중학시절 점심시간은 훨씬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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